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 기억 하는거지? (66/151)


66. 기억 하는거지?
2022.08.20.



 


“무슨 일이지?”

사비엘은 제 앞으로 뛰어온 여인을 보았다.


“황태자 전하.”

어찌나 급히 뛰었는지 부스스한 은빛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채 뺨이 붉어져 있었다. 초록빛 눈동자를 보며 사비엘은 아는 체를 했다.


“이게 누구신가. 수정궁에 불러준다 하니 매몰차게 싫은 티를 내던 이가 아닌가? 그래놓고 아쉬운 게 있었나 보지.”

그녀가 쉬이 대답하지 못하자 그가 빈정거렸다.


“내 품이 그리워서 보자마자 급히 달려온 건가?”

주위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카리나는 사비엘의 뺨을 올려붙이고 싶은 충동과 동시에 아이의 존재를 알리며 매달리고 싶은 정반대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황태자 전하.”

카리나가 몸가짐을 바로 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사비엘의 양쪽과 무릎 위 여인 셋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누구예요? 전하?”

“글쎄…….”

마치 자신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는 사비엘을 보며 카리나의 마음은 더욱 진창으로 처박혔다.


‘뭐가 공정하고 시비를 가리는 황제야.’

당사자인 황태자 상태가 저런데 혼인이라니.

해링턴 백작과 백작부인이 꿈꾸는 꽃밭은 절대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 순간 조금 배가 뭉치듯이 아파왔다.


“아…….”

카리나가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아픈 듯이 얼굴을 찌푸리자 여자들의 눈에 어린 호기심이 염려로 바뀌었다. 카리나가 이마에 솟는 땀을 느끼며 얼른 입을 열었다.


“해링턴 백작가의 카리나입니다. 황태자 전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흐흠. 지금은 바빠서 말이지.”

“시간을 오래 뺏지 않겠습니다. 제발…….”

“그럼 잠시 들어주지.”

하지만 그가 양팔로 끌어안은 여인들은 여전히 그의 곁이었다.


“잠깐만 주변을 물려주시면…….”

“바라는 게 많군.”

“제발요. 황태자 전하.”

그런 카리나의 태도가 같은 여자로서 안타깝게 느껴졌는지 사비엘의 곁에 있던 여인들이 눈빛을 교환하며 몸을 일으켜 물러났다.

카리나는 심장이 세게 두근거리는 소리가 제 귀로 들리는 것만 같았다.

태어나서 지금처럼 긴장하고 두려웠던 순간은 없었다.


“아이를 가졌어요.”

“뭐?”

“사비엘. 제게 이름을 허락하셨잖아요. 당신 아이예요.”

카리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는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유테르 공작저에 구애하러 찾아와 마주친 자신을 모욕하기까지 했다.

그 시작은 모두 사비엘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를 비참하게 버리지 않았다면, 카리나가 눈물 짓고 독한 마음을 먹고 일레온을 동아줄처럼 붙잡아야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배 속에 자리 잡은 새 생명을 위해 굴욕도 외면도 참을 수 있었다.


“내 아이라고?”

그 순간 사비엘의 눈의 초점이 잠시 흐려졌다.


‘뭐, 뭐지?’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본 카리나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사비엘은 해사하게 웃으며 일어나 카리나의 손을 잡았다.


“그렇군. 내 아이를 가졌다니.”

“전하.”

사비엘은 카리나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그런 일을 왜 이제야 이야기하지.”

“저어, 전하께서 만나주지 않으셨…….”

“그만. 그런 일은 덮어줘.”

사비엘이 카리나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었다.


“내일 밤 마차를 보낼 테니, 그걸 타고 궁으로 들어와.”

카리나는 얼떨떨했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니.


“가, 감사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하느라 카리나는 사비엘의 차가운 표정을 보지 못했다.

달빛을 잘라낸 것처럼 희게 빛나는 여인이었다.

아름다운 여자.

<“전하, 제가 전하의 아이를 가졌어요.”>

<엘리시아가 울먹이며 말했다.>

<“사비엘, 당신의 아이예요.”>

<그녀의 말에 사비엘은 놀란 듯 여자의 손을 잡았다.>

<“내 아이라니. 정말인가?”>

<“…….”>

<사비엘은 엘리시아에게 집착했다. 황태자비 후보인 그녀가 수정궁의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그 생활은 새장에 갇힌 새나 다름없었다.>

<억지로 사비엘의 아이를 가진 엘리시아는 죽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니 살아야 했다. 끔찍한 남자의 곁에서 말이다.>

<“이제야 네가 내 사람이 된 것 같아.”>

<사비엘이 황홀한 듯 미소를 짓자, 엘리시아는 그런 그를 보며 부들부들 떨다 울음을 터트렸다.>

<엘리시아가 황궁의 연못에서 숨을 거둔 채 발견된 건 그다음 날이었다. 하지만 사인은 익사가 아니라 교살이었다.>

카리나의 표정과 말이, 그녀가 고백해온 아이의 존재가 사비엘의 깊은 의식에 묻혀 있던 암시를 끌어올렸다.


“윽.”

사비엘은 자꾸만 멍해지는 의식을 다잡으려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어떤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차갑게 식은 엘리시아를 내려다보며 사비엘이 중얼거렸다.>

<“넌 이제 영원히 내 곁에 머물게 된 거야.”>

<내내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않고 내보인 엘리시아에게 그가 내린 벌이었다.>

사비엘의 눈에서 다시 초점이 사라졌다.


‘벌을…… 주어야지.’

감히 나를 사랑하지 않고 기만한 여자에게.

***

대신전의 성소 하듄샤.

이리스가 기도실의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자 로벤과 에쇼가 그녀를 맞았다.


“공작 부인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나?”

로벤이 묻자 이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네. 엘리시아 아가씨가 하듄샤로 돌아올 거라는 내용이 다였어요.”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군.”

로벤이 한숨을 쉬자 평소라면 장난스레 들썩일법한 에쇼도 입을 다물었다.

원작이 시작점을 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레온과 카리나가 맺어지려는 힘은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설정’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엘리시아에 가해지는 강제력 또한 세어지게 된다.

이리스 역시 엘리시아처럼 빙의자가 아니었다.

노예시장에 팔려온 전쟁 노예였던 그녀를 마리엘라가 구해주었다. 공작가에서 얼마 지내는 동안 딸처럼 상냥하게 대해준 공작부인에게 신관으로 출가한 저보다도 더 어린 딸이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이리스는 본래 약초를 다룰 줄 알았다. 자신의 신분증명을 만들어 자유민으로 만들어준 공작부인을 돕고 싶었다. 이 일에 대해 ‘같은 편’이 없는 공작부인은 망설이던 끝에 이리스에게도 <눈먼 짐승의 꽃> 노트를 보여주었다.

그동안 어린 엘리시아를 보호하고 하듄샤에 마리엘라가 드나드는 걸 도우며 잘 버텨왔는데.

그레로사로 엘리시아가 떠날 때 하필 복통으로 하루 뒤에 출발하겠다고 한 게 이렇게까지 일이 복잡해질 줄 몰랐다.


‘엘리시아 아가씨 옆에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신관들은 모두 개죽음을 당했다. 그걸 알면서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엘리시아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이리스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엘리시아를 지키는 것뿐 아니라 소나텍이 문제였다. 그는 작정하고 이 세계를 망칠 작정이었으니.


“신들께서는 별말씀 없으신가요?”

에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전해. 이 세계의 다섯 주신과 오데르께서 소나텍의 존재를 거부하고 계셔.”

“그렇군요.”

신관들 중 일부는 직접적으로 신과 교감할 수가 있었다.

로벤과 에쇼 형제가 홀연히 마리엘라를 찾아온 건 어느 날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말했다. 신이 그녀를 도와주길 바라서 찾아오게 되었다고 말이다.

신탁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은 원작의 이해도와 관련이 있었다.

대체로 <눈먼 짐승의 꽃>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한 사람만 신탁을 받는 고위 신관이 될 수 있었다. 드문드문 보던 이들은 같은 빙의자라도 신탁을 받지 못하는 수련 신관에 머물게 된다.

엘리시아야 말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마리엘라의 노트를 읽고 완독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리스는 마리엘라의 노트를 읽어도 엘리시아처럼 신탁을 받을 수는 없었기에 그녀의 존재가 특별해서라고 여겼다.


“그는 엘리시아를 죽일 생각이에요.”

마비독의 해독약을 만들며 이리스는 치가 떨렸다.

해독약 때문에 후유증이 올 정도로 지독한 성분들이 가득했다. 엘리시아는 의식이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구역감과 어지러운 증상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았다.


“소나텍이 예언서를 자주 봅니다.”

로벤과 에쇼는 소나텍이 하듄샤에 드나드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원작을 또 고치려나요?”

“글쎄요. 최근엔 하루, 이틀에 한 번씩 보러 오는데 뭔가 의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달라진 내용이 있었어요?”

에쇼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은 없어. 누나. 나도 잘 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

이리스는 어둑하고 손바닥만하게 작은 기도실 창을 보았다.


“엘리시아가 빨리 하듄샤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눈앞에 데려다놓으면 이런 불안감도 덜 할 것 같았다.

***

대공저로 돌아오자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황녀 전하.”

“그래. 베르나르. 자네도 편안해 보이는군.”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전하.”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이들 사이에서 환담이 오갔다.

집사의 입장에선 주인님이 얼씬도 하지 말라던 후원 데이트 중 갑작스레 사라졌다 돌아온 엘리시아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걸고 싶었다.

하지만 수 년만에 돌아온 큰 마님 레브와 가주인 일레온을 무시하고 엘리시아에게 인사를 건넬 수 없었던지라 다소 급히 그녀에게 반가운 마음을 쏟아부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엘리시아 님. 다친데는 없으신지요? 뭐 말짱해 보이시는군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 옷차림은 도대체 뭡니까?”

희고 장식이 없는 후드를 뒤집어쓴 엘리시아가 곁에 선 마리엘라를 보며 물었다.


“이분은……?”

대체로 무표정하던 엘리시아의 얼굴에 미세하게 곤란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일레온은 속이 비틀렸다.


“대공가의 살림을 맡아주고 있는 집사 베르나르다.”

일레온이 퉁명한 말투로 말하자 엘리시아는 가슴에 두 손을 포개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집사에게 인사했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축복이 함께하길. 엘리시아라고 합니다.”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집사는 혼란한 눈동자로 일레온을 보았다.


“제가 머물 곳은 어디인가요?”

어디긴 어디야? 대공비의 방이지. 내가 그 방을 급히 치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집사가 입도 벙끗하지 못할 때였다.


“베르나르. 손님께 손님방 하나를 내어드리도록 해.”

그 말을 끝으로 일레온은 몸을 돌려 성큼성큼 자신의 방으로 가버렸다.


“엘리시아 님?”

일레온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엘리시아는 무지의 가면을 쓰고 집사를 마주했다.

방으로 돌아온 일레온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하아.”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소나텍이라고?”

누군가 자신을 허수아비 인형처럼 조종하려 한다.

불쾌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제 인생을 차곡차곡 점지해놓은 책이 있다 할 때부터 누군가 자신을 엿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느껴져 불편했다.


“이래서 금기에 가까운 행동이라 말한 거였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말을 들어도 믿겠냐던 엘리시아가 떠올랐다.


“하듄샤로 떠나겠다니.”

일레온이 가장 화가 나는 건 바로 그 점이었다.

엘리시아가 노력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거.

여인에게, 한 사람의 타인에게 그토록 강렬하게 끌렸던 건 처음이었다.

눈이 멀어 있을 때도 애타게 그녀를 원했고 어두운 제 세상에 머물러주는 이여서 더 특별하게 마음에 품은 게 아닐까 스스로 의문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눈을 뜨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는데 그녀의 부재 하나가 이토록 쓰라리고 아플 수가 있나.

무덤덤하던 남자가 느낀 첫사랑의 감정이었다.

문득 책상 위에 놓여있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팔레가라 전쟁사.

일레온은 책 표지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 거. 나답지 않잖아.”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책을 집어들었다.


“엘리시아가 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녀 몫까지 노력할 수밖에.”

 

 
그러면서도 엘리시아를 만나러 가는 건 기대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녀가 제게 감정 없는 눈빛을 보내는 걸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

손님방의 문을 두드리자 엘리시아가 문을 열어주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그녀는 망설이는 듯하다 일레온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비켜주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일레온은 대화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망설이다 불쑥 그녀에게 책을 내밀었다.


“이 책 기억하나?”

그 순간 엘리시아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기억하고 있어.’

분명 아는 눈빛이었다. 이 책이 무엇인지 떠오를 때의 표정이었다.

일레온은 다급하게 물었다.


“엘리시아. 이걸 아는 거지? 기억하는 거지?”

“……네.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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