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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키스를 잘해주는 여인 (52/151)


52. 키스를 잘해주는 여인
2022.07.02.



 


“후회하게 될 거야.”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앞에서처럼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꼭 닮은 두 쌍이 보랏빛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네. 그렇더라도 제가 한 선택이니까요.”

마리엘라는 한참 동안 눈물을 쏟다가 비틀거리며 돌아갔다.


“하아.”

그 낙심한 모습을 보는 엘리시아는 마음이 아팠다. 마리엘라를 처음 본 순간부터 다른 이들과는 다른 유대감을 느꼈다. 매일 거울로 보는 얼굴과 너무 닮았기 때문일 것 같지만 아무튼 엘리시아에게도 몸 주인의 어머니는 남달리 특별했다.

지금은 빙의자인 제 입장과 생각을 이해해줄 유일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한동안 마리엘라에게 의지하고 따르려는 태도로 살아서 그런지 그녀의 말과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게 엘리시아에게는 어려웠다.

그런 마리엘라가 펑펑 울며 가는 모습이 좋을 리 없었다.

일레온이 힘없이 앉아있는 엘리시아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속이 상하는군.”

속이 상한다는 말에 엘리시아는 일레온을 보았다. 그는 그저 유테르 공작부인이 모종의 이유로 자신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역시 이런 일을 당하고 그가 적당히 넘기기 쉽지 않은 듯했다.


‘어디 가서 평생 이런 취급을 당해봤겠어.’

엘리시아는 미안해서 일레온의 기분을 달래 주려 했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

“마음 상하게 해서요.”

“나? 내가 마음이 상했다고?”

일레온은 시원스레 소리 내어 웃었다.


“그대가 보기엔 어처구니없겠지만, 나는 괜찮아.”

“속이 상한다면서요?”

“나 말고 그대가.”

“아…….”

“대체 몇 주 동안 내가 뭘 한 건지 모르겠어. 진작 납치라도 해왔으면 좋았을걸.”

“그거 범죄거든요, 대공 전하.”

일레온이 선을 긋는 엘리시아를 확 끌어안았다.


“난 너무 좋아. 네가 여기 있다는 게.”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가슴이 시큰했다.


“저도요.”

“키스. 지금 해도 되나?”

“아뇨. 안 돼요.”

“왜지? 침대 근처에서만 되는 건가? 방 밖으로 나온 후로 영 인색한데.”

당장이라도 끌고 침대로 갈 것처럼 허리에 본격적으로 팔을 감는 일레온을 보며 엘리시아가 질색했다.


“저기 집사님이 지켜보고 있다고요.”

“집사가?”

베르나르는 아까부터 아무리 노크해도 일레온이 대답하지 않아 문틈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설명해야 해요.”

“그렇겠군.”

일레온은 뭔가 신이 난 듯 얼굴이 밝아졌다.

***

잠시 후, 일레온의 집무실.

베르나르는 혼이 빠진 얼굴로 일레온의 예비 신부 자랑을 듣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때도 그녀가 매력적인 여성일 거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직접 보니 정말 눈을 뗄 수가 없더군.”

“예에. 전하. 그러셨군요.”

일레온은 조금 흥분했다. 이제까지 아무한테도 변변히 엘리시아를 자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렇게 예쁘니 자네 말이 이해가 가더군. 사용인들 중에 몇몇이 관심을 가졌었다고 했었지.”

“그럼요.”

문득 일레온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자네는? 자네가 엘리시아에게 사심이 있거나 그랬던 건…….”

“아아니,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거짓말.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텐데. 집사 그대도 엘리시아와 분명히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하지 않았나.”

마차 안에서.

베르나르는 주인의 의심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것은…… 황태자 전하의 만행에 대한 후기 토론의 장으로 절대로 제가 사심이 있어 엘리시아 님과 대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집사의 진심을 믿어주지.”

“그보다 세드릭이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레브 전하의 일로 보고를 드리려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어디 계신지 알아보았나?”

“계속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가장 최근의 정보가 트로팔가라를 방문하셔서 트로팔가라 왕실의 의전을 받으셨었다는데 그게 무려 4년 전입니다.”

“4년 전이라.”

“사람을 더 풀려고 합니다.”

“흐음.”

일레온은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까진 없어. 어머니께서는 강한 분이시다. 무슨 일이 없고 이리 조용하다면 별일이 없다고 봐야겠지. 무슨 일이 났다면 그분의 진노를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테니.”

“그건……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게다가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니 말이야. 분명히 오늘 같은 날 이 자리에 어머니께서 계시기라도 했다면.”

엘리시아만 귀한 댁 따님이 아니었다. 일레온 역시 귀한 아들이었다.

황실의 일원, 황녀로 태어나 평생을 도도하고 고집스레 살아온 레브가 외아들 일레온이 한낱 공작가 부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꼴을 보았다면 분명히 큰 사달이 났을 것이다.


“히익.”

집사는 상상만 해도 무섭다는 듯 팔에 돋은 소름을 문질렀다.


“그런 말씀을 막 하고 그러십니까. 정말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렇지. 그러니까 인원을 늘려서 더 빨리 찾을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잠깐 고민이 되더군.”

처음엔 혼사에 어머니가 부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상황을 알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추적을 그만두지는 말고, 지금처럼 정보를 모아.”

“그러면 일단 계속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부탁하네.”

집사 베르나르가 막 일레온의 집무실을 물러나려 할 때였다.


“집사. 그건 그렇고 병원에라도 좀 가보게.”

“예? 저는 딱히 아픈 곳이 없습니다만.”

일레온이 진지하게 말했다.


“엘리시아를 보고 반하지 않았다는 건, 자네 눈에 문제가 있거나 머리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꼭 진료를 보도록 하게. 치료에 드는 돈은 대공가에서 부담할 터이니.”

“하아. 예. 전하. 감읍합니다.”

집사 베르나르는 ‘로나’가 무려 사고로 기억을 잃은 채 방황하던 유테르 공작가의 영애였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신관 엘리시아’나 외동딸을 하듄샤로 출가시킨 유테르 공작가의 풍문을 수도에서 모르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놀랐지만 그뿐. 자신이 일레온의 결혼을 반대할 이유나 그런 건 없지 않나. 일레온은 그가 섬기는 주인이고 자신은 고용인일 뿐이었다.

그런데 멀쩡하던 주인이 저렇게 주접을 떠는 걸 봐야 하다니 집사의 프라이드에 조금 금이 가는 기분이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고작 반년 전, 좌절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던 일레온을 떠올린 집사가 입꼬리를 올린 채 1층으로 향했다.

***

집사가 급하게 준비해준 새 방을 둘러보며 엘리시아가 눈을 빛냈다.


“우와. 여기는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데요.”

“맞습니다. 오래 비어 있었지요. 갑자기 청소를 하느라 고생 좀 했답니다.”

대공가의 안주인, 대공비의 방이 열린 건 십 년도 더 된 일이었다. 일레온의 아버지 데자르 경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어머니가 황적으로 돌아간 후로 쭉 비어 있었다고 했다.

아직 정식으로 진행된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엘리시아 역시 마리엘라와 맞서면서 일레온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선택해. 내 침대를 같이 쓸지 대공비의 침대를 쓸지.」

 
원래 로나가 쓰던 메이드 층으로 가겠다는 엘리시아에게 일레온은 완강했다. 결국 그의 뜻대로 대공비의 방으로 짐을 옮겼다.

밝고 환한 창에는 무거운 천으로 만들어진 두꺼운 커튼이 걸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공작가의 아가씨 엘리시아의 방이 소녀풍이었다면 이곳은 좀 더 성숙한 여인의 방처럼 느껴졌다.

고급스러운 가구 하나하나가 반들반들한 윤기를 흘렸다. 엘리시아는 기분 좋게 매끄러운 나뭇결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앞으로 계속 대공저에 지내면서 쓰게 될 방이라 생각하니 물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내 것’이 생긴 기분이었다.


“어때? 마음에 드나?”

열려 있는 문에 가볍게 노크하고 방으로 들어오는 일레온은 어느새 아까 마리엘라를 만날 때 입고 있던 제복을 벗고 가벼운 셔츠 차림이었다. 비스듬하게 문에 기대었다가 안으로 걸어오는 그가 너무 근사해서 엘리시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너무 예쁘고 좋아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저택을 꾸미는 일은 대공비가 할 일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있다면 전부 다 새로 사거나 꾸며도 상관없어.”

“오. 이게 바로 돈과 권력의 향기인가요.”

엘리시아가 팔을 벌리며 과장된 자세로 한 바퀴 빙글 돌자 일레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눈치 빠른 집사가 잽싸게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렇게 말하니 정말 로나 같군.”

“그, 그래요?”

엘리시아는 딱히 로나일 때와 지금의 자신을 구분해서 행동하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그의 말이 무슨 뜻을 지 생각했다.


‘아, 좀 다르긴 달랐겠네.’

엘리시아일 때는 공작가 영애답게, 주변에서 말하는 대로 행동하려고 애쓴 게 사실이었다.


“당신은 어느 쪽이 취향이에요?”

“어느 쪽이라니?”

“로나와 엘리시아 둘 중에 말이에요. 더 호감이 가는 쪽이 있을 거 아니에요.”

“둘 다 그대잖아.”

“그래도. 개인의 취향이란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음.”

일레온은 잠시 고민하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


“좀 더 내게 키스를 잘해주는 여인이 좋겠어.”

“뭐예요.”

엘리시아는 어이가 없었지만 일레온이 잘생겨서 참을 수 있었다. 너무너무 잘생긴 남자가 하는 시답지 않은 말 한마디에 주먹 대신 입술이 나갈 뻔했기 때문이다.

일레온이 제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봐서 민망해진 엘리시아는 몸을 돌려 창가로 향했다. 창가에서는 관리가 덜 된 후원의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원래라면 손님에게 보여지기 위한 메인 정원이 아니라 대공비가 취향껏 심은 꽃나무들을 사철 내내 내려다보며 지낼 수 있을 터였다.


“꽃이든 무엇이든 원하는 거로 심도록 해.”

“고민 좀 해봐야겠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내 예쁜 걸 보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해놓고 나니 가슴이 벅찬 것도 같았다.

기억을 잃고 낯선 곳에서 막막했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이곳에서 내일을, 다음 계절을, 미래를 그리게 된 걸까.

일레온. 당신이 있어서.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운 남자가 등 뒤로 다가와 몸을 낮춰 엘리시아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커다란 짐승이 몸을 접어 낮추는 것 같은 그의 행동에 엘리시아는 까르르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도망치지 마. 엘리시아.”

“도망 안 가요.”

“그러면 그대가 로나보다 더 사랑받겠지. 그 여자는 한 번 도망간 전적이 있거든.”

“그건…… 그때 나갔다가 밖에서 하듄샤 신관들을 만나는 바람에 그대로 끌려갔거든요.”

“결과는 같아. 그대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거.”

“……미안해요.”

“괜찮아. 찾게 될 줄 알았으니까.”

“이제는 그럴 일 없을 거예요.”

허리를 두 팔로 감고 있던 그가 몸을 바로 세우며 그녀를 제 쪽으로 돌렸다.

엘리시아는 확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아직 밝은 곳에서 그를 이렇게 마주하기엔 그녀의 변변치 않은 연애경험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민망해진 엘리시아는 다시 창 쪽으로 몸을 돌려 애꿎은 커튼을 잡아당겼다.


“이, 이 커튼 말이죠. 왜 이렇게 두꺼울까요? 얇고 가벼운 커튼이 좋지 않나요.”

그녀가 어색해서 하는 짓을 보고 있던 일레온이 픽 웃었다.


“왤까?”

그가 긴 팔을 뻗어 두껍고 무거워서 실용성이 떨어져 보였던 커튼을 잡아당겼다.

차르르륵.

두꺼운 커튼은 빛을 거의 완전히 가렸다.


“이 방은 대공비의 방이야.”

“네, 아까 집사님이 말씀하셔서 듣긴 했는데…….”

“이 커튼은 이 방에 유용한 것이지.”

삽시간에 밤이라도 된 것처럼 방 안이 어둑했다. 커튼 틈으로 가느다란 빛이 비친 일레온의 눈빛은 야수처럼 붉었다.


“이번에도 거절하면 서운할 것 같은데. 키스해도 되나?”

밝은 곳에서는 무리라고, 일레온의 또렷한 얼굴을 보면서는 안될 것 같다고 조금 전까지 생각했던 엘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바, 밝은 데서는 좀 그렇고 바, 밤에는……. 여, 여기도……조, 좋은 거 같…….”

목소리는 몸의 떨림을 동반했다.

밝은 데서는 어색했던 남자가, 어두운 곳에서는 어젯밤의 흥분을 절로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일레온이 허리를 낮춰 그녀에게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면 지금은 괜찮은 거로군.”

“뭐, 그, 그렇죠.”

일레온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눌러 입을 벌렸다.

곧 그 틈으로 그의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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