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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일레온을 사랑해요 (51/151)


51. 일레온을 사랑해요
2022.06.29.



 


“대공 전하. 유테르 공작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대공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어찌할까요?”

엘리시아가 당황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일레온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지금 바로 가겠다.”

유테르 공작가에서 사람을 보내 엘리시아의 행방을 묻기에 ‘모른다’고 일관하며 돌려보냈다. 하지만 무언가를 알고 온 듯 공작부인이 직접 찾아왔다는 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어머니께서…….”

사랑스러운 여인의 얼굴에 그늘이 지자 일레온이 몸을 낮추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만나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있어.”

“괜찮을까요? 화가 많이 나셨을 텐데.”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야. 그대를 꼬여내었으니.”

일레온은 눈을 감고 얼굴을 내밀었다.


“응원해줘야지.”

“뭘요?”

“무서운 공작부인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지 않도록.”

“힘내세요.”

엘리시아는 몸에 말린 이불을 움켜쥐며 일레온을 외면했다.


“가차 없군.”

일레온이 아쉬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다녀올게.”

그가 침실 밖으로 사라지자 엘리시아는 부리나케 달려가 그의 침실 문을 잠갔다.


“휴.”

도저히 꼴이 엉망이라 이런 상태로는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리엘라를 일레온이 이길 수 없을 텐데.”

마음이 조급했다. 일레온을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추했다. 딸의 처신에 예민한 마리엘라가 이 꼴을 봤다가는 희게 질린 얼굴로 스르르 쓰러지리라 예상될 정도였다.


“정말 난리도 아니네.”

총체적 난국이었다. 눈은 빨갛고 눈 아래가 부어 있었다. 얼굴이 전체적으로 꾀죄죄한 건 덤이었다.

엘리시아는 거울을 보며 금빛 머리카락에 엉겨 존재감을 뽐내는 짙은 빨간색 카펫 실을 떼어냈다. 일레온과 바닥을 뒹굴며 격렬하게 키스를 나누고 얻은 전리품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대공저.

누군가 지금 제 꼴을 봤다가는……. 으, 상상하기도 싫다.


“빨리 씻어야 해.”

엘리시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일레온의 욕실로 향했다.

***

대공가의 응접실.

마리엘라는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원작을 탈출할 수 있는 타이밍은 극히 드물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는데.’

그레로사로 가는 길에 신관 엘리시아는 실종되었다.

하지만 교단의 사고인 데다 전원 사망이라는 참상이 워낙 중하여 쉬쉬하던 상황이었다. 애가 타서 백방으로 찾아도 찾아내지 못한 딸을 하듄샤에서 찾아 보호하고 있다는 연락을 들었을 때 그녀는 기절할 뻔했다.

엘리시아는 마리엘라의 삶의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눈먼 짐승의 꽃> 책 속 세계에 자신이 빙의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녀도 흔히들 그렇듯이 이곳이 현실감이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원래 세계일까.

혹시 내가 죽으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줄 수 있다는 원작 엔딩은 도대체 언제 시작되길래 주인공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걸까.

참 이상한 일이었다.

경쟁과 냉정한 현실에 치일 때는 그토록 낭만적이고 즐겁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었다. 매일 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즐겁게 좋아하는 글을 읽으며 하루의 고단함을 잊곤 했다. 소소하고 확실한 현실도피, ‘소확도’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정작 책 속에 빙의했는데 하루하루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현실에 살 때는 그녀도 그 세계의 일부였다.

‘책 속’ 세계에서는 그런 감각이 없었다. 잘못되어 튕겨져 나온 파편 하나가 어색하게 엉뚱한 곳에 나동그라진 느낌이었다.

그런 마리엘라가 스스로 살아 있다고 느낀 순간이 바로 엘리시아를 임신했을 때였다.

제 몸 안에 움튼 생명의 씨앗은 이곳 역시 삶의 터전이라는 걸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그때부터 비로소 진심으로 이곳에서 발을 딛고 살 수 있었다.

그런 아이를 지키고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는데, 결과가 어째서 이런 걸까.

마리엘라는 매일 가슴 가운데가 화병이라도 걸린 듯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한 지 오래였다.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곧 일레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균을 압도하는 큰 키에 다부진 몸, 오데르의 힘을 이어받았다는 증거인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얼굴.

마리엘라가 이렇게 일레온을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관조자의 시점이 되어 그를 훑어보았다. 더없이 멋지고 훌륭한 남자였다.

하지만 엘리시아와는 안 된다. 이야기 속이란 그런 것이다. 정해진 것을 반드시 전개하려는 개입이 있을 때는 더더욱.

일레온은 마리엘라가 충분히 그를 살피도록 말없이 시선을 찻잔에 고정했다. 이걸 엘리시아의 어미인 제게 배려라고 매너 있게 행동하는 건가?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남자였다. 마리엘라는 어쩐지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헛웃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엘리시아를 데려가겠어요.”

“왜 그녀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당연히…….”

당연히라니? 마리엘라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당연히라. 그녀가 여기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하셨군요.”

일레온은 마리엘라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럼 앞으로도 여기서 지낸다 한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궤변 늘어놓지 마세요. 대공 전하. 그 아이는 아직 출가하지 않은 자식입니다. 딸 아이의 혼사에 대한 결정권은 제 남편에게 있어요.”

“그런데 유테르 공작께서 오시지 않고 공작부인께서 오신 겁니까?”

“그, 그건…….”

남편인 질리언은 마리엘라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예언서’ 때문에 딸이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걸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역시 이세계에 속한 인물. 그에게 일레온이 주인공이라는 사실까지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런 법을 누가 정한 건 아니지만, 변수를 줄이는 건 중요했으니까.


“네. 공작부인. 엘리시아는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공작저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무슨 뜻이죠? 설마 두 사람…….”

딸의 탈선을 의심하는 마리엘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닙니다.”

“휴.”

마리엘라는 안심한 나머지 소리 내어 한숨을 쉬어버렸다.

남주랑 엑스트라인 내 딸이 사고 치는 꼴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허락할 수 없어.

하지만 이어진 일레온의 말에 기절할 것 같았다.


“사실 따님께서는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뭐라고요? 허락이라니!”

펄펄 뛰는 마리엘라 앞에 일레온은 진지하게 해야 할 말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선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게도 결혼은 인생에 중요한 일이니까요. 제 신부가 불명예를 안는 일을 하진 않을 겁니다.”

“기가 막히는군요. 지금 갓 데뷔탕트를 마친 딸이 부모 허락도 없이 대공 전하 곁에 머물겠다고 하는데 이것보다 더 불명예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저희가 순순히 대공 전하와 엘리시아의 혼인을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허락해주십시오.”

일레온은 마리엘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엘리시아 영애와 부모님께 축복받는 행복한 출발을 하고 싶습니다.”

아아, 일레온은 어쩌면 이렇게 정석적인 인물인가.

정말 예비 사위의 바람직한 전형인 것만 같았다.

그것이 마리엘라를 더욱 속 터지게 했다. 마치 하늘이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사윗감을 원작 때문에 안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거절해야 한다는 점이 말이다.

그렇게 마리엘라가 요지부동인 일레온 앞에서 곤란해할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엘리시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딸이 처음 보는 드레스를 입은 모습에 마리엘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이 집에서 씻고, 옷도 갈아입은 것이다.

엘리시아는 조신하게 걸어들어와 일레온의 옆에 앉았다. 그걸 보며 마리엘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머니.”

“내가 네 어미라는 걸 기억은 하는 거니.”

처음으로 듣는 마리엘라의 싸늘한 말투에 엘리시아가 움찔했다.


“돌아가자.”

“……죄송해요.”

엘리시아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낮은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보며 말했다.


“저는 돌아가지 않아요. 여기 있고 싶어요.”

“엘리시아!”

마리엘라가 언성을 높였다.

엘리시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일레온의 곁으로 달라붙은 것과, 그가 그녀를 보호하기라도 할 것처럼 팔을 들어 엘리시아의 앞을 막은 건 거의 동시였다.


 
그 모습을 본 마리엘라는 어지러워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잠깐. 엘리시아와 둘만 이야기 좀 하게 해줘요.”

일레온이 엘리시아를 보았다. 조금 긴장한 표정이긴 했지만, 엘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레온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탁.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고도 마리엘라는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조심히 문에 다가가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지 살짝 문을 열어 확인까지 하고 나서야 자리로 돌아왔다.


“너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마리엘라는 애가 탔다. 그 와중에 이야기가 새어나가기라도 할까 봐 가슴을 졸이며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러다가 잘못되면…… 넌 죽어.”

“저는 죽지 않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원작을 바꾸면 되잖아요.”

엘리시아의 말에 마리엘라는 쓰러질 것 같았다.


“네가 몰라서 그래. 원작은 절대 바꿀 수가 없어. 말했잖니? 이곳의 원작은 바뀌지 않는다고.”

빙의자들은 <눈먼 짐승의 꽃> 원작을 무기삼아 신관을 자처했다.

초대 빙의자였던 다섯 주신과 오데르가 남긴 필사본은 각자 기억하는 원작을 공유하려던 거였다. 그것이 어느새 공공연히 ‘예언서’로 불렸다. 정해진 미래가 적힌 위대한 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거쳐 콘스탄스 제국민들의 신앙이 되었고, 하듄샤에서는 매일 가짜 신관들이 기도회를 열었다.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과 신의 뜻이 알고 싶습니까? 기도하십시오.]

 
이세계의 주역들은 누구도 신의 뜻으로 둔갑한 원작을 거스를 수 없다고.


[그대가 그렇게 태어나 고통받는 것에는 그분께서 내려주신 도구로서의 쓸모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으십시오. 정해진 길 위를 걸으면 신좌 오데르의 곁으로 인도되리니.]

 
그렇게 이곳의 모두가 변하지 않는 내일을 위해 오늘만을 살아간다.


“마리엘라. 당신은 이상해요.”

자신이 빙의자라고 밝힌 후, 딸은 필요할 때가 아니면 자신을 어머니라 부르지 않는다.


“당신은 원작을 바꾸려고 했잖아요. 엘리시아를 죽은 것처럼 꾸며서 외국으로 도피시키려고 했죠.”

엘리시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의 말과 행동은 모순이 있어요. 앞뒤가 맞지 않다고요.”

“그건…….”

“혹시 뭔가 다른 비밀이 있는 건가요?”

엘리시아의 말에 마리엘라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까?

뭐라고 한들 지금 엘리시아가 마리엘라 그녀의 말을 이해해줄까?

……믿어주기는 할까?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한 고민들이 끝나기도 전에 엘리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답을 듣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의 딸이 아니잖아요.”

“에, 엘리시아.”

“영혼 없는 꼭두각시처럼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할 수는 없어요. 나에게는 내 감정이 있는걸요. 당신 딸의 몸을 빌리게 된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엘리시아의 말에 마리엘라는 좌절스러웠다.


“일레온은 대공이에요. 가문도 사람도 흠잡을 데 없고요. 대외적으로 공작가와 사돈이 되는 건 괜찮은 일이잖아요.”

엘리시아는 잠시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 일레온을 사랑해요.”

“뭐?”

“이 마음이 있으면 저도 이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엘리시아는 수줍은 얼굴을 했다.


“아직 일레온한테도 이 말을 안 해봤어요. 그래서 소리 내서 말하려니 어색해서…….”

“에, 엘리시아.”

“굳이 허락하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원래 계획대로 죽었다고 공표하세요. 그러면 저는 여기서 ‘로나’로 살게요. 그게 더 괜찮을 것 같네요. 제겐 어차피 엘리시아의 기억이 없으니까요.”

엘리시아는 오래 생각했던 듯 말에 거침이 없었다.


“엘리시아인 척하는 것보다 새롭게 살고 싶어요.”

잠시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만약에…… 이걸로 원작을 탈주하지 못해서 제가 위험해진다면 감수할 거예요. 그건 제 선택에 대한 대가일 테니.”

“후회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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