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같이 있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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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같이 있고 싶어요
2022.09.07.
‘왜? 어째서?’
일레온이 제게 이런 행동을 할 이유는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리나와 좋은 시간을 잘만 보내고 있지 않았나.
엘리시아는 울컥 밀려오는 서운한 마음을 눌렀다.
일레온 클레벤트라는 남자는 어째서 이렇게 강렬한 존재인가.
눈이 먼 남자와 매일 이 후원을 산책했었다. 반년 동안 날이 궂은날만 빼면 걷고 또 걸었던 곳이 이제는 엘리시아도 눈을 감고 걸을 수 있을 것처럼 훤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도 피해갈 돌부리에 오히려 엘리시아가 걸려 넘어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 일레온이 재빨리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이 넘어지기 전에 받쳐주었다.
「괜찮나.」
「네, 죄송해요. 일레온 님.」
「너는 정말 허술하군. 내가 시중을 들어준 셈이 되었으니 뭘로 갚을 셈이지?」
「아이구, 정말 너무하십니다요.」
있는 놈이 더 하다고 속으로 분개했던 날이 이렇게 선명한데.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옆에 머물 수도 없다.
후원도, 자신도, 일레온도 그대로인데 그와의 관계가 변해버렸다.
안 그래도 후원에 괜히 왔다고, 로벤과 에쇼가 하는 말에 집중이 되지 않아 후회 중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일레온과 좋은 시간을 가지려고 그가 텐트를 쳐주었던 장소를 엿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내내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막상 나타나서 시비를 거는 일레온을 보니 의아했다가, 다시 우울해졌다.
‘몰랐던 거 아니잖아.’
일레온이 눈을 뜨게 되면 옆에 계속 있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면서, 이렇게 미련이 남는 것일까. 눈을 뜬 그라면 자신처럼 부족한 메이드가 끈질김만으로 제공해주는 시중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겠지 하며 월급을 모아 살 궁리까지 따로 해놓았으면서 말이다.
엘리시아는 혼란한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끼어들어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일레온도.
로벤이 미묘한 기류를 느끼고 대답했다.
“하듄샤에서는 매일 전장에 선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언젠가 대공 전하께서 하듄샤에 오셔서 직접 기도회에 참석해주신다면, 부상병과 그의 가족들이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부상병이라고?”
“예. 전쟁터에서 온전히 돌아올 수 없었던 이들이 마음을 다스리러 옵니다.”
“……그렇군.”
그 또한 승전하고도 눈을 잃고 돌아오지 않았던가.
뭔가 로벤의 말이 일레온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그를 차갑게 대하던 기세가 누그러졌다.
“머무는 곳이 저택 한편이라 손님을 모시기에 마뜩잖아 대공 전하께 누를 끼쳤군요. 제 방으로 모셔가 남은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엘리시아가 자신의 방으로 그들을 데려간다는 말에 일레온이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내 응접실을 내어주지.”
“네?”
“집사!”
일레온이 부르자 멀리 떨어져 있던 베르나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하듄샤에서 오신 손님들이다. 어머니께서 응접실에 계시니 이야기를 나눌 곳이 마땅치 않다는군.”
“저희는 괜찮습니다.”
엘리시아가 거절의 뜻을 밝히려 했지만 일레온은 막무가내였다.
“내 응접실에 차를 준비하고 신관들께서 쉬어가실 수 있게 준비해줘.”
“네.”
일레온은 로벤과 에쇼를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가버렸다.
“왜 저래?”
그가 사라지자 에쇼가 가감 없이 중얼거렸다.
“질투한 것 같은데. 암시에 걸린 게 맞아?”
“……좀 이상하긴 하군.”
엘리시아는 멀어져가는 일레온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때 일레온은 머릿속을 후비는 것 같은 격통에 저택 모퉁이를 돌자마자 벽에 기대었다.
“헉. 헉.”
조금 전에 카리나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카리나를 보고 있으면 제 영혼의 반쪽을 찾은 것처럼 충실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 여자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외롭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는데, 이제부터 그녀가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릴 것처럼 한 사람의 존재가 깊게 그에게 각인되었다.
카리나의 관심을 얻어볼까, 그녀의 마음 표현 한 조각이라도 주워볼까 따스하고 간질거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후드를 눌러쓴 신관인지 뭔지 애매한 그 여자가 보였다. 애매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하는 행동은 신관처럼 보였지만, 입고 있는 옷이 하듄샤의 하얀 신관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머리끝을 하얗게 물들이지도 않았고 말이다.
엘리시아의 정체에 대해 집사 베르나르에게 지나가는 말로 묻자 잠시 멈칫한 그가 조심히 대답했다.
「엘리시아……님은 하듄샤에서 파문당하셨습니다.」
파문당한 신관.
유테르 공작가의 외동딸이었다가 어린 나이에 신관이 된 여자.
다음 대신관 후보로까지 불리던 신성한 여인에서 파문의 낙인이 찍힌 버려진 신의 종.
여기까지가 그가 대충 엘리시아에 대하여 알아낸 사실이었다. 이 정도의 정보를 알아내는데도 굉장히 어려웠다.
왜냐면 그가 엘리시아에 대해 물을 때마다 어머니인 레브나 집사 베르나르 둘 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잘 해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단에서 파문을 당했다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걸 입에 올리기 꺼려져서 그런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황녀인 어머니가 고작 파문당한 신관을 곁에 두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그녀가 훤칠한 두 남자 신관과 함께 후원을 걷는 모습을 본 순간 속된 말로 눈이 도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까지 카리나가 손을 허락해주어서 감격했던 것도, 아끼는 여인이 제집에 머물러주어 기쁘다고 느꼈던 것도 모두 날아갔다.
날 듯이 빠르게 그의 발길을 움직인 건, 초조와 분노.
어째서?
의문할 겨를도 없었다.
막 그녀와 남자들에게 다가갈 때, 엘리시아가 미소를 지었다.
온 세상이 환해지는 듯한 그런 미소도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것을 찬양하는 좋은 표현이 많이 있을 텐데.
꺼져서 스러져가는 숯불이 스쳐가는 바람에 붉게 달아올랐다 사그라들며 식어가는 것처럼.
엘리시아의 웃음은 희미하고 가여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택 안에 오며 가며 마주쳐도 돌덩이같이 무표정하던 여자가 남자들에 둘러싸여 제게는 보여주지 않는 표정 하나 내보였기로서니 그렇게 화가 났을까?
「참 즐거워 보이는군.」
돌이켜봐도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치졸한 말이었다.
“카리나가 웃어줄 때는 어땠지?”
제게 의미 있는 여인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왜 그가 이렇게 흥분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아.”
일레온은 얼굴을 찌푸린 채 머리를 감쌌다.
끔찍한 통증이 시작된 건 그때였다.
‘왜?’
방금 전 납득할 수 없는 제 행동에 의문을 품은 순간이었다.
머릿속에 살아 있는 벌레가 들어있기라도 한 것 같다.
제 생각을 야금야금 안쪽부터 뜯어먹으려고 난동을 부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이 느낌이 친숙했다.
‘눈. 눈을 치료하려고 할 때 느꼈던 그 느낌과 비슷해.’
제 안구를 안쪽부터 뭔가가 뜯어먹고, 눈을 낫게 하려고 할 때마다 난동을 부리며 일레온이 발작하듯 고통스럽게 했던 ‘그것’.
말이 안 되는데, 그 느낌과 너무나도 같았다. 지난 2년 반 동안 너무 많이 겪어 몸에 새겨진듯한 통증이 눈이 아닌 머리에서 다시 재현됐다. 이 상황이 일레온은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뭔가 걸려.”
치료하려고 할 때마다 아팠던 눈.
자신이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할 때마다 아픈 머리.
“으윽.”
하지만 무자비한 격통에 일레온의 생각은 곧 하얗게 날아갔다.
***
세라피나 황후는 사비엘과 마주 앉았다.
“몸은 좀 어떤가요?”
“염려해주신 덕분에 한결 괜찮습니다.”
세라피나는 시들했던 병색이 사라지고 혈색이 돌아온 아들을 찬찬히 살폈다. 사비엘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야 안심이 되었는지 느리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요?”
세라피나 황후가 주위를 물리고도 목소리를 작게 낮추었다.
“세이렌 호가 침몰했답니다.”
“뭐라 하셨습니까?”
그 배는 어머니인 세라피나 황후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배였다.
사비엘은 그곳에서 파렴치한 짓을 몇 번인가 저질렀다. 땅 위와 달리 물 위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 엘리시아 유테르를 가지고 싶어서 끌고 갔던 것도 그 배였다.
“갑자기 세이렌 호가 침몰하다니요?”
“황녀 전하께서 탈출하셨답니다.”
“고모님께서 도망이라도 치셨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오데르를 잡아 가두기 위한 덫인데.”
본래 황제 부부가 신의 대리인으로부터 신탁을 전해 듣는 것은 황좌에 오른 이에게만 전해지는 비밀이었다.
세라피나는 제 아들이 그 자리에 앉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아들의 끝없는 열등감을 덜기 위해 그 비밀을 사비엘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 곤란해지시는 게 아닙니까?”
아무리 변장하고 가도 레브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다고 몸서리치던 어미를 떠올리자 사비엘의 낯이 굳었다.
“증거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황태자께서도 알고 계셔야지요.”
세라피나 황후가 분한 듯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배가 침몰하기 전, 신의 대리인께 오데르의 피를 뽑아다 바쳤지요. 일레온의 눈을 다시 빼앗아 주신다기에 그리하였는데. 분명 완성된 저주를 받았건만 그가 눈이 멀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제가 가보겠습니다.”
“황태자께서 직접요?”
사비엘이 비스듬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사자를 잡으려면 사자굴에 가야 한다지 않습니까.”
가서 직접 보아야겠다. 탈출한 레브는 둘째치고 신께서 눈에 이어 일레온으로부터 무엇을 빼앗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
후원에 다녀온 후로 일레온이 이상해졌다.
“카리나.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알려주면 좋겠어.”
“좋아하는 거요?”
“그래.”
일레온이 나이프를 놓고 의자에 기대며 물었다.
“대공저의 요리사 슈발리에는 솜씨가 좋지. 무엇이든 리나. 당신이 원하는 걸 먹여주고 싶어.”
“저는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요. 뭐든 가리는 거 없이 잘 먹는걸요.”
“특별히 좋아하는 게 있을 것 아닌가.”
저녁 식사를 하며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아주 평범했다. 그리고 일레온의 호의가 담뿍 담긴 말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일레온의 말과 표정이 어긋난 것처럼 따로 놀았다. 입으로는 그녀의 편의를 신경 쓰고 관심을 기울이는 말을 쉼 없이 하며 눈빛이 다정과 냉정 사이를 오고 갔다.
‘왜 저러는 거야?’
이야기 사이사이에 저를 노려보듯 눈빛이 바뀔 때마다 카리나는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무엇이든 편하게 말해주면 좋겠군.”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해링턴 가의 양녀라는 걸 아시잖아요? 저는 국경선 가까이의 변두리 영지에서 자랐어요. 뭘 가리면서 자라지 않아서.”
그녀의 말에 일레온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로렐 호수 근처라고 했었지.”
“로렐 호수요?”
“영주성 바닥도 흙바닥이라 수도 구경이 그리 재밌다 하지 않았나.”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로렐 호수는 가 본 적도 없고요.”
“아니야. 카페 카르디날에 갔을 때 분명히 그대가…….”
일레온의 눈빛이 또 불안하게 오락가락했다.
그 순간 일레온의 상태에 대해 카리나는 문득 알 것도 같았다.
‘혹시 나를 로나로 착각하고 있는 거야?’
분명 일레온은 엘리시아가 로나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조심스레 구애하는 거로 보였다.
로나.
리나.
기억을 잃은 채로 눈먼 그의 곁에서 메이드로 일했던 여자.
알고 보니 귀족가 영애였던 엘리시아였던 로나.
그리고 엘리시아는 일레온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지?’
의문이 들었지만 물어봐도 답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 일레온은 아주 제게 홀딱 반해 있었으니까.
카리나는 조바심이 들었다.
일레온이 진짜 제게 깊은 마음을 갑자기 품었을 리는 없다.
처음에는 그가 이제라도 제게 운명을 느낀 걸까 생각했지만 그간 일레온이 했던 행동에 빗대어 보면 뭔가 맞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내게는 기회야.’
카리나는 주스로 입을 헹구고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기회를 엿보았다.
“일찍 쉬는 게 좋겠군.”
쓰러졌던 탓에 그녀를 염려하는 일레온이 대공비의 침실에 바래다주었을 때.
카리나는 은근한 손길로 일레온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매달렸다.
“오늘 밤 같이 있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