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키스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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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키스해볼래?
2022.08.10.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다고.”
레브의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마리엘라와 엘리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일레온은 속으로 한숨을 눌렀다.
“가볍게 여기실 문제가 아닙니다.”
“가볍게 여기지 않았어. 진지하게 듣고 있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레브는 그저 마리엘라와 다시 만난 것이 즐거운지 그녀를 보며 흡족해 할 뿐이었다. 아무리 오데르여서 담이 크다 해도 그렇지, 몇 년이나 갇혀 지낸 사람이 맞나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래 갇혀계셨지 않습니까?”
일레온의 말에 레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명상하고 있었어.”
레브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 배를 어떻게 하면 빨리 수장시킬 수 있을지를 상상하며.”
그래서 그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나. 일레온은 결국 참지 못한 한숨을 쉬었다.
이 자리에 마리엘라와 엘리시아까지 함께 온 건 그들의 의지였다.
하지만 허락한 건 자신이다. 엘리시아를 제 곁에서 떼놓기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브와 넷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려니 이제는 무슨 얘길 하려고 했던 건지조차 흐려졌다.
그저 엘리시아만 보였다.
일레온의 눈을 빼앗는 그녀는 아름답고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왜냐면 메이드였던 로나에게도, 공작가의 엘리시아에게도, 일레온의 연인이었던 그녀에게도 저런 처연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알 길이 없었다. 마비독의 후유증에서 깨어나 예전 기억을 되찾았다는 엘리시아와 변변히 대화 할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지쳐있던 그녀는 잠깐잠깐 일어났고, 나머지 시간에는 대부분 잠들어있었다.
잠든 얼굴을 보면 ‘엘리시아’가 맞는데, 눈을 뜨면 그가 아는 그녀가 아닌 것 같아서 일레온은 미칠 것 같았다.
이야기가 새며 논점이 흐려지자 엘리시아가 레브를 보았다.
“문제는 그 책에 적힌 대로 이루려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호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정해진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강제력이 작용해요.”
마리엘라가 나섰다.
“제 딸의 죽음에 대해 적혀 있지요. 대공가의 영애가 황태자께 집착하다가 버림받고 자살한다고 말이지요.”
“그런 걸 믿나?”
“믿고 싶지 않아도 믿게 됩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마리엘라의 손이 떨렸다.
“어릴 때 남편과 제 이름을 따서 ‘젤라’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하지만 어느 날 신탁이 내렸다며 아이 이름을 엘리시아로 바꾸라고 했지요. 처음에는 그게 예언서 때문인 줄 꿈에도 몰랐어요.”
“흐음.”
큰일처럼 여기지 않는 듯한 레브의 태도에 마리엘라가 실망한 듯 보이자 일레온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엘리시아가 신관이 되어 황태자와 마주칠 일이 요원해지자 납치해서 수정궁에 밀어 넣었지요.”
“그런 짓까지 벌인단 말인가?”
“네. 그는 이곳의 설정을 이용해서 신좌에 오르고 싶어해요. 오데르처럼. 그러니 사람 된 도리 같은 것을 지켜야 한다는 자각이 없답니다.”
마리엘라가 진지하게 말하자 레브가 앉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쨌든 제국 안에 그런 세력이 있다는 건 좀 문제가 될 수 있군. 하지만 난 정치랑은 거리가 멀어서 말이야.”
레브는 마리엘라를 보며 미소지었다.
“해결책은 차차 함께 찾아보도록 하지. 오늘은 일단 함께 술이라도 한잔하는 게 어떤가.”
“네. 황녀 전하.”
마리엘라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레브는 신이 난 듯 시종에게 술과 안주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일레온과 엘리시아는 알지 못할 베를라스 학원 시절의 옛 추억담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만 일어나지.”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슬쩍 일으켰다.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그녀가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우는데도 레브는 마리엘라와 희희낙락하며 개의치 않았다.
응접실 밖으로 막 빠져나왔을 때였다.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엘리시아의 말에 일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
황후궁은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자정이 먼 시각인데도 황후궁 내의 불을 모조리 꺼놓아 사람이 머물지 않는 듯 음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황후의 별실 밖으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세이렌 호를 잃었단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신의 사자시여. 용서하십시오.”
“쯧. 그 배는 유용하게 오래 쓸 수 있었는데.”
소나텍이 혀를 차는 소리에 세라피나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벌벌 떨었다.
“보통 쇳조각 따위로 오데르를 구속할 수가 없어. 그 배를 만들 때 네가 꽤 고생했었지.”
그 말대로였다.
제 아들 사비엘이 갖지 못한 ‘오데르’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강하고 특별할 수가 있는 걸까.
레브를 구속할 주물을 만들기 위해, 세라피나는 전쟁터의 군의관을 매수했다.
상처 입은 일레온을 닦아낸 피뭉치들이 은밀히 황궁으로 전해졌다.
그것을 던져넣은 피의 수갑만이 레브를 묶어둘 수 있을 거란 신의 말씀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레브는 강했다. 그래서 방심이 일상이었다. 수갑 따위로는 자신을 구속하지 못할 거라 믿은 그녀의 무지 덕분에 일레온의 피를 녹여 넣은 무기와 수갑으로 레브를 제압할 수 있었다. 두 번은 통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그러고도 레브가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려워 물 위에 떠 있는 배의 감옥을 만들었다.
세라피나는 어째서 신께서 오데르의 권능을 건드리지 못하는지 의문스러웠지만, 예지하는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에 복종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왔다.
갇혀있는 레브에게서 빼낸 피로 일레온의 눈을 멀게 할 극독을 완성한 것이다.
소나텍으로부터 묘한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약병을 받아들었을 때 얼마나 설렜던가.
이즈음 세라피나는 광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아들의 피로 어미를 잡아 가두고, 어미의 피로 아들의 빛나는 미래를 빼앗는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들의 존재로 인해 세라피나가 매일 밤 눈물을 흘리고 사비엘이 열등감 덩어리가 되어간 지 오래였다.
내가 고통스러웠던 만큼 그들도 아프기를.
신의 뜻을 받들어 제 복수심을 채울 수 있으니 그것으로 세라피나는 만족했다. 자신을 복수의 칼로 선택한 신께 감사하며 충실한 종이 되길 자처했다.
하지만 배가 침몰하고 레브까지 풀려났다.
그 실패가 너무나도 엄청나서 세라피나는 두려웠다.
하늘을 날아 내려오는 신의 대리인은 그 권능만 해도 초인적인 것이었다.
그런 신이 제게는 어떤 벌을 내릴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나텍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신께서 가져오라 하신 것은 어찌되었느냐.”
“시, 신께 이것을…….”
세라피나는 떨리는 손으로 검붉은 피가 든 유리병을 내밀었다.
배가 침몰한 건, 세라피나가 레브의 피를 뽑아서 배를 벗어나 황궁으로 돌아오던 차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그나마 신이 바치라던 오데르의 피를 구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게다가 이걸로 일레온이 다시 눈을 잃게 되겠지.’
그 생각을 하면 제 피와 맞바꾸어서라도 꼭 구했어야 할 물건이었다.
“수고했다.”
유리병을 받아든 소나텍이 경쾌하게 말했다.
“배의 일은 괘념치 말아라. 신께서도 크게 탓하지 않으실 테니.”
“예. 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곧 올 때처럼 기척도 없이 그가 사라졌다. 세라피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드레스의 스커트를 탁탁 털었다.
조금 전 비굴하게 엎드리던 것과 달리 도도하고 차가운 표정이었다.
세라피나는 황후궁의 한쪽 벽에 다가가 액자를 건드렸다. 그러자 숨겨진 비밀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방금 소나텍에게 건넨 것과 똑같은 유리병이 두 개 더 놓여 있었다.
“다시는 얻지 못할지도 모를 오데르의 피라면.”
신은 그것을 가져오라 하였지 전부 바치라고 하지는 않았다.
“신께서 이것을 알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전능한 신이 제가 다른 꿍꿍이를 품은 줄 정녕 모른단 말인가.
레브의 피를 세 병 빼낸 세라피나는 일부러 소나텍에게 한 병만 건넨 것이다.
“오데르의 피…….”
그것을 감촉같이 숨기며 세라피나의 눈이 의뭉스럽게 빛났다.
***
아담한 주택의 뒤편에는 바깥의 시선을 높은 담장으로 차단해둔 아늑한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일레온과 엘리시아는 그곳에 놓여 있던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일레온은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엘리시아가 의자를 들어 그에게서 좀 더 멀어진 곳에 옮기고야 앉았기 때문이다.
그녀와 자신의 사이에 거리감이 사라진 지는 좀 되었다.
서로에게 서슴없이 다가가고, 허락을 구하지 않고 자연스레 서로의 몸에 손을 대었다.
지금도 엘리시아를 보면 끌어안고 싶었다.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체온을 느끼고 향긋한 체향에 코를 묻고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지금 좀 힘들다고.
어째서 항상 그녀는 제 곁에 느긋하게 머물러주지 않는 걸까.
잡으면 날아가고, 쫓으면 또 날아가 버리는 작은 나비 같았다.
그랬던 날이 많았지만, 오늘처럼 아슬아슬한 기분이 느껴졌던 건 처음이었다.
뭔가 터지기 직전인 것처럼 레브를 구출해서 저택에 돌아온 후로 일레온은 내내 불안했다.
“할 이야기가 뭐야?”
먼저 이야기 좀 하자고 저를 불러낸 건 엘리시아였다. 하지만 아쉬운 쪽이 약자가 된다. 그녀의 말이 궁금한 제가 먼저 말을 꺼내고야 만다.
“오늘 로렐 호수에 갔더니.”
엘리시아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전 기억이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일레온의 급한 마음과는 달리 느릿하게 이어지는 말에 다음을 기다리는 그의 속만 타들어갔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한 멍투성이가 된 채로 갑판 위로 끌어내졌던 일도. 당신의 어머니, 레브 전하께서 제게 구하러 와달라고, 검 한 자루만 구해달라고 하셨던 것도.”
엘리시아는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제 손으로 황태자를 찔렀던 것도.”
엘리시아의 무감한 눈동자가 불길하게 제 쪽을 향한다.
일레온에 대한 애정이 담기지 않은 눈.
그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정한 눈.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일레온은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렇게 그녀가 자신을 마주 보아주는 순간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것마저도 감지덕지했다.
“하지만 당신 옆에서 지냈다는 반년은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그건 며칠 지나면 천천히 생각이 날 수도 있고.”
엘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습니다.”
“대공저에 가보면 생각이 날 수도 있잖아.”
“저는 기억상실 같은 게 아닙니다. 살기 위해 끝없이 도망쳐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언의 순간을 맞이했고 자포자기해서 의식이 잠시 도피했던 거였어요.”
스무 살. 눈부시게 찬란하고 좋을 나이에 맞지 않게 가라앉은 눈빛이 일레온을 향했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만, 그만해.”
일레온은 부정했다.
그가 손을 뻗어 양어깨를 붙잡자 엘리시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여기 있잖아. 네가 여기 있는데 왜…….”
일레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표정을 보며 엘리시아가 대답했다.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싫다. 나는…… 모른다. 네가 기억 못 해도 상관없어. 내가 기억하면 되잖아.”
엘리시아가 묻는다.
알고 있지 않냐고.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의 인격이 미친 인간들의 서사 놀음 사이에서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는 걸.
하지만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보낼 수 없었다.
그것을 인정해버리면 다시는 그녀가 그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
“함께 기억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에게 돌아오는 건 신관이 덧없이 베푸는 사과의 말이었다.
“사과를 왜 해!”
일레온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네가 왜……. 다신 날 안 볼 것처럼…….”
일레온의 눈가가 붉어졌다.
커다란 보랏빛 눈동자 안에 저에 대한 마음 한 점이 없을까?
그렇게 흘러내리는 애정이 담뿍 담겼던 곳에 이토록 아무런 온기가 남지 않을 수가 있나.
엘리시아의 무감한 시선에 일레온은 또 한 번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다.
“제가 억지로 그 사람이 될 수는 없어요.”
“기억이 돌아올 거야. 분명히 넌 날 기억할 거고.”
일레온은 다급하게 말했다.
“대공저에서 지내다 보면 차차 생각이 나겠지. 아직 그 일이 있고 나서는 대공저에 가본 적이 없으니까.”
“저는 하듄샤로 돌아갈 겁니다.”
“……뭐? 하듄샤로 돌아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머물러야 할 곳으로 향할 뿐입니다.”
“내 곁에 있기로 했잖아. 엘리시아. 노력이라도 해볼 수 있잖아.”
요지부동인 엘리시아를 보던 일레온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키스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