50. 엘리시아가 만날 가장 나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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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엘리시아가 만날 가장 나쁜 놈
2022.06.25.
“울지 마. 엘리시아.”
그녀가 좀체 울음을 그치지 못하자 일레온이 난처한 듯 중얼거렸다.
“쇤네야. 울지 마. 응?”
엘리시아는 자신을 달래는 일레온의 목소리에 풉하고 웃어버렸다.
“울다가 웃는 건 뭐야?”
그가 마뜩잖다는 듯 물었다.
“그, 쇤네는 그렇게 쓰는 게 아닌데.”
“그런가? 내 귀에는 네가 외국어라도 쓰는 것처럼 들려서 그렇게 써도 되는 줄 알고.”
“외국어……처럼 들렸다고요?”
“응.”
훌쩍이느라 말이 짧아진 엘리시아를 보며 그는 귀엽다는 듯 웃었다. 문득 한기가 도는 등을 쓸어주던 일레온이 물었다.
“추워?”
“네. 조금 추워요.”
일레온은 그녀를 안은 채 그대로 유연하게 몸을 일으켰다. 마치 엘리시아의 몸무게 따위는 전혀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은 듯한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그대로 침대로 향한 일레온은 그녀를 눕히고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었다.
“휴.”
물에 빠졌을 때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쳤던 게 타격이 있었을까? 아니면 일레온 때문에 긴장하고 놀랐던 탓일까?
전신의 뼈 마디마디가 살려달라고 신음하는 것처럼 몸이 지끈거렸다.
“빨리 자.”
일레온이 말하기가 무섭게 스르르 눈이 감겼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일레온의 침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피로를 이겼다.
“여기서 자라고요?”
“그럼 어디서 자게?”
“제, 제 방이나…….”
“그 메이드 방에서 자겠다고?”
일레온이 조금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일하는 사용인한테 손을 대는 취미는 없지만. 네가 원한다면 기대에 부응해 보겠어.”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곧 대공가 안주인이 될 텐데 얌전히 여기서 자라는 뜻이지.”
엘리시아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공가 안주인이라니. 너무 앞서나가는 거 아니냐고.
‘일레온 이상해.’
뭔가 거침이 없는 그를 보니 이제까지 알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아까 막연히 두렵게 느껴질 때랑 또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옆에 나란히 누워서 눈을 마주치며 제 머리카락을 귓가로 쓸어넘겨 준다든지, 한기에 소름이 돋은 팔을 커다란 손으로 어루만져 준다든지. 괜히 슈미즈 위로 등허리의 얕게 팬 골을 따라 손끝을 오르내리며 간지럽히거나 그랬다.
넌 내 거.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아까 내가 해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지금 이런 거 따지는 건 좀 아닌가.’
엘리시아는 갑자기 확 좁혀진 그와의 거리가 영 어색했지만, 일레온의 손을 뿌리치거나 거절하지는 않았다.
꾸벅.
그렇게 일레온이 끝없이 몸을 치대는데도 결국 견디지 못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잘자.”
엘리시아가 잠들자 일레온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품으로 꼭 끌어안았다.
“난 눈을 붙이기엔 그른 것 같지만.”
중얼거리는 일레온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엘리시아가 제게 거짓말을 하거나, 신분을 속이거나, 로나가 아닌 척하는 모든 것이 그에게는 사실 별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왜 대공저에서 도망치듯 사라진 건지?
눈을 뜬 그를 어째서 모르는 척하는지?
신관이었던 그녀가 로나로 대공저에서 일하게 된 데에는 어떤 연유가 있는지?
아주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일레온에게는 그녀를 제 곁으로 데려오는 것만이 중요했다.
전에도 엘리시아 때문에 몇 번 기분이 상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녀가 카리나에게 자신을 소개해주려고 일부러 자리를 피해주었다든지 그럴 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엘리시아가 애타게 보고 싶은 건 일레온 자신이었다. 하루라도 그녀를 안 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유테르 공작저를 찾아가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시아를 보고 나면 언제 화가 나고 기분이 상했냐는 듯 그 감정이 곧바로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미소가 지어졌다.
「미안해요. 대공 전하. 이건 받을 수 없어요.」
「이제 찾아오지 마세요. 저는 결혼 못 해요.」
「인연이 아닌걸요. 당신과 저는…… 만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거예요.」
이번에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일레온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싫었다. 그 거짓말을 자신의 곁을 떠나기 위해 하고 있는 건 더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로나라면.
제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걸 보며 눈물 흘리며 안아주고 달래주려 애쓰던 그녀라면.
제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소문을 퍼트린다면 분명히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돌아오고야 말겠지. 십중팔구는 울면서 말이다.
‘내가 부족한 자여야 옆에 머물러주겠다면. 그래.’
삐뚤어진 마음으로 그녀를 속였다.
「……내, 내가 온 거 맞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약지 못한 여자였다.
그 말 몇 마디에 제 발로 그의 품으로 걸어들어왔다.
“나야 고맙지만.”
어디 가서 정말 나쁜 놈이라도 만나면 큰일이다.
뭐 그럴 걱정은 이제 없지만.
엘리시아 유테르가 만날 가장 나쁜 놈은 일레온 클레벤트 그가 될 예정이었다.
“계속 여기 있어. 내 옆에. 엘리시아.”
일레온은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을 한참 가지런히 쓸어넘겨 주다가 하얗고 고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
또 꿈이었다.
꿈속의 일레온은 눈을 할퀴며 여전히 고통스러워했다.
「차라리 죽고 싶어.」
분명히 깨끗하게 나았는데, 꿈속의 그는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걸까.
‘아직 완전히 눈이 나은 게 아니라는 뜻일까?’
꿈속이라도, 예전에 봤던 일레온의 모습을 다시 보는 거라도 비참한 그의 모습을 다시 눈에 담는 것은 괴로웠다.
엘리시아는 흐느끼는 일레온에게 다가갔다.
‘아파하지 말아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
엘리시아는 투명한 제 손이 닿지 않는 일레온을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울부짖던 일레온이 그녀의 기척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물었다.
「누구야? 거기 누가 있어?」
일레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나를 혼자 두지 말아.」
엘리시아는 그를 안아주려 했다.
‘응?’
문득 어둑한 곳에 달빛이 비치기라도 한 듯 짐승처럼 울부짖던 일레온이 좀 더 또렷하게 보였다.
여태 조심스레 끌어안고 쓸어주던 어깨가 조금 전보다 아담해졌다.
결이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방치된 짐승처럼 덥수룩하게 길어졌다.
「……도와줘.」
가느다란 목소리가 품 안에서 들려왔다.
엘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분명 일레온이었는데, 그를 위로해주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안겨 있는 이는 다른 사람이었다.
‘여자?’
일레온은? 일레온은 어떻게 된 거지? 엘리시아가 혼란스러워할 때였다.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도와줘.」
여자가 조금 고개를 들자 흐트러진 채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한 쌍의 붉은 눈동자가 빛을 내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검을…… 검 한 자루만 구해다오. 나를 데려갈 수 없다면.」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구하러 올게요.’
선명한 붉은 눈동자에 한 줄기 희망이 어렸다.
「꼭이다. 꼭.」
일레온을 만지려 하면 엘리시아가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그를 통과해버렸다.
꿈속에서라도 그를 안타까워하며 그저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출 뿐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달랐다.
마치 엘리시아 그녀가 보이는 사람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듣고’ 대답했다.
「꼭 나를 찾으러 와다오.」
‘그럴게요.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요.’
엘리시아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낯익은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엉망인 행색으로 눈빛만은 선명한 여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타오르는 듯 빨갛던 눈만은 엘리시아의 가슴에 박히기라도 한 듯 잊혀지지 않았다.
‘기다려요. 꼭 돌아올 테니까.’
다음 순간 엘리시아는 출렁이는 배의 선미에 서 있었다.
발 아래로 배가 치고 지나간 검은 호숫물이 소용돌이처럼 거칠게 일렁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요.’
사비엘의 피를 머금은 작은 칼이 호수로 떨어졌다.
그리고 엘리시아도 그 뒤를 따랐다.
***
“헉! 큽…… 쿨럭, 쿨럭.”
엘리시아는 몸을 웅크린 채 격렬하게 기침했다.
이상한 꿈이었다. 앞뒤 연결도 안 되는 엉망진창인 꿈인데, 꿈에서 깨는 순간 느끼는 절망의 감각만은 무엇보다 생생했다. 꾸역꾸역 입으로 코로 물이 밀려들어 숨이 막히던 것까지 이토록 실감 날 수가 없다.
“엘리시아.”
일레온이 놀란 듯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품에 안았다.
“하아. 하아.”
“왜 그래?”
“흐윽.”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엘리시아. 엘리시아의 기억인 것 같아.’
그게 아니라면 몸에 새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럴 수가 있을까.
그리고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엘리시아는 누구보다 살고 싶어 했다.
처음에는 로렐 호숫가에서 죽은 줄 알았다며 발견된 제 육신의 주인이 나쁜 선택이라도 한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렇게 예쁘고 젊은 여자가 왜 호수에 몸을 던졌을까?
의아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방법이 그것뿐이라 배에서 뛰어내린 것이었다.
죽으려고 뛰어내린 것이 아니다.
배에서 도망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적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 몰린 좌절과 비참함.
그러나 마음속에 결연한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프지 않은 게 아니었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서글픔. 스스로를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이 엘리시아가 울게 했다.
운명.
처음 꿈을 꾸었을 때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 지긋지긋한 운명을 벗어나겠다고.
엘리시아는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알았을까?
지금 자신은 원작을 보고 빙의해서 알았다 치고, 엘리시아는 빙의자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마리엘라.’
그녀 때문일까?
딸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다던 그녀가 엘리시아에게 <눈먼 짐승의 꽃> 내용을 알려주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운명을 피해 엘리시아가 신관까지 되었다면서 무엇 때문에 그토록 진절머리를 쳤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운명을 그렇게나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무엇도 확실하게 정해진 내일은 있을 수 없을 터인데.
한편으로 검은 불꽃이 일며 타들어가던 카페 카르디날의 봉투를 떠올리자 막막하기도 했다.
엘리시아가 진정되자 일레온이 품에서 그녀를 놓아주었다.
“잘 잤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겠네.”
“미, 미안해요. 놀랐죠? 조금…… 이상한 꿈을 꾸어서.”
일레온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자고 일어난 얼굴도 예뻐서.”
엘리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엉망일 텐데. 보지 마세요. 일레온 님.”
엘리시아는 이불을 눈 아래까지 끌어당겼다.
“아침 인사는 없나? 가벼운 키스 정도면 좋겠는데. 그리고 앞으로는 이름으로 부르도록 해.”
“그런 거 시키지 마세요.”
그는 황족이었다. 게다가 보통 이름을 부르는 건 암묵적으로 깊은 사이라는 뜻이어서 미혼 남녀 사이에는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새삼스레 내외하겠다는 건가? 난 어제 정중하게 물러났는데.”
뻔뻔한 일레온의 말에 엘리시아는 기가 막혔다.
정중하게 물러났다고? 정중하게?
조금 전 이불을 끌어당기면서 본 바로는 슈미즈 밖으로 드러난 팔과 목덜미 아래쪽으로 그가 자신을 물고 뜯고 즐기며 실컷 맛본 흔적이 가득했다.
“……단어 선택이 뛰어나시네요.”
“칭찬 고맙군. 그 이불부터 좀 치우고.”
“싫어요. 옷 좀 입게 나가요.”
“여긴 내 방인데.”
“이익, 정말.”
얄팍한 이불 한 장을 두고 뺏고, 뺏기지 않으려는 알력싸움이 일어났다.
하지만 힘의 차이를 이길 수 없었던 엘리시아는 꽉 잡은 이불과 함께 일레온의 품에 반쯤 끌려가며 이불도 뺏기고 말았다.
“아…….”
얼굴을 붉힌 채 얇은 속옷만 걸치고 있는 엘리시아를 보고 일레온의 얼굴에서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싹 가셨다.
“미, 미안.”
그는 허둥대며 엘리시아에게 뺏은 이불을 도로 그녀의 몸에 둘러주었다.
엘리시아는 잠시 그대로 돌이 된 듯 굳었다.
환한 햇빛 아래 그의 눈 아래에 맨피부를 드러내 보이다니 부끄러워서 도망가고 싶었다.
“너, 너무 그럴 거 없잖아. 팔이나 어깨, 가슴 같은데 그 정도 드러나는 디자인의 드레스도 많이 있으니.”
일레온은 매를 버는 타입이었다.
엘리시아는 양손의 주먹을 꽉 쥐고 분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때 침실 문에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문밖에서 집사 베르나르가 일레온에게 고했다.
“대공 전하. 유테르 공작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대공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어찌할까요?”
당황한 엘리시아가 일레온을 보았다. 일레온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지금 바로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