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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정해진 운명 (57/151)


57. 정해진 운명
2022.07.20.



 
마리엘라는 폭도처럼 공작부인의 방문을 열어젖히고 제게 다가오는 일레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엘리시아가 사라졌습니다.”

일레온의 말을 듣자마자 사색이 되었다.


“사라지다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대공저 후원에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잠깐 사이에.”

마리엘라는 기절할 것 같았다. 일레온은 제국 최고의 검사였다. 그의 곁에 머물고 있다면 딸의 신상에 탈은 없을 거라고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엘리시아가 사라졌다니.


“엘리시아가…….”

일레온이 막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툭. 툭툭툭.

유리창을 건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전서구였다.

어쩔 줄 모르고 있던 마리엘라가 황급히 달려가 유리창을 열고 새의 다리에 매인 쪽지를 읽었다.

[엘리시아. 납치. 수정궁.]

사비엘이, 그 몹쓸 황태자가 기어코 내 딸을 잡아가다니.


“……수정궁.”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를 귀신같이 알아들은 일레온이 의문했다.


“수정궁이라니요? 엘리시아가 지금 거기 있다는 겁니까? 사비엘이…… 그녀를 왜…….”

마리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대공께 말씀드릴 일은 아닙니다. 아닌데…….”

마리엘라는 치열하게 갈등했다.

일레온은 엘리시아가 반드시 피해야 할 존재였다.

하지만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고 하지 않던가. 마리엘라는 완전히 막다른 곳에 몰린 심정이었고 여기서 살아나가기 위해 쥐를 물든 지푸라기라도 잡든 뭐라도 해야 했다.


‘괜찮을까?’

남편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던 비밀을 다른 누구도 아닌 일레온에게 말해도 될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녀가 바라는 건 엘리시아가 원작의 죽음을 맞지 않길 바라는 단 하나, 그것뿐인데 그 소망을 이루기가 이렇게 요원할 수가 없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마리엘라는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이제부터 제가 벌일 일이 이후로는 어떤 변수가 될지 두려웠고 금기를 어긴다는 데에서 막연한 공포가 밀려왔다.


“나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에요. 그리고 내가 사는 세계에는 어떤 ‘책’이 있었어요.”

“책이라니.”

“일레온 클레벤트가 주인공인, 당신의 인생이 적힌 책이 있어요.”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명민하고 우월한 피를 물려받았다는 오데르의 대공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하듄샤의 신관들은 빙의자들이에요. 다섯 주신과 오데르처럼. 그들은 이야기의 끝을 보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마리엘라는 담담하게 말하려 애썼다.


“당신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당신이 책에 나온 대로의 삶을 살길 바라요. 그래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일레온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지푸라기를 잡아보니 큰 기대하지 않았더라도 쉬이 놓아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마리엘라는 엘리시아가 놓인 처지가 불안하다고 느꼈고, 당장 딸을 구할 방법에만 골몰했다.


“그 책에 엘리시아는…… 황태자의 아이를 가진 몸으로 죽게 된다고 나와요.”

순간 일레온의 몸에서 차가운 바람이 뿜어져 나와 뺨을 스친 기분이었다. 마리엘라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공작부인 말씀은 엘리시아는 곧 죽게 될 거고, 제 삶은 어떻게 흘러갈지 예언서에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까?”

“맞아요.”

“그럼 저와 엘리시아는…….”

마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는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어요. 엘리시아는 아니에요.”

얼음처럼 싸늘한 표정으로 굳어있던 일레온이 겨우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런 걸 제가 믿을 것 같습니까?”

“믿지 않으면요? 엘리시아는 오늘 밤 죽어요.”

일레온은 잠시 침묵했다.


“딸을 구해주세요. 엘리시아를…… 도와줘요. 제발요.”

마리엘라가 애원하듯 말하다 눈물을 흘리자 그가 입을 열었다.


“엘리시아는 어디 있습니까?”

 

***

어둠은 어둠의 기억을 불러온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엘리시아는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재갈이 물려진 채 온몸을 사방에서 두들겨 맞았다.

쏴아아아. 퉁. 퉁. 퉁. 쾅. 퉁. 퉁. 드르륵. 퉁. 쿵.

들리는 소리는 시끄럽고 일정하지 않았다. 갑갑하고 비좁은 곳에 웅크린 채 머리며 어깨며 여기저기 부딪히는 몸은 으깨어져 망가지기라도 할 것처럼 엉망이 되어갔다.


‘차라리 기절했으면.’

이토록 고통스럽지 않을 텐데.


「으……으……아!」

엘리시아는 악을 쓰며 울었다.

그레로사로 가는 길은 험한 돌산이었다.

그 길을 그녀는 아담한 암말을 타고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정식 신관이 된 지 6년이 지났다.

원작의 결말을 보고 원래 세계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이들 가운데에서 엘리시아는 이물질처럼 끼어 있는 존재였다.

하듄샤의 신관을 가장한 빙의자들은 ‘미래는 정해져 있다’는 말을 진심으로 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픈 그들의 본심이 녹아 있는 포교인 셈이었다.

오랜 수련과 신관 생활로 그녀의 정신은 조금 닳아 있었다.

이것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를 매일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해야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작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느라 지쳐서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레로사는 조용하고, 사색하기 좋은 곳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걸 엘리시아는 도피처럼 여겨 고대하고 있었다.

때론 엄마인 마리엘라조차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산 아래 두고 온 사람들과 걱정거리를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아악!」

대열의 후미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란이냐?」

대열의 선두를 지키던 호위들이 후미가 공격당하는 걸 보고 재빨리 말을 돌려 뒤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것이 몰살을 위한 함정임을 그들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어버린 선두를 향해 앞에서부터 다른 무리가 달려왔다. 그들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휘두르는 칼에 무기도 갑옷도 두르지 않은 신관 무리가 순식간에 도륙당했다.


「에, 엘리시아 님. 제 영혼을…….」

그들은 참된 신의 종이었다.

모두들 숨을 거두는 순간, 차기 대신관 후보로 이름 높은 엘리시아를 보며 그들의 영혼이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길 바라다니.

원래 세계를 열망하며 어쩔 수 없이 가짜 신관 노릇을 하던 이들이 절명의 순간에는 매일 제국민에게 읊기 위해 억지로 외우던 교리를 진짜로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엘리시아는 너무도 충격적인 광경에 굳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의문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왜 날 죽이지 않아?’

차례차례 오래 신전에서 함께 자란 형제, 자매 같은 젊은 신관들이 쓰러지고 그녀가 입고 있는 신관복에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튈 때까지 그 무리의 누구도 그녀에게 칼을 대지 않았다.

이윽고 무리의 모두가 절명하고 나서 그녀에게 다가온 이들은 엘리시아가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그녀의 입에 단단히 재갈을 묶었다.

그리고는 커다란 술통에 그녀를 꽁꽁 묶은 채 집어넣었다.


‘설마…….’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잠시 후 뚜껑을 꽉 막은 그들은 그녀가 든 술통을 절벽에서 밀어버렸다.


「으으으으으!」

입이 틀어막힌 채 엘리시아는 허공에서 떨어지는 부유감에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협곡의 물살은 빠르고 사나웠다.

나무통이 여기저기 부딪히고 긁힐 때마다, 엘리시아는 이대로 술통이 깨져버리길 바랐다.

그래서 차라리 날카로운 바위와 깊은 물이 그녀의 목숨을 거두어 가주길.

형제, 자매의 죽음 앞에 혼자서만 살아남은 자가 자신이 아니기를.


「으어! 으으!」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도.

미쳐버릴 것 같아.

하지만 진짜 끔찍한 건 따로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엘리시아는 커다란 배의 갑판 위였다. 선원들이 그녀가 든 술통을 건져, 그 안에서 엘리시아를 꺼내준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기절했다 정신을 차린 엘리시아는 그들에게 물을 한 대접 얻어 마실 때만 해도 ‘살았다’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녀가 끌려간 곳은 갑판 아래의 감옥이었다.

그곳에 삼 일이나 갇혀 있던 그녀가 다시 바깥 공기를 마시게 되었을 때.


「그러게 그렇게 비싸게 굴지 않았다면 좋았잖아. 너 때문에 젊고 창창한 신관들이 스물세 명이나 목숨을 잃다니. 엘리시아.」

황태자의 비열한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신전 기도회를 맴돌며 그녀에게 집착하던 제국의 쓰레기가 번들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이 미친 새끼가!」

엘리시아가 욕을 하자 그는 더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얌전히 안기는 게 좋을 텐데.」

그때 마리엘라의 말이 떠올랐다.


「별것도 아닌데 찢을까?」

엘리시아의 정해진 운명이 사비엘에 의해 망가지는 삶이라고.


‘싫어.’

그런 운명 따위 내가 거부해.

푹.

사비엘이 옷을 벗기기 위해 손목을 잠시 풀어준 것과, 그녀가 머리 장식에 숨겼던 짧은 칼로 그를 찌른 건 거의 동시였다.


「하아, 하아.」

눈물이 쏟아졌다.

운명이라는 건, 이토록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아무리 도망쳐도, 아무리 도망쳐도, 그림자처럼 발목 아래부터 어둑하게 감아오는 것일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



“욱! 욱욱!”

엘리시아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약에 취해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낯선 장소였다.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더할 나위 없는 사치품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공작가인 자신의 집에서도, 대공인 일레온의 집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그런 귀한 물건들이 즐비했다.


‘여, 여긴…….’

그리고 그 귀하고 화려한 것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철창 너머로 보였다. 엘리시아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철창을 양손으로 쥐고 흔들었다.


“이게 뭐야.”

그녀의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아 덜컹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할 때였다.


“깨어났군.”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어둑한 구석에서 들렸다.

저벅, 저벅.

제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엘리시아는 쥐고 있던 철창을 놓고 반대편으로 몸을 피했다.


“황태자…… 전하.”

사비엘이 손에 들고 온 촛불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래부터 환하게 밝혀진 빛에 그녀를 둘러싼 거대한 황금 새장이 찬란하게 빛이 났다.


“그대에게라면 이름을 허락하지. 사비엘이라고 불러도 좋아.”

간악하고 비열한 얼굴이 조금 전 꿈에서 보았던 끔찍한 장면 속의 그와 겹쳐졌다.


‘설마. 엘리시아 정말로 그런 일을 당했던 건…….’

미처 생각을 되짚기도 전이었다.

철컹.

사비엘이 열쇠로 철창에 달린 문을 열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는 내가 오늘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를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불길한 예감에 엘리시아는 떨면서 겨우 물었다. 그러면서도 방금 사비엘이 안쪽에서 철창 틈으로 손을 내밀어 문을 잠근 열쇠. 그가 경쾌하게 허공으로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는 큼직한 황금 열쇠에 눈이 갔다.


‘여길 빠져나가려면 저 열쇠를 뺏어야 하는데.’

그 심중이 투명하게 읽혔는지 사비엘이 그것을 철창 사이로 멀리 던져버렸다. 반짝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열쇠를 황망히 바라보던 엘리시아가 곧 창백해졌다.

갇혔다.

지금 이 좁은 철창 안에 사비엘과 둘이 갇힌 것이다. 엘리시아는 본능적으로 그를 피했다.


“무, 무슨 짓을 하려고.”

“잘 알 텐데. 무슨 짓을 하게 될지.”

사비엘이 셔츠의 단추를 풀며 다가왔다.


“엘리시아!”

“……저, 저리 가.”

너무 겁을 먹자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엘리시아의 기억, 엘리시아의 트라우마.

꿈에서 본 일은 꿈이 아니었다.

몸 주인이 겪어서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에 깔려 있는 일이었다. 엘리시아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겁에 질린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두 번째.

피하려고 했지만, 또 이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다니.


“싫어…….”

사비엘은 그런 엘리시아를 비웃으며 품 안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어 황금의 감옥을 비추고 있던 촛불 위로 털었다.

화르륵.

기괴한 녹색 빛으로 변한 불꽃으로부터 매캐한 연기가 퍼졌다.


“콜록.”

엘리시아는 다가오는 사비엘을 피해 최대한 멀어지려 애를 쓰다 그만 그 연기를 마시고 말았다.


‘이게 뭐야.’

들이쉬는 순간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서서히 몸에서 힘이 빠졌다. 허우적거리며 사비엘을 피하려던 엘리시아는 곧 철창에 기대어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사비엘이 천천히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이번에는 준비한 것이 아주 많아. 사냥감을 또 놓칠 수는 없을 테니.”

엘리시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시, 싫어.”

그때였다.

스릉. 쿵.

가느다란 빛이 사선으로 지나는 것 같더니 거대한 새장의 철창이 일그러진 것처럼 윗부분이 잘려 옆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퍽!

막 그녀에게 손을 뻗던 사비엘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잘린 철창 너머로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그 대신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그녀 위로 드리워졌다.


“싫으면 더 큰 소리로 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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