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못 참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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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못 참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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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못 참을 것 같아서
2022.07.06.
일레온은 단번에 입술 사이를 채웠다.
“으응…….”
조금 전 입술을 누르던 손가락이 뺨으로, 귀로, 목덜미로 흐르며 엘리시아를 만졌다.
엘리시아가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퇴로가 없는 창 앞이었다. 오갈 데 없는 손으로 그 커튼을 쥐자 일레온이 입술을 떼고 웃었다.
“너도 날 만져야지.”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하고 싶었지만, 일레온이 제 오른손을 끌어다 왼쪽 가슴께에 올려놓자 엘리시아는 그대로 얼었다.
“왜? 그대는 기회주의자 아니었나?”
그랬다. 적어도 ‘로나’는 인생은 타이밍, 기회를 놓치면 바보라고 얄팍하게 세상을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잖아.”
뭔가 은근히 바라는 것 같은 일레온이 유혹하듯이 속삭였다.
내가 너를 느끼는 것처럼, 너도 날 가지라고.
“일레온. 당신 심장이 엄청 세게 뛰어요.”
그가 제 손을 끌어다 놓은 자리에서 손바닥 아래로 일레온의 심장이 펄떡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 이렇게 알 수 있는 건가?
셔츠가 얇긴 하지만.
생경한 경험이었다. 벗은 몸보다도, 몸 안쪽에 있어야 할 것이 이렇게 두근두근하며 제 손을 타고 맥을 전해오는 것이 더 은밀한 곳에 닿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응. 너 때문에.”
그의 손이 드레스를 고정한 등 뒤의 리본을 잡아 풀었다.
스르륵.
엘리시아의 몸을 타고 흘러내린 풍성한 드레스가 발목에 고였다.
“앗!”
일레온은 겹겹이 레이스로 부푼 속옷 차림의 엘리시아를 번쩍 안고 침대로 향했다.
“이, 일레온.”
온기 없는 침대에 갑자기 눕혀진 엘리시아가 그를 올려보았다.
그것도 잠시뿐, 곧 일레온은 다정하게 입술을 포개어왔다.
온몸을 꽉 끌어안긴 채 입술을 빨리는 건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어딘가 마음속에 있는 줄도 몰랐던 빈 곳이 충만하게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일방적으로 일레온에게 제 것을 내어주던 엘리시아의 마음에 호기심이 고개를 든 건 그때였다.
꼬옥.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떨어진 일레온을 끌어안고 먼저 그에게 입을 맞춘 것이다. 갑작스레 엘리시아가 제게 키스하자 일레온은 놀란 것 같았다.
엘리시아는 일레온이 제게 하던 것을 떠올렸다.
윗입술을 부드럽게 핥고, 아랫입술을 제 입술 사이에 물었다.
일레온처럼……은 아직 무리였고 그의 가지런한 치열을 살짝, 아주 살짝 훑었을 때 그가 이상해졌다.
맞닿아 있던 가슴 속에서부터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낮게 울리더니 별안간 엘리시아를 놓고 그가 벌떡 일어나 앉은 것이다.
엘리시아는 멍하니 헐떡이며 오르내리는 그의 등근육을 바라보았다.
‘참 보기 좋…… 이게 아니고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내가 뭘 실수하기라도 한 건가?’
일레온과의 키스는 달았다. 사람이 기분이 좋은 것만으로 제 타액이 달게 느껴질 정도로 이럴 수 있다는 걸 이제 막 알게 된 참인데, 입안에 기분 좋게 머물던 ‘단 것’이 사라지자 엘리시아는 맛있게 먹던 사탕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서러웠다.
“왜, 왜 그래요?”
몸을 일으켜 일레온의 팔에 손을 뻗자 그가 무려 피하기까지 했다.
“잠깐. 잠깐만.”
“어디 아파요?”
엘리시아가 푹신한 침대 위를 무릎 걸음으로 지나 일레온에게 가까이 가려 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픈 거 아니야. 하아. 다가오지 마. 잠깐만.”
그는 괴로운 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쓸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심호흡을 했다. 엘리시아는 겁이 나서 일레온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로나’의 일이 일레온을 보살피는 게 아니었던가. 그를 주시하거나 살피는 일은 익숙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뭔가 힘들어하거나 아픈 것처럼 한 적은 없었기에 불안했다.
“일레온…….”
엘리시아가 울먹일 것처럼 그를 부르자 그제야 일레온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 미안. 정말 미안.”
긴 한숨을 쉬면서 일레온이 다시 엘리시아를 안고 뺨에 볼을 비볐다.
“놀랐지? 미안해.”
“왜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
엘리시아가 일레온의 뺨을 어루만졌다.
“못 참을 것 같아서.”
일레온의 뺨보다 귀가 더 붉었다.
“뭘 못 참아요?”
그보다 왜 참아야 하는가? 지난밤 엘리시아는 그에게 자신을 허락해주었다. 비록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녀가 기절하듯이 잠이 든 게 문제였지만.
“공작부인께 장담했거든. 내 신부에게 불명예가 될 일을 하지 않을 거라고.”
엘리시아가 조금 눈을 크게 떴다가 주먹으로 일레온의 가슴을 콩 때렸다.
“뭐예요. 놀랐잖아요.”
“나도 놀랐어. 수줍음 많은 아가씨가 그렇게 대범하게 나올 줄 몰랐거든.”
“아까는 만져보라면서요.”
그런 걸 바라는 줄 알고, 그가 자신을 원하는 것처럼 제가 일레온에게 그런 걸 해서 그도 자신처럼 이런 행복과 만족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껏 용기를 내었더니.
“음. 나도 처음이니 이럴 줄은 몰라서.”
일레온도 처음이라는 말에 엘리시아는 더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귀엽잖아? 그의 접촉에 놀라고 긴장하고 몰리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레온이 저 때문에 화들짝 하는 것을 보고 나니 더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만 모르시면 되는 거 아닐까요? 나의 불명예는.”
“에, 엘리시아.”
엘리시아는 손끝으로 일레온의 목울대를 쓸었다. 남자답게 아름다운 선을 그리면서 탄탄한 가슴으로 이어지는 선이 그녀의 손끝 하나에 조급한 듯 꿀꺽하며 움직였다.
“하아.”
일레온은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면서도 엘리시아의 도발을 꿋꿋하게 견뎠다.
“지켜주고 싶어서 그래.”
“어젠 맡겨놓은 거 내놓으라는 듯이 굴었잖아요.”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사람 마음은 이중적인 거야.”
그녀가 자신을 밀어낸다고 생각할 때는, 울어도 억지로 빼앗아 가지고 싶었다.
다시는 그를 모른 척하지 못하도록.
엘리시아가 제 곁에 머물겠다고, 저를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허락해주자 돌연 지켜주고 싶어졌다.
그녀를 마음껏 안고 깊어지고 싶은 마음과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 순간의 그녀를 조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일레온의 머릿속에서 첨예하게 대립 중이었다.
“엘리시아.”
“네?”
“내가 그대를 덮칠 것 같으면 도망가. 알았지?”
언제는 도망가지 말라더니. 도망간 전적이 있는 ‘로나’보다 사랑해주겠다더니. 엘리시아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뭐예요. 당신이 조심하면 되잖아요?”
“그대가 생각보다 잘해.”
얼굴을 붉힌 엘리시아가 일레온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는 그녀의 손바닥이 붉어질 때까지 그것을 깨물었다.
***
저녁식사를 마치고 엘리시아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여긴 정말 예쁘다.”
대공비의 방에 딸려 있는 욕실은 꽤 넓었다. 일레온의 방에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넓게 꾸며져 있었다.
뽀얀 우윳빛 타일을 깎아 장식한 커다란 욕조는 하얀 기둥에 둘러싸여 있었다. 대공비의 방이 건물의 끝에 있어서 그런가, 돔 형으로 천장이 둥그렇게 올려져 있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도 답답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대공저를 겉에서 봤을 때 한쪽에만 둥글게 튀어나온 별실이 있어 보였는데 그게 아마 이 욕실이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높은 곳에는 작은 창들이 여러 개 나 있어서 노천 온천 같은 곳에 들어온 느낌이 났다.
“휴우.”
뜨거운 물에 몸을 좀 담그고 났더니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노곤해졌다.
‘며칠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유테르 공작저에서는 곧 콘스탄스 제국을 떠날 준비로 바빴다.
밤새 공작저에서 대공저까지 뛰어온 데다 일레온과 감정 소모를 실컷 하고 나니 정말 진이 빠졌다. 게다가 물에 빠지기까지 하다니. 그나마 그의 품에서 오전 내내 깊게 잠이 들었기 때문에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마리엘라는…… 하아. 어째야 하지.”
엘리시아라고 딱히 무슨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마리엘라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지만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호락호락하게 당할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걸 두고 마리엘라는 ‘몰라서 그런다’고 펄펄 뛰었지만, 엘리시아는 모르는 자가 겁도 없고 용감하다고 믿었다.
어쩌면 마리엘라의 그런 편집적인 관점이 일을 더 꼬아서 복잡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남는 법이라.”
마리엘라는 원작 밖으로 탈주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믿는 듯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오히려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하는 건 하책이 아닌가.
엘리시아에게는 엘리시아의 삶이 있다. 이름도, 지위도, 삶도 송두리째 버리고 외국을 전전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피식 웃어버렸다.
“나 또 이러네.”
‘엘리시아’가 아닌데도 ‘엘리시아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연극 배우들도 이런 걸 할 거야. 아마도.”
마치 캐릭터를 해석하는 것처럼, 엘리시아의 입장을 자꾸 떠올려보게 된다. 마리엘라에게는 ‘난 엘리시아가 아니니까’라고 해놓고도 말이다.
“일레온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라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게 막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었을 때였다.
똑똑.
방문을 열자 편한 차림의 일레온이 서 있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보고 싶어서.”
“후훗.”
엘리시아는 웃어버렸다.
“들어와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남자를 방으로 들이는 건가.”
일레온은 의미심장하게 말했지만 엘리시아는 속으로 큰 강아지 같아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우리 강아지는 어제까지 있는 줄도 몰랐던 그녀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혼자 애쓰는 중이었다.
“내 방으로 가자. 가서 게임이라도 하지.”
“좋아요.”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방으로 향했다.
집사가 가져다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마시면서 일레온과 체스를 몇 판 했다.
“하음.”
그러나 목욕을 한 탓인지 나른해지면서 잠이 왔다.
“저 자러 가야겠어요.”
“여기서 자.”
“뭐라고요?”
“같이 자자.”
엘리시아는 눈을 찌푸렸다.
“이럴 거면 방은 왜 내줬어요?”
“대외적으로 신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어휴, 정말.”
엘리시아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정말 가게?”
“네. 저 피곤해요. 내일 봐요.”
“그럼 책이라도 읽어줘.”
“당신 눈 이제 보이잖아요. 혼자 읽으세요.”
“그대 목소리가 듣기 좋은걸.”
일레온이 시무룩한 듯 눈꼬리를 내렸다.
“……안 되나?”
엘리시아는 가슴이 찡하며 조금 아팠다. 우리 왕 큰 강아지를! 저렇게 서운하게 만들다니!
“돼요. 아 근데 팔레가라 전쟁사는 안 돼요.”
그놈의 전쟁사는 읽기만 하면 어찌나 졸리던지. 그 책을 읽으면 이 방에서 또 잠이 들고 말 거라는데 로나가 받은 반년 치 급료라도 걸 수 있었다.
“그래. 그러면 다른 책 읽어줘.”
일레온은 순순히 두툼한 책을 내밀었다.
“책 조금만 읽어주고 갈 거예요. 오늘은 너무 피곤하단 말이에요.”
“그래.”
일레온이 베개를 편하게 하고 눕자 엘리시아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헬라오스 영지 번영기?’
처음 보는 책이었다.
“누구도 인적 드문 변두리 영지 헬라오스가 제국 중기에 들어 그토록 교류의 중심지가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시아는 책을 천천히 읽었다.
“헬라오스는 제국력 420년 경, 인구 280명의 작은 부락이었다. 제국력 770년 팔레르모가 전쟁을 일으켜 군비를 비축할 때, 접경 도시로 물자 유통망의 거점이 되었으나 팔레가라 전쟁에서 팔레르모가 패한 후, 헬라오스는 그와 쇠락을 함께 하는 듯했다.”
뭐야? 전쟁사 친구인가.
“그러나 제국력 813년, 훗날 위대한 영주로 이름을 날릴 베릴 트리스탄의 등장으로 헬라오스의 미래가 바뀌기 시작했다. 베릴의 형 시릴은 이름난 상단의 주인이었다. 차남인 베릴은…… 시릴과의 후계 싸움에 밀려…… 헬라오스에 오게 되었고.”
앗, 잠들면 안 돼.
“베릴의 동생 데릴은 훗날 형을 위해…… 시릴의 상단에서 스파이 역할을 하여…… 자금을 데릴이…… 아니 시릴이…….”
툭.
엘리시아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일레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책을 치우고 그녀를 편하게 눕혔다.
‘신전에만 있어서 그런가. 이런 걸 모르지? 아, 기억이 없다고 했구나.’
헬라오스 영지 번영기는 팔레가라 전쟁사와 같은 저자가 집필한 도서로 불면증 치료에 쌍벽을 이루는 역사서 중 하나였다.
엘리시아를 끌어안고 자세를 잡자 원래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지냈던 것처럼 편했다.
“잘 자. 엘리시아.”
한편으로 한숨이 나왔다.
“나 영주 노릇을 할 수는 있는 건가.”
엘리시아와 한시도 떨어지기가 싫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