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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커튼은 안 돼 (70/151)


70. 커튼은 안 돼
2022.09.03.



 


“노크도 없이 무례하군.”

무표정한 얼굴의 신관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침대 옆 테이블에 가져온 것을 내려놓았다. 카리나와 모처럼 좋은 시간을 보내던 일레온은 흥이 깨졌다.


“집사님을 도우려고 했던 것인데 노크를 해도 말씀이 없으셔서. 허락 없이 문을 열어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소. 신관은 어머니의 손님이지 내 저택의 일꾼이 아니니.”

일레온이 인상을 썼다.


“그건 그렇고 집사가 손님께 도움을 청했다고?”

그의 날 선 말투에도 신관은 그저 감정의 소요 없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네. 집 안에 일손이 부족한데 손님이 늘어 돕고 있었어요.”

“집사가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일레온이 못마땅하듯 혀를 찼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집사에게 주의를 주겠소.”

신관은 들어올 때처럼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물러났다.


“후우.”

한숨을 쉬던 일레온은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카리나와 눈이 마주쳤다.


“차를 한 잔 들겠나?”

“아뇨. 아니요. 괜찮아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여인이 딴청 하자 일레온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럼 아까 하던 걸 이어서 해도 좋아?”

그의 말에 카리나는 붉어진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수줍음이 많은 것까지 정말 귀엽다고 생각했다.

카리나가 당황한 듯 그에게서 자신의 손을 거두어갔다.


“전하께서는 정말 짓궂으세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카리나가 창가로 다가갔다.


“이 커튼은 엄청 두껍네요. 여름에는 보통 얇은 커튼을 쓰지 않나요?”

카리나가 커튼을 치고 싶은 듯 두꺼운 천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이, 이 커튼 말이죠. 왜 이렇게 두꺼울까요? 얇고 가벼운 커튼이 좋지 않나요.」

「왤까?」

 
전에도 함께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수줍음을 많이 타는 그녀가 훤한 곳에서는 그를 피하고 또 피하는 바람에 놀리고 싶었던 감정이 조금 전 일처럼 또렷했다.


「이 방은 대공비의 방이야.」

「네, 아까 집사님이 말씀하셔서 듣긴 했는데…….」

「이 커튼은 이 방에 유용한 것이지.」

 
카리나는 어째서 했던 이야기들을 왜 이렇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지?

그걸 추억으로 좋았던 기억으로 남긴 건 저 혼자뿐인가?


「이번에도 거절하면 서운할 것 같은데. 키스해도 되나?」

「바, 밝은 데서는 좀 그렇고 바, 밤에는……. 여, 여기도……조, 좋은 거 같…….」

 
그 순간 머리를 뜨겁게 달군 뭔가로 짓이기는 듯한 통증이 그를 덮쳤다.


“……윽.”

그런 그를 보고 놀란 카리나가 몸을 돌렸다.


“대공 전하. 괜찮으세요?”

“그, 그래. 그보다…….”

일레온은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커튼…… 커튼은 안 돼. 건드리지 마.”

갑자기 온도가 뚝 떨어진 듯 차가운 일레온의 말에 그녀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카리나는 머쓱한 얼굴로 손을 드레스에 문질렀다.


‘방금 그건 뭐였지?’

일레온은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당황했다.

카리나가 커튼에 손을 대는 순간 그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콱 틀어막힌 듯 울렁거렸다. 마치 굉장히 아끼던 것을 뺏길 때나 느낄법한 감정이었다.


“괜찮으신 거죠?”

“괜찮아. 그대를 놀라게 했군.”

카리나가 그의 안색을 살피자 일레온은 어색해진 분위기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들은…….”

어머니가 데려온 그 신관이 낯선 사내들과 후원을 걷는 모습이 보였다.

일레온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

일레온이 잠시 볼일이 있다며 황급히 사라졌다.


“휴우.”

겨우 혼자 남게 된 카리나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영문을 모르겠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엘리시아에게 일레온과 잘되도록 도와달라고 할 때만 해도 그는 저렇지 않았다. 카리나가 아무리 말을 붙여보려 애를 써도 선을 긋고 냉정하게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마치 극진히 애정하는 연인을 보듯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일레온에게 이렇게 가까이 붙어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좀체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에는 온기와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카리나의 조심스러운 식사 요청조차 단칼에 물리치던 남자가 말이다.

처음 겪어보는 애정 공세가 카리나는 버거울 정도였다.

물론 싫을 리는 없었다.

사비엘과 밤을 보내기 전 그도 카리나에게 적극적이었지만, 지금 일레온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 그 정도로 일레온은 제게 온전히 반한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저럴 수도 있나?”

그와 처음 마주쳤을 때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일레온과 자신이 운명적으로 만날 필연적인 관계로 이어져 있는 기분.

그러나 그걸 느낀 건 저 혼자뿐이어서 실망하기도 했다.


“일레온은 그게 지금 온 거 아닐까?”

광장의 노파도, 엘리시아도 분명 제게 운명의 상대에 대해 말했으니까.

어쨌든 이 상황이 카리나 자신에게 좋지 않은 건 전혀 없었다.

이틀을 내리 쉬자 카리나는 훨씬 몸 상태가 나아졌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 걱정이 많아 한동안 제대로 먹지도 잘 수도 없었다.

일레온의 호의적인 태도 덕분에 대공저의 호화로운 손님 대접을 마음 놓고 받으니 금방 활기가 돌아왔다.


「해링턴 백작가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나?」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싶기도 해서 조바심이 났었는데 선뜻 먼저 물어봐주니 다행이었다.

게다가 대공인 일레온이 자신을 각별히 친절하게 대했다.

그는 매우 공손한 태도로 그녀를 소중하게 다루었다.

마치 불면 날아가 버릴까 겁나는 솜털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그의 태도 때문에 카리나는 수시로 뺨이 붉어지곤 했다.


“백작가로는…… 돌아갈 수 없어. 너무 위험해.”

그곳은 사비엘에 의해 감시를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카리나는 앞이 막막했다.

도대체 어째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일레온이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 안아주면 그 순간만큼은 고민도 시름도 잊혀졌다.


“이대로 그의 보호 아래에 있고 싶어.”

사비엘도 대공인 그는 어쩌지 못할 텐데.


“휴우.”

침대에 드러누운 카리나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새삼 둘러보았다.

처음 대공저에 온 날은 기절하듯 잠들어서 잘 몰랐는데 너무 화려하고 좋은 방이었다.


“대공비의 방이라니. 그걸 내게 내어준 게 무슨 뜻이야?”

해링턴 백작부인의 방도 이 방의 반이나 될까 싶은 어마어마한 넓이에 꾸며진 것들 하나하나 품위가 있는 물건들이었다.


「그대는 나의 소중한 사람이니까.」

 
태연하게 말하는 일레온을 보고 있노라니 자신의 머리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내 머리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면 저 사람이…….’

제국 유일의 대공이자 이름이 드높았던 기사, 클레벤트 대공이 눈이 멀어 미치광이가 되어 밤마다 짐승처럼 울부짖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눈도 보이고 저렇게 멀쩡한 사람이 풍문에서 하필 ‘미치광이’인 부분만 진실인 건가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그 대상이 카리나 자신이라는 점이 말이다.

그러다가도 역시 운명의 상대를 이제라도 알아본 걸까 하며 최대한 희망적인 쪽으로 생각이 흘렀다.


“아. 배가…….”

아랫배가 콕콕 살짝 찌르듯이 아파와서 카리나는 잠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


“이 아이가 일레온의 아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황태자라는 이름값이 아까운 역겹고 개차반인 사비엘의 자식이 아니라.

아직 티끝만할 배 속 아이를 달래듯 아랫배를 문지르던 손이 멎었다.


“……안 될 것 없잖아?”

카리나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엘리시아는 로벤, 에쇼와 함께 후원을 걸었다.


“모처럼 와주셨는데 응접실로 모시지 못해서 죄송해요.”

응접실은 마리엘라와 레브가 차지했다.

조금 전, 갑자기 늘어난 손님으로 손이 부족하다며 집사가 곤란해하길래 대공비의 방에 대신 차를 가져다주려다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다.


「이것보다 더한 것을 하고 싶지만, 그대가 허락해줄 때까지는 참도록 해보지.」

 
카리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는 일레온을 말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당혹해서 얼굴이 붉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오랜 세월 신관으로 가면을 쓰고 살아온 탓에 평정을 가장할 수 있었다.

베르나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가 정성껏 준비해준 차 세트는 일레온의 분노를 사 차갑게 식어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너무 놀라서 방 안에 아무 곳에 대충 내려놓고 그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다.


“하아.”

엘리시아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자 로벤이 물었다.


“괜찮습니까?”

“네. 뭐 그렇죠.”

“누나 떠나지 마.”

에쇼가 말했다.


“지금 누나 때문에 주신들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알아?”

로벤과 에쇼의 머리 위에는 전기 스파크와 비슷한 빛이 파직거리며 때때로 번쩍거렸다.


“몰라.”

“왜 몰라?”

“뻔한 얘기할 테니까 듣기 싫어서 신탁을 닫아버렸거든.”

신탁은 선택받은 신관들이 주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창구였다.

엘리시아의 말에 에쇼가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누나만 되는 거 알지?”

엘리시아는 이 세계의 특이점이 낳은 존재였다.

빙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진짜로 신관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세계관에 대한 이해도가 빙의자인 다른 사람들보다도 현저히 높았기 때문이다.

모두 마리엘라의 노트 덕분이었다.

엘리시아에게 주어진 끔찍한 운명을 피하고자 그녀를 하듄샤에 넣었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진짜로 신의 선택을 받고 말았다.

엘리시아가 빙의자가 아니라는 걸, 사망 엔딩을 피하기 위해 하듄샤에 들어온 가짜 신관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신탁을 받을 수 있는 신관은 빙의자 중에서도 극소수였으니까.


“주신들은 마리엘라의 선택에 너무나도 실망하고 있어. 이대로 소나텍이 신좌에 오르는 꼴은 절대 못 본다고 난리고.”

“알아. 하지만 주신들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

“어째서입니까?”

제 동생과 엘리시아가 나누는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로벤이 물었다.


“결국 주신들이 어머니께서 소나텍에게 뺏긴 물건을 되찾는 걸 스무 해 동안이나 돕지 못했으니까요.”

주신은 빙의자였지만 이 세계를 초월했다.

초월한 이들에게 감정이나 고통, 번민과 고뇌 따위는 인간을 벗어나기 위해 무념무상 무감해져야 하는 개념에 불과했다.

그들의 동정을 산들 원작을 바꿀 수도 없었다.

이제와서 그들이 ‘소나텍’이 신좌에 오르는 게 싫다고 난리를 치니 어찌 우습지 아니한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신이 되고도 ‘극혐’의 감정을 되찾다니. 소나텍은 그런 존재였다.

엘리시아는 그 생각을 하니 웃겨서 혼자 픽 웃어버렸다.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건 그때였다.


“참 즐거워 보이는군.”

별안간 들려온 일레온의 목소리에 신관들의 대화가 멈추었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축복이 함께하길.”

로벤이 정중하게 가슴 가운데에 두 손을 엑스자 모양으로 교차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로벤이 뭔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멀뚱히 서 있는 에쇼에게 눈짓하자 그도 마지못해 일레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축복이 함께하길.”

일레온의 눈은 제게 인사하는 이들을 향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엘리시아를 노려보며 입으로는 로벤과 에쇼에게 따지듯 물었다.


“신관께서 어쩐 일로 신전 밖에 나와 있는 거지? 신의 뜻을 모신 거로 보기엔 사사로워 보이는군.”

로벤이 나섰다.


“신의 종이 고행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하듄샤에서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기도를 드리러 나왔습니다.”

“그렇군. 그런 기도도 있다니. 내가 전쟁터로 향할 때 무운을 위해 기도를 해주었다면 하듄샤에 거액이라도 기부했을 텐데 말이지. 다섯 주신과 오데르께서 보시기엔 제국의 방패가 전쟁터로 향하는 게 신의 종 하나가 떠나는 것만 못한 모양이지.”

엘리시아는 물끄러미 일레온을 바라보았다.

카리나와 행복해 보였던 남자의 미소에 난도질당한 가슴이 여태 쓰라렸다.

그러나 그는 제게 시선을 고정한 채, 로벤과 에쇼를 견제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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