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떠나지 않는 게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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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떠나지 않는 게 어떤가?
2022.08.31.
‘일레온이 나를 잊었어.’
차라리 원했던 일이지 않은가.
그가 괴롭지 않길 바랐다.
일레온이 행복했으면 했다.
그게 꼭 자신과의 행복이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마음은 품어본 적도 없었다.
카리나와…… 평온한 일상 속에서 오래오래 아름답게 살길 상상했다.
하지만 일레온과 맞닿은 시간은 너무 충실해서 엘리시아의 마음에 무언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라도 찍힌 것 같았다.
자신이 원작 밖으로 나가는 건, 마리엘라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불행의 원인이 ‘나’라는 건 너무나도 괴로웠다.
거기에 일레온까지 말려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와 자신의 이루어질 리 없는 사랑 또한 마리엘라의 고통이 될 것이다.
우울하다는 감정과 고통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전염되고 대물림된다는 특징이 있다.
‘행복하지 않아.’
누군가는 스스로의 인생에 만족하고 기쁘게 하루하루를 힘차게 살아갈 텐데, 엘리시아는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태어나서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러니 기가 막히게도 자신이 ‘원윤지’라고 굳게 믿고 있을 때조차 ‘엘리시아’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엘리시아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자인데, 이렇게 아름답고 집안도 좋고 특별한 신의 축복을 받아 대신관 후보로 불릴 정도의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행했을까 하고 말이다.
지금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남자가 하루하루 제 곁에서 우울과 심적 고통을 나눠 갖는 모습을 보는 건 과연 견딜 수 있을까.
그러니 엘리시아는 처음부터 일레온에게 무언가를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제 몸을 갖길 원한다면 내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은 제 의지로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정말 자신이 우스웠다. 어쩌면 자신이 일레온에게 한 일을 고대로 돌려받는 셈이 아닌가.
엘리시아는 그를 잊은 척했고, 일레온은 그녀를 잊었다.
따질 수도 없고 아파할 자격도 없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너무 아파서 떨리는 손끝을 말아쥐어 겨우 손바닥 안으로 감추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생각도 못 하실 텐데.’
어차피 떠날 사람이고 잊힐 일인데 괜히 자신이 동요하는 모습 같은 걸 드러낼 순 없었다.
“그래. 그대들이 하는 이야기가 조금 허황되고 어떻든 좋다는 식으로 생각한 건 사실이야.”
레브가 입을 열었다.
“사이비 종교와 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지.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초월적인 힘이 모두 사실이라면서 진지하게 대응하는 사람도 객관적으로는 이상해 보일 수 있거든.”
“이해합니다.”
“내가 ‘오데르’의 힘을 가지고 있어 이렇게 크게 나이를 먹지도 않고 남들보다 힘이 넘치는 편이지만. 딱히 실감하면서 사는 일도 없고 말이지. 매일매일 내 몸에 이런 은총을 내려주신 신께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살지는 않거든.”
레브의 눈이 매서워졌다.
“일레온에게 일어난 일을 보니 내 판단이 잘못되었던 모양이야. 이렇게까지 사람을 우습게 아는 이들이라면 더 한 일도 할 수 있겠지.”
레브에게는 일레온이 간단히 기억이 조작당한 모습이 충격이었던 듯했다.
“암시를 푸는 방법이 없나?”
“있습니다.”
마리엘라가 설명했다.
“보통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만 한 가지는 시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지?”
“그자가 가지고 있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전하의 피를 이용하여 저주를 만들 때에도 사용된 도구이지요. 그것이 있으면 해독제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빼앗아 올 순 없을까?”
레브의 말에 마리엘라는 기운 빠진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이곳에서는 절반은 신처럼 전능합니다. 그것을 빼앗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어디에 숨겨두었는지 장소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나머지 한 가지는 무엇인가?”
“대공께서 스스로 암시를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겨낸다고?”
“암시는 자신을 생각 속에 가두고 겉에 가짜의 포장을 씌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 본래의 의식은 강제당하고 있답니다.”
마리엘라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 자아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끝없이 암시와 싸우게 됩니다. 마음속에서요.”
“흐음. 결국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저 머저리 같은 눈빛을 기약도 없이 지켜봐야 한다니 기가 막히는군.”
레브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고, 마리엘라는 그런 그녀 앞에 죄인이라도 된 듯 움츠러들었다.
그때 레브가 엘리시아를 곧게 보았다.
“엘리시아.”
“네.”
“떠나지 않는 게 어떤가?”
“네? 저, 전하.”
갑작스러운 레브의 말에 마리엘라가 펄쩍 뛰었다.
하지만 레브는 그녀의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예언서, 그 이야기의 밖으로 향하는 건 비겁한 선택이 아닌가?”
“전하! 그런 말씀은…….”
“마리엘라.”
레브가 고개를 돌려 엄격하게 마리엘라를 보았다.
“그대가 그간 애를 써왔다는 걸 알겠어. 내 자식이 당해보니 그대가 미치지 않은 게 용하군. 일레온에게 저런 짓을 하는 놈들이 있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난 수도의 벽돌 한 장까지 가루가 되게 다져서라도 그들을 살려두지 않았을 거야. 아, 물론 지금도 그럴 생각이고.”
마리엘라는 레브의 입에서 나오는 다음 말이 두려운 듯 입술을 사려 물었다.
“하지만 같은 어머니로서 그대의 판단에 동의할 수 없군.”
“전하께서는 그들을 잘 모르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들은 잘 몰라.”
레브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자식은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알지. 비겁하고 야비한 적들 앞에서 등을 보이고 도망치게 키우지는 말아야 한다는 걸 말이지.”
“저, 전하.”
“배가 출항하기 전까지 시간이 있으니 생각을 돌려주길 바라. 전적으로 마리엘라 그대와 딸을 돕겠다는 약속은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
레브는 마리엘라와 엘리시아를 돌아보지도 않고 응접실에서 사라졌다.
***
사비엘은 날이 새도록 홀로 술을 마셨다.
“내 아이를…….”
사비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아이를 멋대로 갖다니.”
아이가 생기지 않게 조심하는 건 여인의 몫이 아닌가. 수치도 모르고 공원에게 제게 매달리던 여자를 떠올리자 사비엘은 기분이 더러웠다.
몇 시간 전 그는 수하에게 명령했다.
「산속에 묶어다 던져버려. 산짐승들이 알아서 처리해주겠지.」
해가 뉘엿할 때부터 혼자 시작한 술자리가 여태 끝나지 않았다.
“보고가 왜 없는 거지?”
갑자기 떠오른 카리나에 대한 생각으로 입맛이 떨어진 사비엘은 부관을 불렀다.
“누구 없느냐!”
“예. 황태자 전하.”
급히 달려온 부관이 바닥에 무릎을 꿇자 사비엘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 여인은 벌을 잘 받았느냐?”
사비엘의 말에 부관은 잠시 갈등했다.
어린 시절부터 직접 보필했던 황태자였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점점 광기에 시달리는 사비엘이 부관은 두려웠다.
죄를 숨긴들 하늘을 가릴 수 있을까.
황태자가 지은 죄는 언젠가 그의 발목을 잡고 말 것이다.
전에 로렐 호수에서 황태자로부터 탈출한 엘리시아를 구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명받은 숲지기 노부부는 몰래 국경 지역으로 보내졌다.
오래 살던 터전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세상이 끝난 듯 슬퍼하던 부부는, 거액의 금화를 받고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며 기뻐하는 자식의 얼굴에 희망을 안고 떠났다. 물론 수정궁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에 대해서는 함구령을 내렸다.
어딘가에 입이라도 뻥긋했다가는, 그때는 진짜로 황태자의 명령이 그때에라도 이루어질 거라는 반협박을 달아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순간이 어려웠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며 찾아온 여인을 산짐승의 밥으로 던져주라니.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후회하는 얼굴이 아니다.
그 일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듣고자 하는 잔인하고 무정한 표정의 황태자에게 사실을 고할 수가 없다.
‘그 여인을 클레벤트 대공이 구해서 대공저로 데려갔습니다.’
이 말 한마디가 불러올 파장이 무엇일까.
제 뜻대로 여인이 숨을 거두지 않았다고 직접 칼이라도 들고 대공저로 쳐들어가면 어찌해야 하나.
결국 황손으로 태어날 수도 있을 아이가 무고하게 생명을 잃어야 한단 말인가.
보통 황족들은 후사를 얻으면 크게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대체 황태자의 이 분노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부관은 사비엘을 대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예. 명하신 대로 협곡으로 향하는 길목, 라르칸 산맥 초입에 있는 야산에 버려두었습니다. 곰과 늑대가 자주 나오는 곳이지요.”
“도망치지 못하게 단단하게 묶어두었겠지?”
“물론입니다.”
“그래. 잘했다.”
사비엘의 ‘칭찬’에 부관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술이나 더 올리도록 해라.”
“네.”
황태자의 앞을 물러나는 부관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가득했다.
***
기운을 차린 카리나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웠다. 여인을 바라보는 일레온의 눈빛은 퍽 다정했다.
“해링턴 백작가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나?”
“백작가로는…… 돌아갈 수 없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카리나는 그에게 백작가에 제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다시피 애원했다. 그건 일레온 그 자신을 위해 좋은 일이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곳에 머물러도 좋아.”
사심을 담아 그녀에게 넌지시 말하자 카리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요?”
“이 방은 당신을 위해 준비한 거니까.”
“이 방을요?”
카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을 두리번거렸다.
“대공비의 방이지.”
“네?”
카리나는 조금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대, 대공비의 방을 제게 왜…….”
“그대는 나의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리 말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리나가 물었다.
“저어, 유테르 공작가 영애를 마음에 두고 계신 줄 알았어요.”
“유테르 공작가 영애? 그게 누구지?”
“에, 엘리시아 유테르 양 말이에요.”
일레온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자 검은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쏠리며 매끈한 이마가 드러났다. 그 아래로 선명한 붉은 눈동자에 떠오른 건 의아함이었다. 무언가 못마땅한 듯이 입술을 움찔거리는 그는 치명적인 미남이었다. 카리나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정작 일레온은 뭔가가 기억의 바닥에서 떠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전에도 분명 이런 대화를 했던 것 같았다.
「……리…… 영애는 아름답고 현숙한 분이에요.」
「전하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찾고 계신 분이 있다고요. 찾긴 찾았는데 반만 찾았다고. 저는 그분이 ……리…… 영애일 거라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만들어드리면 좋아하실 줄 알고…….」
「……나.」
「내가 찾고 있는 여자의 이름이다.」
이름이 불분명한 기억.
그게 엘리시아 영애였던가?
「내가 매일 영애를 보러 오는 이유를 정말로 몰랐나보군.」
「대공 전하께서는 연애 경험이 없으시잖아요. 도움을 청하려 하신 줄 알았어요.」
「어떻게 하면 내가 그대를 보러 왔다는 걸 믿어줄 건가. 구혼장이라도 써와야 진심이라 생각해줄 텐가?」
「구, 구혼장이라고요?」
카리나가 한때는 리나가 아닌 척했던 적이 있었다.
애가 타면서도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랐던 시기였다.
그때 나눴던 대화를 온전히 떠올린 일레온이 눈부신 미소를 날렸다.
“전에도 그러더니 또 그러는군. 이번에야말로 구혼장을 주어야겠어.”
“저, 저한테요? 그보다 전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일레온은 피식 웃었다. 그의 연인은 기억력이 약한 게 틀림없었다. 그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이렇게나 기억을 하지 못하다니 말이다.
서운해야 마땅할텐데 도리어 깜찍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일레온은 자신이 이 여자에게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레온이 슬그머니 카리나의 손을 잡았다.
정중하게, 하지만 사심을 담아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대었다.
“이것보다 더한 것을 하고 싶지만, 그대가 허락해줄 때까지는 참도록 해보지.”
달그락.
도기가 부딪히는 소리에 일레온과 카리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티 포트가 올려진 트레이를 든채 서 있던 엘리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일레온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노크도 없이 무례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