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울지 마
(72/151)
72.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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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울지 마
2022.09.10.
“오늘 밤 같이 있고 싶어요.”
카리나의 말에 일레온은 잠시 굳은 듯했다.
“싫으세요?”
일레온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카리나는 몹시 긴장했는데 일레온이 곧 그녀를 마주 안으며 기쁜 투로 말했다.
“내 침실로 갈까? 아니면 여기서?”
혹시 거절하면 그 다음엔 어쩌나 했는데. 카리나는 안도했다.
확실하게 기정사실로 만들려면 아무래도 대공의 침실인 쪽이 좋겠지?
“당신 침실로 가요.”
일레온은 카리나를 번쩍 들어 안고 그의 침실로 향했다.
커다란 침대에 조심스레 그녀를 내려놓고 일레온은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씻고 올게. 아니면 그대가 먼저 씻는 건?”
“저는 제 방에서 씻었어요.”
“그렇군. 조금만 기다려 줘.”
일레온이 침실 밖으로 사라지자 카리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할 수 있어.”
그녀라고 무슨 희대의 요부인 건 아니었다.
사비엘과 고작 하룻밤 보내본 게 다였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미리 준비해 온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카리나는 얼른 입고 있던 드레스를 벗기 시작했다.
“카리나?”
일레온이 씻고 가운의 허리띠를 여미며 침실 안에 들어섰다.
그새 불도 낮춰 놓은 침실 안은 어둑했다.
“먼저 잠이 들었나?”
일레온이 침대 가운데 불룩하게 솟아난 자리의 시트를 살짝 건드릴 때였다.
화악.
시트를 걷으며 누워 있던 카리나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은…….”
“어때요?”
그녀를 본 일레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리나는 ‘로나’가 입던 메이드 옷차림이었다.
일레온을 보며 카리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로나를 좋아하는 거라면 이 모습엔 분명 약하겠지?’
확실한 한 방이 필요했다.
그래야 일레온의 아이를 낳게 될 터였다.
‘로나에게 그렇게 매달린 거 보면 메이드로 일할 때 둘이 뭔가 있었을 거야.’
둘만 은밀하게 시간을 보낼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일레온처럼 지체높은 가주가 직접 레이디의 집에 드나드는 일을 할 리 없었다. 정식으로 작위를 물려받은 가주쯤 되면 직접 청혼하러 갔다가 거절당하면 망신이다. 반드시 대리인만 보내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일레온.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게요.”
이러면 그가 먼저 넘어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여긴 카리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애썼다.
“내가 원하는 거?”
“네.”
“무엇이든?”
카리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일레온은 방을 나갔다 곧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무언가 두툼해 보이는 책이 한 권 들려있었다.
“그 책은…….”
일레온은 가져온 책을 카리나에게 내밀었다.
‘팔레가라 전쟁사? 이게 뭐지?’
그 사이 그는 카리나의 옆에 편히 드러누우며 눈을 빛냈다.
“책 읽어줘.”
“네?”
“리나 네가 팔레가라 전쟁사는 절대 안 된다고 했었잖아. 내가 원하는 거 무엇이든 해준다고 했으니까 그 책 읽어줘.”
카리나는 황망히 두툼한 책을 내려보았다.
“어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레온이 보채는 바람에 얼결에 책갈피가 꽂힌 곳의 페이지를 넘기고 말았다.
“트로팔가라의 병력을 무시했던 팔레르모는 첫 전투에서 패퇴했다. 그것은 전투를 좋아하고 전쟁을 즐기는 호전적인 팔레르모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낸 대 사건이었다. 팔레르모는 이차전을 위해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했는데 대포 2000문, 투석기 300대, 석궁 5000기를 제작하고 신병을 25,000명, 퇴역한 군인들을 모아 구병대를 50,000명 새로이 조직했다.”
이게 뭐야?
“그러나 첫 전투에서 큰 승리를 맛본 트로팔가라가 젊은 이들의 지원으로 100,000만의 군병이 늘어나는 줄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게 뭐냐고?
어느 새 일레온은 흡족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
엘리시아는 밤새 불이 꺼진 일레온의 침실 창을 올려다보며 울었다.
새벽 동이 터올 무렵, 엘리시아는 힘없이 숲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게 아직도 있네.”
일레온이 그녀를 위해 준비해놓았던 막사와 테이블, 의자 따위가 여전히 아늑하게 놓여 있었다.
엘리시아는 지친 몸으로 막사에 들어가 그 안의 침상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러지 마. 몰랐던 거 아니잖아.”
어젯밤, 카리나가 일레온을 유혹하는 모습을 보게 된 건 우연이었다. 기쁜 듯 그녀를 안아 든 일레온이 그의 침실로 카리나를 데려가는 것까지 볼 줄은 몰랐지만.
심장이 굳어서 멈춰버리는 것만 같았다. 피가 돌지 않고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고 무언가로 가슴이 뻥 꿰뚫린 기분이었다.
뭔가 견딜 수 없이 힘들어서 겨우 숨을 고르며 저택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랬는데…….
무심코 올려다본 눈에 일레온의 침실 창이 보였다.
그 창에 인영이 어릿어릿하다가 불이 꺼졌다가, 침대 옆 작은 등을 켜기라도 한 듯 익숙하고 은은한 불빛이 다시 켜지고, 또 그 불빛도 마저 꺼질 때까지.
엘리시아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일레온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 제 속이 문드러지는 건 별개였다.
“더 빨리 떠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모습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일레온은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니었으니까.
엘리시아가 늘 막연히 상상하던, 그랬으면 하고 바랐던 그의 짝과 모두를 구원해줄 원작의 전개로 향했을 뿐.
그러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그렇게 잘 알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괴로웠다.
“죽을 것 같아.”
작게 중얼거린 엘리시아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그의 곁을 떠나면 새 삶을 얻어 잘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떠날 날을 받아놓고 이렇게 모든 게 망가져버린 기분이 드는 걸 어째야 할까.
문득 저를 잡아먹을 듯 허공에서 타오르던 검은 불꽃도 두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는 게 다라면.
눈뜨고 살아 있는데도 죽을 것 같다고 느낀다면 그게 두려울까.
“흑. 흐흑.”
엘리시아가 펑펑 눈물을 흘리며 흐느낄 때였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싸늘한 일레온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고개를 들자마자 그녀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일레온…… 님.”
놀라서 크게 뜬 눈 아래로 고여 있던 눈물이 도르륵 흘렀다.
“여기는 내가 리나에게 선물로 주려고 만든 곳인데 너 따위가 마음대로 들어올 곳이 아니다.”
기분이 상한 표정으로 힐난하는 일레온을 보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엘리시아는 얼른 올라앉아 있던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몰랐어요.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서둘러 막사 밖으로 그를 피하려 할 때였다.
툭.
그녀의 옷 끝자락이 무언가에 걸린 듯 잡아당겨졌다.
“아…….”
뒤를 돌아본 엘리시아는 몸에서 힘이 빠졌다.
일레온이 그녀가 입고 있는 후드의 끝을 아슬아슬하게 꽉 쥐고 있었다.
“……엘……리시아.”
일레온의 입술 사이로 쥐어짠 것 같은 제 이름이 흘러나왔다.
엘리시아는 그 순간 너무 두려워서 그를 뿌리치고 밖을 향해 달렸다.
“헉. 헉.”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질투에 빠져서 속이 뒤집힌 채 그의 곁에서 죽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레온이 저를 부르자마자 새카만 불꽃이 등 뒤에서 날름거리는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탁.
달리던 몸이 붙들려 돌려세워졌다.
“……가지 말라고 안……할게. 윽. 으윽.”
마주친 그의 눈동자에는 고통이 가득했다.
“울지 마. 엘리시아.”
일레온.
일레온.
나 어떡해야 해요?
엘리시아가 하고 싶은 말들은 목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붙잡았던 손에서 힘이 빠지더니 천천히 그가 뒤로 물러났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냉랭한 온도를 되찾은 일레온이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일갈했다.
“비켜.”
***
“둘 다 우는 것 같은데.”
후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던 레브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표정은 더욱 여유가 없어져, 이제 무서울 정도로 굳어 있었다.
마리엘라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송구합니다.”
“정말 무섭군. 무서워.”
레브는 창가에서 물러나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하지만 찻잔을 들어 올리는 손끝이 떨리자 도로 잔을 내려놓았다.
“난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편이지. 내가 강하니까. 특별한 신의 축복을 타고났기도 했고 말이야.”
레브는 자조적인 말투였다.
“누가 우리를 장기 말처럼 가지고 논다고 생각하니 정말 두려워. 일레온의 피가 그들 손에 넘어간다면, 지금 내 아들이 겪는 저런 행동을 나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레브는 소름이 끼친다는 뜻 어깨를 웅크려 팔을 문질렀다.
“뭔가 방법이 있다면 좋겠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이대로 아들이 예언서에 적힌 대로 예지 된 여인과 건실하게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아야 한단 말인가. 배 속에 클레벤트 대공가의 혈통이 아닌 아이까지 가진 여자와.”
레브는 ‘카리나’가 일레온의 짝으로 정해진 여인이라는 데에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온이 암시에 걸려 엘리시아를 잊고, 득달같이 ‘정해진’ 운명의 여인을 찾아 집으로 데려온 건 아무리 봐도 수상했지만 어쩔 도리가 있나.
하지만 카리나를 진찰한 의사가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귀띔하자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 또한 보통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제 자식이 남의 자식을 키우길 바라는 어머니가 어디 있단 말인가.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을 가볍게 생각하던 레브는 점차 심각해졌다.
덕분에 마리엘라만 매일 대공저로 불려와 레브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소나텍이라는 자를 죽일 수는 없을까.”
“그는 원작을 고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절대적이에요.”
“그대는 시도해보지 않은 건가.”
마리엘라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가진 재주가 미약한지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상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암시를 풀 방법을 찾고 싶어.”
레브의 말에 마리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독처럼 보이지만 저주에 가까운 것입니다. 해주를 해야 하지요. 암시를 건 자만이 풀 수 있습니다. 아니면 스스로 푸셔야 한답니다.”
마리엘라는 뭔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그래도 만약에 암시를 스스로 푸는 데 성공하면 다시는 같은 암시를 걸 수 없어요.”
“풀지 못한다는 게 문제 아닌가.”
마리엘라의 시도는 레브에게 별다른 위로가 되지 못했다.
레브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떠날 생각이란 말인가.”
“전하.”
탓하는 듯한 말에 마리엘라가 어쩔 줄 몰랐다.
“이 일이 전적으로 그대의 탓은 아니란 걸 알고 있어. 하지만 그대는 엘리시아를 구하기 위해 일레온에게 그 아이가 예언서에 안배된 인물이란 걸 알리지 않았나.”
레브는 늘 편하게 웃는 낯이었지만, 요 얼마간은 웃음을 잊은 듯 살았다.
“만약 그대가 일레온에게, 내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았겠지. 알린 이유는 오직 제 딸의 안위를 위한 것이고.”
“죄송합니다.”
“사과를 듣고자 한 말이 아니야.”
레브는 마리엘라를 꾸짖었다.
“나는 그대가 이 상황에 대해 책임을 느꼈으면 좋겠어.”
“책임……이라고요?”
“지금 이대로 엘리시아가 떠난다면 마리엘라 그대가 소나텍과 다를 바가 무엇이지?”
마리엘라의 눈이 커졌다.
“그대 또한 나와 일레온을 어찌해도 좋을 책 속 인물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어째서 바꾸려는 생각을 하지 않아?”
“저는…….”
“어떻게 자신의 운명이,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고 믿을 수가 있나.”
레브는 마리엘라를 힐난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