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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엘리시아의 퇴장 (55/151)


55. 엘리시아의 퇴장
2022.07.13.



 


“날 앞에 두고 잘도 딴생각을 한단 말이지.”

엘리시아는 미안한 마음을 감추며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일레온의 뺨을 감쌌다.

불만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제 앞에 잘생긴 낯을 들이대었던 남자가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며 표정이 스르르 풀렸다. 그걸 지척에서 보고 있자니 제 손에 그를 기쁘게 하는 숨겨진 힘이라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아니지, 그게 아니야. 그가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래서 그런 거지.

새삼스레 실감하자 괜히 혼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생각 하겠어요?”

괜히 기분이 좋아진 엘리시아가 묻자 일레온은 설렘을 숨기지 않고 물음으로 답했다.


“맞추면 상이라도 줄 건가?”

“제가 상으로 드릴만 한 게 없네요. 가진 걸 다 드렸잖아요.”

“이상하군. 그러고 보니 말로만 받고 아직 받은 게 없는 기분인데.”

그 잠깐 사이 일레온은 집사가 날라온 바비큐 재료들로 저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엘리시아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편히 앉아 그가 하는 걸 구경했다.

일레온은 앞치마를 허리께에 잡아매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그릴 위에 올렸다.

치이익.

순식간에 한쪽 면을 익힌 그가 솜씨 좋게 고기를 뒤집자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물개박수를 쳤다.


“와아! 멋있어요.”

요리하는 남자 최고!

평소 그의 넓고 탄탄한 어깨로부터 대비 되게 날렵한 허리로 이어지는 선은 제복이나 정장을 입을 때 우월한 격을 드러내곤 했다.

그렇지만 흰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허리에 앞치마를 맨 일레온의 모습은 너무 그림처럼 멋있었다. 아직 그가 굽고 있는 고기는 한 점도 입에 넣어보지 않았지만 벌써 무슨 맛인지 알 것 같았다.

무조건 맛있는 맛이야. 저 남자가 구워준 고기가 맛이 없을 리가 없어.

엘리시아는 슬그머니 일어나 일레온의 등 뒤로 다가갔다. 잠깐 망설이다 조심스레 뒤에서 허리에 팔을 둘러 일레온을 안자 이마에 닿아있는 그의 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왜?”

“앞치마가 부러워서요.”

일레온이 엉뚱한 말에 무슨 소리냐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한테 매달려 있잖아요.”

허리에.

한 단어를 생략했지만 일레온은 바로 알아들은 듯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엘리시아는 뻘쭘한 기분이 들어서 팔을 풀었다.


‘자기는 별거 다 하면서.’

나도 좀 노력해 본 것뿐인데 그렇게 웃을 건 뭐란 말인가. 샐쭉한 기분을 느낄 때였다.

일레온이 고개를 숙여 가볍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엘리시아가 놀란 눈을 하자 일레온이 뻔뻔하게 물었다.


“싫은가?”

“아니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싫은 게 아니면 익숙해져야지.”

그래. 일레온이 하는 말이 맞아. 엘리시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요리에 집중하는 그를 훼방하러 먼저 다가온 건 자신이면서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일레온은 그런 엘리시아가 귀엽다는 듯 이번에는 뺨에 한 번 더 입술을 눌렀다.


“뜨거우니까 물러나 있어.”

이번에도 가만히 고개만 끄덕인 엘리시아는 후진으로 물러나며 일레온을 계속 감상했다.


‘이런 데이트는 해본 적도 없었는데.’

전생에서도 변변히 연애 한 번 못 해봤다. 취업 준비로 대학 생활 내내 수업 마치면 영어시험에 자격증에 도서관에 집만 오갔다. 취업 대란에 다른 문과생들도 다 비슷하겠지 생각하면서도 예쁘게 연애하고 멋지게 여행도 다니며 취업도 척척 하는 친구들을 보면 서럽기도 했다.

난 왜 저게 안 될까?

사람마다 주어진 능력이 다 다르겠지 생각하면서도 씁쓸했고, 그래도 남들 살아가는 흐름에서 도태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물 위의 백조는 우아하지만 물 아래 백조 물갈퀴는 방정맞고 절박하게 물을 저어야 떠 있을 수 있다더니 그 꼴이 꼭 자신이었다.


‘그래서 이런 데 빙의해서 일레온을 만난 걸까?’

원윤지의 삶은 시점적으로는 이 책을 내려다본 절대적 우위에 있었지만, 현실에서 그녀의 삶도 그저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이 세계에, 일레온의 곁에 남고 싶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일레온을 옆에 두고 혼자 이런 생각에 빠지는 거 실례야.’

엘리시아는 아직도 달아오른 듯 뜨끈한 볼에 손등을 대어 식히며 막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막사 안은 꽤 높아서 엘리시아의 키에는 무리 없이 몸을 세운 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득 커다란 램프를 높이 걸어놓은 못에 걸려있는 펜던트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 이거 구경해도 돼요?”

엘리시아의 말에 다 구워진 고기를 그릴 밖으로 막 옮겨놓던 일레온이 손을 털며 다가왔다. 엘리시아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놓고 이리저리 살폈다.

동글고 납작하게 생긴 펜던트는 꽤 컸다. 속이 비어 있는 것처럼 가벼웠는데 안을 보고 싶은데 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이렇게 여는 거야.”

일레온이 가운데쯤의 홈을 중심으로 밀자 뚜껑이 옆으로 밀려나며 드러난 건 나침반이었다.


“나침반이네요.”

“이걸 알고 있나?”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물건이지. 길을 찾게 해주거든.”

“길을 잃어본 적이 있어요?”

“전쟁터에서 모래폭풍을 만난 적이 있었어.”

일레온은 모래폭풍이 아팠다고 말해주었다. 안개처럼 단순히 시야를 어둡게 만드는 게 아니라, 촘촘히 날아올라 때리는 모래 때문에 드러난 살갗이 다 아프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고. 그리고 그 자신만의 낙오가 아니라, 그는 병대의 선두에 서 있었고, 아스라이 태양마저 가려버린 모래폭풍 안에 그의 뒤로 8천의 병사들이 따르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때 이게 우리를 살렸지.”

일레온은 이리저리 상처가 난 나침반의 표면을 문질렀다.


“가려는 방향만 알면 길이 없어도 그쪽으로 걸을 수 있으니까.”

“의미 있는 물건이네요.”

일레온은 나침반을 들여다보느라 흘러내린 엘리시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네가 가지고 있어.”

“왜요?”

“이제 우리는 어디든 항상 함께할 테니까.”

일레온은 풀밭에 무릎을 대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네가 가는 곳이 내가 가야 할 길이야. 그러니까 그대가 가지고 있어.”

“일레온.”

덤덤하게 아무렇지 않게 전해오는 그의 말이 너무 진심이라 엘리시아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는 사람일까?

그의 옆에 머물러도 되는 사람일까?

자신은 그에게 줄 수 있는게 없었다. 유일하게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던 자신마저 그에게 가져도 좋다고 이미 내어주지 않았나.

사람 8천 명의 목숨도 구했다는 귀한 물건을 제게 주는 일레온의 사랑이 벅찼다. 전쟁터의 군인이나 배를 타는 바다 사나이들은 용맹함과 무관하게 미신에 그렇게들 예민하다던데.


‘정말 의미 있고 멋진 물건인데.’

그러면서도 엘리시아는 너무 기뻐서 그가 준 것을 조심스레 이리저리 살폈다. 일레온은 나침반을 그녀의 손에서 가져가더니 목걸이처럼 목에 걸어주었다.


 
가슴께에 늘어진 나침반을 엘리시아가 만지작거리면서 활짝 웃자 일레온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괜히 밖으로 나온 것 같아.”

“왜요? 여기 상쾌하고 좋은데.”

“키스하고 싶은데 커튼이 없네.”

아직 해가 붉은 얼굴을 나무 꼭대기에 걸치고 있어 별로 어둡지 않았다.


“그럼 저녁을 빨리 먹고 그 방으로 가요.”

키스하기 좋은 방, 커튼의 비밀을 가진 대공비의 방으로.


“하하.”

일레온이 기분 좋게 웃더니 잠깐 열이 퍼지게 내놓았던 고기를 다시 그릴 위에 올렸다.


“이런. 고기 썰 때 쓰는 칼이 빠졌군. 베르나르!”

일레온은 큰 소리를 집사를 불렀다. 하지만 칼같이 달려와야 할 집사는 기척도 없었다. 엘리시아와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후원 쪽으로 누구도 얼씬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던 것이 뒤늦게 생각난 일레온이 얼굴을 찌푸렸다.


“칼을 가지러 다녀와야겠어.”

“제가 갈게요.”

“아니. 내가 더 빨라. 모처럼 운치 있는데 그대는 여기서 쉬고 있어.”

일레온은 엘리시아의 뺨에 입술을 누르고 손을 흔들며 저택 쪽으로 향했다.


“후훗. 귀여워.”

그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일레온이 행복한 듯 웃는 얼굴을 보는 게 기뻤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이상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만족스럽다니.

일레온은 엘리시아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다.

엘리시아가 ‘로나’였던 시절 일레온을 보듬고 챙겨주었던 건, 선의와 호감만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월급을 받고 일로 하던 것이고, 좀 열심히 한 정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는 벼르고 있던 사람처럼 자신이 그녀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은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동안 많이 답답했을 거야.”

그의 아프고 힘들었던 날을 알아서 그런지 이런 모습들도 볼 수 있는 지금이 너무 소중했다.


“엘리시아는 스무 살인데 내가 일레온을 너무 귀여워하면 좀 그렇겠지?”

자꾸 스물일곱 살 원윤지의 시점으로 스물다섯 일레온을 보는 게 함정이었다. 어찌 보면 연하남과 연상남의 매력을 둘 다 느끼는 셈이었다. 때론 그가 커다란 강아지 같아서 귀엽고, 어떨 때는 자신을 큰 입으로 물어댈 늑대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엘리시아는 의자 아래로 탁탁 발을 구르며 땅을 차다가 곧 멈추었다.


“같이 갈 걸 그랬나.”

일레온을 기다리는 이 몇 분이 심심하고 무료했다. 자꾸만 제게 같이 자자고 조르다가 책을 읽어달라는 저 남자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그럼 마중이라도 갈까?”

몇 걸음이라도 빨리 일레온을 보고 싶어 막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흡.”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손수건으로 그녀의 코와 입을 막았다.


‘아, 안 돼.’

세상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보기 좋게 익어가는 고기를 둘러싼 장작의 불빛도, 일레온이 그녀를 위해 예쁘게 꾸며놓은 막사의 작은 유리램프들도, 한데 모여 빙글빙글 돌다가 시야가 곧 깜깜해졌다.

잠시 후, 일레온은 날이 잘 드는 나이프를 챙겨 자리로 돌아왔다.


“엘리시아.”

하지만 어여쁘게 그를 반겨줄 줄 알았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딜 갔지? 손이라도 씻으러 간 건가.”

저택 쪽을 흘끗 돌아본 일레온은 고기가 타지 않게 뒤집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점점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엘리시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저택을 향해 달려가는 일레온의 표정은 선뜩한 맹수의 얼굴이었다.

***

해가 저물어가는 그 시각.

고풍스러운 클레벤트 대공저의 저택 지붕 꼭대기를 장식한 날개 달린 사자모양의 조각상 옆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검은 신관복에 흰 가면을 쓴 남자, 소나텍은 엘리시아의 이름을 부르며 저택으로 달려가는 일레온을 형형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표정 없는 가면 아래에서 참기 힘들다는 듯 기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발 늦었구나. 신의 장기말.”

일레온이 저택으로 달려갈 때 기절한 엘리시아를 검은 자루에 담아 들쳐멘 괴한들은 울타리도 담도 없는 산등성이를 잘도 타 넘었다. 이 모든 것을 높은 곳에 선 그는 보았고, 알았다. 하지만 사과의 표면을 기어가는 개미가 사과 전체의 모양을 알 수 없듯이, 일레온은 절대 그를 움직이는 인과율의 법칙을 알 수도, 이해하지도 못하리라.


“엘리시아의 퇴장이 너무 늦어졌지만.”

이런 순간이 오면 소나텍은 자신이 이 세계의 우월하고 위대한 초월자가 된 듯했다. 그리고 그 기분은 현실로 돌아가고자 엔딩을 기다리는 초조함을 잠시 덮어주었다.


“아무리 찾으려야 네가 찾을 수 있을 리 없지.”

그가 엘리시아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되는 건 그녀의 부고장이 될 예정이었다.


“네 운명을 받아들여라. 일레온. 그게 네게 주어진 사명이고 신의 뜻이라면.”

소나텍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원윤지. 그 여자를 꼭 처리하고야 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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