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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썩은 줄 (58/151)


58. 썩은 줄
2022.07.23.



“싫으면 더 큰 소리로 말해야지.”

어쩐지 서늘하게 들리는 일레온의 목소리에 엘리시아는 겨우 고개를 틀었다.


“일레온.”

어스름한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어깨와 가슴에 얇고 가벼워 보이는 갑옷을 걸치고, 검집 채로 검을 손에 든 일레온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거인처럼 커 보였다.


“여, 여기를 어떻게…….”

그는 대답 대신 검집을 허리에 고정하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일레온이 손을 내밀었지만, 납치될 때 부딪히기라도 했는지 몸은 움직일 때마다 관절이 잘못되기라도 할 것처럼 아팠다. 게다가 조금 전에 억지로 마신 연기 탓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엘리시아가 일어나지 못하자, 짧게 한숨을 쉰 일레온은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의 품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흑. 일레온.”

그 비현실적인 느낌에 엘리시아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다친 데는?”

“없어요.”

“아픈 데는?”

“……딱히.”

일레온은 그녀를 안고도 기척도 없이 움직였다. 황궁 안의 구석구석을 속속들이 알기라도 한 듯 그는 금방 감시망을 피해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좁은 통로를 지나 황궁 밖으로 나왔다.

황궁의 북쪽 성벽과 하듄샤와 맞닿은 익숙한 숲이 보였다. 일레온은 거침없이 빽빽하고 길도 없는 숲속을 잘도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곧 나무에 매여있는 사람 손을 탄 말이 한 필 보였다.


“하아.”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일을 그르칠까 봐 긴장하며 숨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던 엘리시아는 그제야 공기를 한껏 들이쉴 수 있었다.


‘일레온이 여기를 어떻게 왔지?’

엘리시아는 사비엘에게 납치되었다.

오늘이 원작에서 말하던 사비엘에 의해 죽음을 맞을 시초가 될, 그날임을 알 수 있었다.

원작에 박제되어 있는 엘리시아의 마지막 순간이 시작되려 했다.


‘환상이라도 보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자신을 단단하게 끌어안은 팔에서 오는 익숙한 감각과 샌달우드 향기가 너무나도 생생했다.

일레온이 그녀를 안고도 까맣고 큰 말 위로 몸을 날려 가볍게 올라앉았다.


“힘들면 자.”

이렇게 불안정하게 안긴 채 말 위에 타 본 적은 없었다.


“떨어질 것 같은데.”

“그럴 일 없어.”

일레온이 고삐를 바투 잡자 말이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바람에 머리가 일레온의 단단한 가슴에 말발굽 소리에 박자를 맞춘 듯 툭툭툭 부딪혔다.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 생각이 무색하게 엘리시아는 바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

해링턴 백작가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평소 우아하고 고상하던 해링턴 백작부인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카리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펄펄 뛰었다.


“네가,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마님, 고정하세요.”

카리나의 시중을 드는 메이드는 격노한 해링턴 백작부인을 말리며 난처해서 어쩔 줄 몰랐다.


“죄송합니다.”

그 앞에서 카리나는 고개를 떨군 채 죄인처럼 흐느낄 뿐이었다.


“내가 널 양녀로 데려오며 얼마나 기뻤는데. 얼마나 잘해주려 애썼는데.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해?”

“마님. 마님. 부디 진정하시고.”

순간 사람이 돌변하기라도 한 듯 하녀를 노려본 해링턴 백작부인의 손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짝.

엄청난 소리와 함께 하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네가 대체 하는 일이 뭐지?”

“마님. 죄송합니다.”

“수도 물정을 모르는 아가씨가 엄한 일을 벌이면 지체 없이 내게 이르라 하지 않았어!”

“죄송합니다. 마님.”

격렬한 힐난에 사죄를 반복하던 하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이 아버지가 누구니?”

이 사단의 시작은 카리나를 보살피던 하녀가 그녀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고 백작 부인에게 보고하면서부터였다.

젊고 건강해 보이는 카리나가 달거리를 거르고, 불규칙하게 핏자국을 침대에 남겼기 때문이다. 모시는 아가씨의 힘든 날이 시작이 되었는가 싶어 뜨거운 물주머니를 챙기고 침대 시트를 짙은 색으로 바꾸어두면 아무렇지 않다가, 흰 시트로 돌려놓으면 핏자국을 또 남기니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모시는 주인의 건강을 체크하는 건 메이드에게 아주 중요하고 기본적인 일이었다. 귀족 집안의 혼사에는 건강한 후사를 볼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녀는 백작부인에게 ‘지체 없이’ 보고하였고, 아름다운 카리나에게 쏟아질 구혼장을 기대했던 백작부인은 의사를 대동하고 불시에 그녀의 방을 찾았다. 거기까지는 매우 훈훈한 호의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진찰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처녀가 아이를 가지다니.”

백작부인은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리다 가슴을 쳤다.


“내가 발등을 찍었구나.”

“죄송해요.”

그런 그녀의 앞에서 카리나는 훌쩍거리며 울기만 했다.


“아이 아버지가 누구니? 말을 해야지. 그래야 무슨 방법을 찾을 것 아니니.”

한참 눈물을 쏟던 카리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화, 황태자 전하께서.”

“뭐?”

속에서 천불이 나는 듯 붉어진 얼굴로 손부채질을 하던 백작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렇지. 네가 여기저기 멋대로 돌아다니며 사고를 칠 아이는 아닐 거라고 난 믿었다.”

“흐흑.”

“왜 진작 말하지 않았니? 얼른 백작님께 말씀드려야겠어. 당장 폐하를 뵈어야 하지 않겠니.”

“흐흐흑.”

백작부인이 희망찬 표정으로 구명줄이라도 잡은 듯 구는 걸 보며 카리나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그 줄은 썩은 줄이에요.’

사비엘과 밤을 보낸 후, 그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태도를 바꾸었다.

한동안 사비엘을 만나려 애썼지만 그가 일부러 그녀를 조롱하듯이 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카리나는 수정궁을 찾아가는 걸 바로 그만두었다.

그녀가 믿는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이 그녀를 행복으로 이끌어줄 거라 굳게 믿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말이다.


「괜찮아요. 카리나 영애. 당신의 운명은 제자리를 찾아갈 거예요.」

「아. 하아.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 말이 필요했어요.」

「제게 고마울 것 없어요. 영애의 운명이 그렇게 인도한 걸 테니까요.」

 
로나, 아니 엘리시아에게 그 말을 듣고는 얼마나 안심했던가.

그녀가 점쟁이 노파의 양손주가 아니었던들 어떠하며, 신관 엘리시아였다 파문당했던들 어떠하리.

엘리시아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미래만은 무엇보다 또렷했다.

그리고 운명의 알 수 없는 강렬한 흐름을 카리나는 분명히 느꼈다.

일레온 클레벤트.

그 남자에게 무언가 있었다.

그것은 카리나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고 살아갈 힘을 주었다.


‘첫사랑은 원래 이루어지지 않는 거랬어.’

어느덧 ‘첫사랑’으로 포장한 사비엘을 잊고 일레온과의 인연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희망과는 달리 일레온을 마주치기는 정말 어려웠다.

일단 몸이 안 좋아서 돌아가겠다는 엘리시아를 배웅하고 무도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일레온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리고 그 후, 몇 번인가 대공저에 일레온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는 편지를 보냈지만 모두 답장을 받지도 못했다.

게다가 얼마 후에는 일레온이 매일 유테르 공작저에 찾아가 엘리시아를 만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땐 몰랐는데…… 오늘 알았어요. 그분이 클레벤트 대공님이시라는 거. 아까 영애랑 춤추었던 분이요.」

 
무도회에서 그 남자가 대공이라는 걸,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운명적이라고 느꼈던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요. 세상에 저랑 그 남자 단둘만 남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어요. 이름도 모르는 남자인데, 겨우 몇 분 전에 마주쳤을 뿐인데 어디선가 운명이 제게 바로 저 사람이라고 속삭이는 그런 느낌을…….」

 
그와 첫 춤을 추는 것이 자신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사비엘과 기 싸움을 하다 기회를 놓친 카리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내내 엘리시아와 춤을 추는 그를 바라보았다. 사비엘의 손을 잡고 첫 춤을 추는 동안 계속 말이다.

게다가 엘리시아도 분명 그녀의 느낌이 맞다고 확인까지 해주지 않았나.

그런데 일레온이 엘리시아에게 열렬하게 구애 중이라는 소문이 도니 ‘운명’의 흐름을 기다리던 카리나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온몸에 열이 뻗쳤다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엘리시아에게 화가 나다가, 일레온을 생각하면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은 그가 서운해서 눈물이 났다. 그러다 사비엘을 생각하면 원망스러웠다. 결국 이렇게 자신이 전전긍긍하며 불안하게 지내게 된 게 전부 황태자인 그가 자신을 홀렸기 때문이 아닌가.


‘사비엘.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카리나의 마음에 사비엘에 대한 깊은 원망이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엘리시아의 도움으로 일레온과 몇 차례 티타임을 갖고 대화도 나누면서 카리나는 점점 마음을 다잡았다.

엘리시아는 일레온에게 마음이 없었다.

게다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공작가에서 일레온의 방문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결혼은 양쪽 가문 모두에게 중대사였다. 한쪽이 아무리 열렬해도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유테르 공작저에 드나들면서 카리나는 점점 안심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일레온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오히려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건 그즈음이었다. 건강하던 몸이 달거리를 거르고 아랫배에 뭔가 뭉치는 것처럼 콕콕 쑤시는 불편한 느낌이 났던 것이다.


‘설마, 설마 안 되는데…….’

불안해하면서도 카리나는 몰래 의사를 부르거나 할 수가 없었다. 백작부인이 그녀에게 여전히 따로 쓸 수 있는 자금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러버렸고, 그녀를 염려한 하녀에 의해 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존귀한 황실의 피를 잇게 되다니. 진작 말하지 그랬니. 나는 그것도 모르고. 호호호.”

백작부인은 시름이 사라진 얼굴이었으나 카리나는 그렇지 않았다.

사비엘에 대한 연정이 남아 있을 때 아이를 가진 줄 알았다면 이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차갑고 잔인한 남자였다. 하루아침에 사랑을 속삭이다가도 단칼에 내칠 수 있는 변덕이 있는 남자였다.

카리나가 비록 시골 영지에서 자라 순진한 면이 있지만, 그런 남자가 나쁜 남자라는 것 정돈 알았다.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의지하기에는 믿을 수 없는 남자라는 것도.


“그만 울렴. 아이에게 안 좋아요.”

그녀를 달래는 백작부인의 나긋한 목소리조차 카리나를 더욱 깊은 수렁으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

엘리시아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자신이 누워 있는 방이 보였다. 낮은 천장과 깔끔하지만 단출한 가구들. 낯선 곳이었다.


‘일레온이 날 데려왔는데.’

대공저도 공작저도 아닌 이곳이 어디일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달칵.

그때 방문이 열리며 일레온이 안으로 들어왔다.


“……일레온.”

목이 쓰라리고 아팠다. 그런 그녀에게 일레온은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든 컵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뜨거운 온기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몸 안쪽부터 서늘하게 뭉쳐 있던 냉기가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동시에 머리가 아프면서 방금 마신 한 모금의 우유조차 도로 토할 것처럼 속이 요동쳤다.


“일레온.”

“응.”

“당신은…… 거길 어떻게 알고 왔어요?”

사비엘을 검집으로 패서 날려버린 그를 보았을 때도, 기절하듯이 잠들기 전에도, 정신이 막 돌아온 지금도 가장 먼저 그 생각이 들었다.


“후우.”

일레온의 표정이 무겁고 복잡해 보였다. 엘리시아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건…… 공작부인과 이야기 해보는 게 좋을 거야.”

“어머니께서요?”

일레온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마리엘라가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에, 엘리시아.”

엘리시아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일레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모녀를 지켜보다 곧 자리를 피해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흐흑.”

마리엘라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손수건은 너무 흠뻑 젖어있어 눈물을 훔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 할 이야기가 있단다.”

“무슨 일인데요?”

그보다 엘리시아가 공작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일레온의 곁에 머물겠다고 했을 때 대립하고 있던 것 같은 마리엘라와 일레온이 함께 있는 것도 위화감이 느껴졌다.


“엘리시아.”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엘라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가…… 내가 원윤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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