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내가 널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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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내가 널 지켜줄게
2022.08.24.
“……네. 알아요.”
엘리시아의 말에 일레온은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안다고?”
이렇게 선선히 그녀가 긍정할 줄 몰랐다. 그래서 일레온은 도리어 멍해졌다.
“기억하고 있었어?”
“물론입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딱딱한 말투와 여전히 굳어 있는 표정.
제게 한 조각 애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
이 책에는 둘의 추억이 가득했다. 엘리시아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로나. 가지 마.
내 옆에 머물러 줘.
네가 없는 밤이 너무 길고 외로워.
내 어둠은 동이 트는 새벽이 올 기약이 없는 거니까.
같이 있어주면 안 되나?
그녀를 붙잡고 싶은 많은 순간 말 대신 내민 책이었다.
“이 책은 제 아버지께서 쓰신 책이에요.”
“뭐라고?”
일레온은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로나를 그의 곁에 머물게 해주는 고마움을 담아 거하게 집필 후원을 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때는 저자 이름을 신경 쓰지 않았었다.
유리언 질테르.
유테르 공작의 이름이 ‘질리언’이라는 걸 구혼장을 쓰며 일레온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정치나 영지 관리에 관심이 없으셨어요. 젊을 때부터 유적이나 역사 연구에 관심이 많으셨고 할아버지께서는 그걸 못마땅해하셨다고 해요.”
그러니까 선대 유테르 공작님 말이에요. 엘리시아가 덧붙였다.
“이 책은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결혼하시기 전에 쓰신 책이에요. 가주가 되시기 전에요. 그때는 펜 네임으로 이 이름을 쓰셨지요.”
“거짓말이지?”
일레온의 말이 들리지 않은 것처럼 엘리시아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하던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G.유테르라는 이름으로 내고 계세요.”
“말도 안 돼.”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레온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잠시 낙담한 듯 조용히 서있던 그가 엘리시아를 보았다.
“엘리시아.”
그의 시선에는 조금 전의 실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그대를 포기할 일은 없어.”
엘리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니까 네가 포기해.”
그 말을 끝으로 가져온 책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은 일레온이 방 밖으로 사라졌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엘리시아는 후들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흐흑.”
겨우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일레온은 방금 그녀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갔다.
그리고 그의 눈을 본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이 그의 진심이라는 걸.
테이블 위에 놓인 두툼한 책을 바라보며 엘리시아는 흐느꼈다.
차라리 정말로 기억을 잃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처럼 정신을 차리고 마음이 이렇게 괴롭지는 않을 거였다.
“잊었을 리가 없잖아요.”
엘리시아가 눈물을 훔치며 책에 손을 뻗을 때였다.
화륵.
일순 검은 불꽃이 튀어오르더니 야금야금 두꺼운 책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아……!”
불꽃에 손끝이 먹힐뻔한 엘리시아는 뒷걸음질 치다 다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바로 문이 열렸다.
“얘. 엘리시아. 배고프지 않니?”
방 안으로 들어오던 마리엘라가 그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지르려다 얼른 문을 닫았다.
“엘리시아. 엘리시아. 괜찮니?”
마리엘라가 흐느껴 우는 딸을 헐레벌떡 치마폭으로 감싸 끌어안았다.
“어, 엄마.”
“괜찮아. 우리 아기. 엄마가 있잖아.”
그들의 시간은 엘리시아가 하듄샤로 떠나던 때에 멈추어있었다.
“엄마가 지켜줄게. 엄마가…….”
“엄마. 무서워요.”
엘리시아는 차츰 제게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저 하듄샤로 가지 않을래요.”
사비엘의 손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엔딩은 바뀌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빨리 배를 알아봐주세요. 불꽃이 훨씬 커졌어요. 한 시라도 빨리 원작 밖으로 나가야겠어요.”
마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장 출발할 수 있는 걸로 알아볼게. 조금만 기다리렴.”
엘리시아는 어머니의 온기에 기대었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예전에도, 지금도.
흐느끼는 모녀의 뒤로 일레온과 엘리시아의 추억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
늦은 밤, 해링턴 백작가에 사비엘이 보낸 마차가 도착했다.
카리나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온 백작 부부가 고개를 갸웃했다.
새카만 마차였다.
장식도 황궁의 문장도 없는 마차를 운전하는 남자들은 조금 거칠고 사나워 보이는 눈빛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신 것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덩치 큰 검은 사복 차림의 마부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사비엘이 보낸 마차가 맞다 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조심히 다녀오거라.”
백작부인의 말에 카리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하녀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야심한 시각의 밤거리로 녹아들 듯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카리나는 잔뜩 긴장한 채, 망토 아래로 숨겨온 단검을 꽉 움켜쥐었다.
‘사비엘을 믿을 수가 없어.’
내내 자신을 피하던 그가 선뜻 그녀에게 마차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백작저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사비엘의 행동이 너무나도 이상했고 예감이 좋지 않았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놓고 안 갈 수도 없고.’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 메이드를 데려와서 다행이었다. 사비엘과의 밀회에는 늘 메이드나 샤프롱 없이 다녔기에 백작부인이 조금 의아해했지만,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마차가 덜컥 길에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일까요?”
“글쎄.”
“제가 보고 올까요, 아가씨?”
“그래 줄래?”
하녀는 조심스레 마차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꺅!”
그 순간 마차 밖에서 무언가가 하녀를 낚아채듯 끄집어내 길로 떨어뜨리듯이 던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문이 도로 닫히고 마차는 다시 빠르게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아가씨!”
하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카리나는 눈앞이 아찔했다. 달리는 마차의 속력이 어찌나 빠른지, 좁은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이 휙휙 지나갔다.
‘뛰어내리다가 잘못되는 거 아니야?’
카리나는 어쩔 줄 몰랐다.
이윽고 대로에서 한적하고 좁은 골목으로 길을 튼 마차가 한 곳에 멈추었다.
“내려라.”
“시, 싫어.”
“잠자코 따라와.”
마차 밖에는 지척에 다른 마차가 한 대 서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날 어디로 끌고 가려고?”
카리나가 마차 안에서 버티자 한 사내가 억지로 그녀를 끌어냈다.
“사, 사람 살려!”
억센 손이 그녀의 입을 막자 카리나는 그를 물었다.
차악!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휘두른 건 그때였다.
***
일레온은 수도의 밤거리를 걸었다.
초여름이 되어가는 계절에도 밤이면 서늘한 바람이 길을 타고 불었다.
‘다시 눈을 잃었다’는 말에 그에게 엘리시아가 달려왔을 길을 되짚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가슴의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일레온에게 하듄샤로 돌아간다던 엘리시아는 마음을 바꾸어 예정대로 외국으로 떠나겠다고 했다.
날 두고.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혼자서라도 노력해보겠다는 결심이 우스워졌다.
엘리시아가 떠나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나마 레브와 마리엘라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엘리시아는 공작저로 돌아가지 않고 대공저에 머물렀다.
하지만 엘리시아에게 말을 걸 기회가 없었다.
왜냐면 레브도 자신의 저택으로 가지 않고 함께 대공저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는 나와 엘리시아 사이를 모르실 테니까.’
거의 온종일 레브가 엘리시아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엘리시아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공저에 와서도 처음 온 곳처럼 낯설어해서 집사 베르나르가 꽤 충격을 얻었다.
그런 여자를 두고, 제가 원하는 사람이라며 레브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닷새 후. 아니, 이제는 겨우 나흘 후.
떠날 날을 잡아두고 엘리시아는 두문불출했다.
대부분 침실로 정해진 방에서 기도를 한다 했다. 나머지 방 밖으로 나와 있는 시간에는 늘 레브가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다.
‘신은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는구나.’
무언가 한 가지는 가져간다.
전승을 거둔 전쟁터에서 승리를 얻고 눈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로나가 없어졌다.
지금은 엘리시아의 마음을 얻고 엘리시아의 존재를 잃었다.
어쩌면 이렇게 공평한 잣대란 말인가.
이 세계의 신은 참 꿈도 희망도 없는 무자비한 자였다.
엘리시아가 머무는 제집이 이토록 숨쉬기조차 힘든 곳이 될 줄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녀가 있는데, 볼 수 없고 말도 걸 수 없고 닿을 수도 없다.
이렇게 있다가 보내야 하는 건가.
자꾸 어딘가에 잡아다 가두고 싶어진다.
그러면 자신을 싫어하게 될 텐데,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에 데려다 숨겨두고 싶다.
그런 가당치 않은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웠다.
일레온은 그런 자신이 끔찍했다. 자기 자신도 이렇게 느껴질 지경인데 엘리시아가 알면 오죽 할까.
집착은 사랑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하면 집착하게 될 수 있었다.
내게 사랑을 속삭여주던 엘리시아의 존재가 어디엔가 남아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분명하던 것이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졌을 리는 없어.
일레온은 매일 잠깐씩 엘리시아를 마주칠 때마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불면의 밤이 계속되었다.
엘리시아를 끌어안고 함께 누웠던 제 방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매일 밤 밤새 서늘한 거리를 걸었다.
동이 틀 무렵 집으로 돌아가 몇 시간을 겨우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쓸데없이 건강하고 우월한 신체가 고작 서너 시간 만에 회복하여 잠이 깨면 나머지 시간에는 내내 엘리시아의 기척을 느끼는데 신경이 쏠려있었다.
그때였다.
쐐애액!
무언가 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일레온은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그것을 날렵하게 막았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분명 이 순간이…….’
파아악.
까만 밤의 장막 위로 피처럼 붉은 연기가 퍼졌다.
‘눈!’
순간적으로 일레온은 눈을 꽉 감았다.
두근, 두근, 두근.
놀란 그는 눈을 감은 채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헉. 헉.”
웬만한 일에 놀라지 않는 그였지만 방금 일은 일레온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이게 무슨…….”
말을 하다 말고 일레온은 입을 다물었다.
처음 당할 때 코와 입을 막고 눈을 지키지 못했다.
지금은 반사적으로 붉은 연기에 눈을 감았는데, 숨을 들이쉬었던 목과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안 돼.”
독이었다.
혈관을 타고 불길한 감각이 그의 몸을 돌기 시작했다.
“이런…….”
곧 머리가 안쪽부터 뜨거워졌다. 마치 달군 쇳덩이를 여기저기 가져다 대는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아아악!”
일레온은 머리를 감싼 채 차가운 밤거리에서 절규했다.
잠시 후.
고통이 가시자 일레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왜 이러고 있었지?”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긴 어디야. 알 수가 없군.”
그보다 이런 시간에 자신이 왜 대공저 밖을 돌아다니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몽유병도 아니고.”
아직도 머리랑 가슴이 얼얼했다.
무언가를, 자신의 일부를 도려내 간 것처럼.
일레온은 이상한 기분에 제 가슴 한복판을 손으로 문질렀다.
몸은 아픈 곳 없이 멀쩡한데, 이상하게 가슴이 시큰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꺄아악!
지척에서 여자의 새된 비명이 들렸다.
그의 발길이 지체 없이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뛰었다.
“사, 사람 살려!”
누가 봐도 납치로 보이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후드를 쓴 여자가 발버둥을 치며 단검을 휘두르다 손목을 맞고 칼을 떨어뜨리는 것이 보였다.
일레온은 망설이지 않고 거한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으악!”
“아아악!”
순식간에 어깨와 무릎의 인대를 끊어내자 그 자리에 서 있는 이는 일레온과 여자 둘뿐이었다.
여자가 그를 향해 달려왔다.
그 서슬에 눌러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졌다.
검은 후드 밖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은 달빛처럼 환한 은발이었다.
아는 여자였다.
카리나 드레페인 해링턴.
초록빛 눈동자가 눈물을 머금고 그에게 호소했다.
“살려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일레온은 저도 모르게 팔을 벌려 그 여자를 끌어안았다.
“흑. 흐흐흑.”
맞닿은 가슴을 타고 품 안에서 우는 여자의 떨림이 전해졌다.
‘너였나. 내가 찾고 싶었던 무언가가.’
조금 전, 이상하게 허전해졌다고 느낀 자리를 이 여자가 채워주는 것만 같았다.
“……울지 마. 리나.”
일레온의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내가 널 지켜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