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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64/151)


64.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2022.08.13.



“키스해볼래?”

“……네?”

그 말에는 묵묵히 무표정에 가깝던 엘리시아도 놀란 듯했다.


“예전 일도 잊어버렸다가 다시 기억이 난 것처럼. 뭔가 해보면 떠오를지 모르니까.”

일레온은 변명을 늘어놓는 자신이 치졸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엘리시아가 하듄샤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한 후부터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막연히 그의 곁을 ‘떠난다’는 것과는 달랐다.

하듄샤라는 명확한 목적지가 있는 건, 그저 멀어진다든지 제 곁에 머물지 않겠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서로 나아가려는 방향이 다른 것이다.

겹쳐지지 않는 일상 속에서 앞으로는 다시 마주칠 수 없을 거라는 걸 의미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계속 엘리시아를 향해 뻗으려는 손을 참았다.

품에 가두고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싶다.

그리고 엘리시아의 예쁜 입술.

얼마나 황홀한지 잘 아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돌 것 같았다.


‘사심이나 채우려 하고.’

내가 도는 것보다는 나은 게 아닌가.

덧없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좋습니다.”

선뜻 들려온 대답에 일레온은 놀라서 엘리시아를 쳐다보았다.


“해보세요.”

선선히 눈을 사르르 감는 그녀가 보였다.

쿵.

일레온은 심장에 통증을 느꼈다.

불안해서 느끼는 아픔일까,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앉은 나비가 도망갈까 싶은 조바심일까.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설레어 느끼는 두근거림과는 사뭇 다르다는 거였다.

일레온은 엘리시아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엘리시아에게 가서 닿는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질 때였다.

파직!

일레온과 엘리시아의 사이에 눈부신 섬광이 튀었다.


 
그는 엘리시아를 놓치고 황망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엘리시아의 머리 위로 작은 번개와 같이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머리 위의 그건…….”

당황한 그가 더듬거리며 묻자 엘리시아가 눈을 떴다.


“주신들과 오데르께서 신의 종인 제게 당신이 닿는 걸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데르라니…….”

“신관은 그분께 순명하는 존재입니다.”

“전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

일레온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예전처럼.

두 팔로 엘리시아를 꽉 끌어안고 숨을 나누려 했다.

하지만 그가 더 세게 힘을 줄수록, 알 수 없는 반발력이 그를 더욱 거세게 밀어내었다.


“말도 안 돼.”

그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자신을 시험하도록 무방비하게 서 있던 엘리시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만.”

“형제님께는 신의 뜻으로 안배된 반려가 있습니다. 운명의 흐름을 따르다 보면…….”

“입 다물어.”

일레온은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딴 이야기 집어치워. 신이든 운명이든 전부 부숴버릴 테니까.”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이 하나같이 덧없고 치기 어린 것들뿐이었다.

일레온은 이 상황도, 자신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인형처럼 무생물이 되어버린 것 같은 엘리시아를 두고 일레온은 짓씹듯 중얼거렸다.


“난 널 포기하지 않아. 절대로.”

그런 일레온을 바라보는 보랏빛 눈동자는 그저 잔잔할 뿐이었다.

***

밤이 깊도록 수정궁에는 불이 온통 훤했다.

의문의 습격을 당한 황태자가 불안에 시달리며 예민했기 때문이다.


“술! 술을 더 가져와!”

사비엘은 부들거리며 잔을 쥐었다. 평소에도 과음으로 자주 손이 떨렸지만 오늘은 증상이 더욱 심해 술을 따르면 반은 잔 밖으로 튀어나갈 정도였다.

곧 시종이 새 술과 안주를 가져다 그의 앞에 내려놓고 무슨 불벼락이 떨어질까 두렵다는 듯 도망치듯 사라졌다.


“윽. 으으.”

술병을 향해 손을 뻗던 사비엘이 인상을 썼다.

괴한에게 얻어맞은 그는 팔부터 등 전체에 사선으로 거대한 멍이 들었다.

그 순간에 느꼈던 고통을 떠올리자면 거대한 바다괴물 크라켄의 촉수에 짓눌린 기분이었달까.

어마어마한 괴력에 가격당한 그는 머리를 맞은 게 아닌데도 기절했다.


“제기랄.”

그는 상처받은 자존심과 박살 난 황태자의 위엄 때문에 분이 차 어쩔 줄 몰랐다.

손이 떨려 잔에 술을 채우는 데 실패하자 사비엘은 그것을 바닥으로 던지고 술병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려 했다.

그때 기척도 없이 다가온 인영이 무엄하게 그것을 붙잡았다.


“그만 드시지요.”

“누가 감히…….”

훼방한 이를 노려보던 사비엘의 표정이 녹듯이 환해졌다.


“소나텍! 갑자기 어쩐 일인가?”

검은 후드에 흰 가면을 쓴 남자가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를 뵌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안부 차 인사를 올리러 왔건만 무슨 사달이 있었다더군요.”

“일레온 그 자식의 짓이다.”

‘로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감히 황태자의 여인을 다른 이름으로 숨겨두고 차지하려 한 불충한 놈이.


“엘리시아는 내 여인인데.”

사비엘이 과하게 흥분하자 소나텍은 손을 휘저었다. 사비엘을 한 팔로 끌어안고 위로하는 듯한 자세로 시야를 가리고 허공에 뜬 검은 새의 깃털을 뽑아 그가 마시던 잔에 슬쩍 떨어트리자, 순간 술이 묘한 빛을 띠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여인은 전하의 것이 될 겁니다.”

“확실한가?”

번들거리는 눈빛이 저를 향하자 소나텍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 소나텍의 점괘가 틀린 적이 있습니까? 전하.”

“그래. 그렇지. 그대만큼 뛰어난 점술가를 내 본 적이 없으니.”

사비엘은 곧 기분이 좋아졌다.


“내 친구. 어서 자네도 한잔 들게.”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마주 보며 잔을 들이켜자 곧 사비엘의 눈빛이 멍하니 풀어졌다.


“엘리시아는 네 것이다. 사비엘.”

“엘리시아는…… 내 것이다.”

곧 엘리시아가 죽을 자리는 새로이 다시 마련될 것이다.

<사비엘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

그 말은 사비엘의 머릿속에 오래 심어온 암시의 트리거였다.

사비엘의 아이를 가진 엘리시아가 그의 손에 죽음을 맞을 예정이었지만, 이제는 아이가 없어도 상관없다.

소나텍은 원작을 더 고쳐서라도 확실하게 엘리시아를 없애기로 했다.


“원윤지 네게 고통을 줄 수만 있다면.”

소나텍은 가면 아래로 흡족하게 키득거렸다.

***

일레온과 엘리시아가 자리를 비우자 레브가 마리엘라를 보았다.


“그건 그렇고.”

레브가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내 아들이 엘리시아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던걸. 둘이 연애라도 하는 사이인가?”

마리엘라는 펄쩍 뛰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시아의 기억이 돌아온 이상 딸이 일레온을 예전처럼 대할 일은 없었다. 마리엘라는 뒷일은 생각지 않고 일단 부정했다.


“그렇게까지 정색할 건 없지 않은가. 뭐 사귀는 게 죄도 아니고.”

레브는 상당히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나란히 앉혀놓고 보니 탐탁하게 잘 어울리기도 하고. 어떤가? 둘이 뜻이 맞으면 대공가와 사돈지간이 되어보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엘리시아는 하듄샤로 출가한 몸이 아닙니까.”

“아, 그렇군.”

레브가 짜게 식은 표정을 했다.


“그런데 일레온은 왜 그렇게 엘리시아를 씹어먹을 듯이 노려본 건가. 뭔가 맺힌 게 있어 보인단 말이지.”

“그, 그건.”

“그 애가 뭔가 그렇게 집요하게 쳐다보는 건 처음 보았어. 그대도 알겠지만 무엇하나 부족한 게 없이 자란 아이라 그다지 탐이 없는 편이거든. 모든 걸 가져서 그런지 별로 아쉬워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마리엘라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난처해하자 레브가 손사레를 쳤다.


“다 큰 자식이지만 어미로서 신기해서 하는 말이니 깊게 생각하지 말게.”

“아닙니다. 저도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인지라. 제 속으로 낳아도 자라는 걸 보면 정작 다르구나, 생각했던 것과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엘리시아는 어땠지?”

마리엘라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는…… 한 번도 투정하지 않는 아이였어요.”

 

***

레브가 마리엘라를 놓아준 건,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자정을 훌쩍 지난 시간에야 정해진 침실로 향하던 마리엘라는 엘리시아가 쓰는 방문 틈으로 불빛이 비어져 나오는 걸 발견했다.

똑똑.

가볍게 노크하자 방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엄마. 이제 이야기를 마치셨나요.”

“그래.”

엘리시아는 그녀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옆으로 비켜주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 창틀에 놓인 촛불과 그 앞으로 하듄샤의 기도서가 보였다. 제국민들에게 포교하기 위한 허울 같은 교리와 기도인데도, 엘리시아는 그 안에서 명상을 하곤 했다. 그것을 본 마리엘라는 씁쓸한 감정을 감추며 산뜻하게 물었다.


“기도하는 중이었니?”

“네.”

마리엘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 아이는…… 한 번도 투정하지 않는 아이였어요.」

 
그녀가 낳은, 마리엘라를 꼭 닮은 예쁜 아이는 착하고 심성이 고왔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고, 슬퍼도 울지 않는 아이였다.

마리엘라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때, 우는 어미를 감싸주는 속이 깊고 다정한 딸이었다.

자신은 괜찮다고.

언젠가 모든 것을 벗어나 행복해질 테니까 믿어달라고.

마리엘라가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엘리시아가 그렇게 말해주어서 늘 고마웠다.

끔찍한 죽음의 운명을 앞에 두고 괜찮을 리 없지만, 엘리시아가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어서 위로가 되었다. 한 번 더 힘을 낼 수 있게 어미를 다독여주는 그런 딸이었다.

하지만 정말은 스스로의 비극적인 운명에 취해 엘리시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엄마로서 실격이었다.

이건 널 위해서야.

널 살리기 위해서 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딸의 영혼이 무기력하게 시드는 걸 몰랐다.


「원작을 바꾸면 되잖아요.」

 
그건 엘리시아의 진심이 아니었을까?

도망치기보다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도 미친 그자에게 대항해보길 바랐던 게 아닐까.


「저 일레온을 사랑해요.」

 
충격적인 말을 듣고 당혹스러웠지만.


「이 마음이 있으면 저도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의 엘리시아는 놀라울 정도로 눈이 부셨다.

우습게도 엘리시아의 인생에서 가장 밝고 긍정적이었던 순간이 ‘가짜 원윤지’로 일레온의 옆에 있을 때였다.

마리엘라는 엘리시아의 엄마였다.

화사하게 볼을 붉히며 설레어 하던 딸의 얼굴이 영 눈에 밟혔다.


“너 정말…… 괜찮은 거니?”

“네.”

엘리시아는 뜬금없는 마리엘라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않겠어?”

“모든 것이 처음 계획했던 대로 되는 것뿐이에요. 원작 밖으로 나가는 건 저 하나면 돼요.”

이번에도 엘리시아는 엄마인 자신을 도리어 위로해주려 했다.


“일레온을 사랑했던 기억.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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