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끝나지 않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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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끝나지 않는 사이
2022.09.14.
끄으아아아!
그날 밤, 저택은 또 한 번 발칵 뒤집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밤마다 사건이 벌어지는 통에 요 며칠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한 집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일레온의 상태를 본 레브의 얼굴도 창백하긴 마찬가지였다.
겨우 일꾼들을 시켜 일레온을 침대에 붙잡아 맨 집사가 체면을 마다하고 손수건으로 이마에 흥건한 땀을 훔쳤다.
“발작을 하고 계십니다.”
“발작? 일레온이 어째서?”
집사가 말을 골랐다.
“예전에 눈이 보이지 않으실 때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약차를 마시거나 해주를 하려고 할 때마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셨지요.”
“……하.”
아아아악!
방 밖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아들의 비명 소리에 레브가 비틀거렸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베르나르가 그녀를 부축하려 하자 레브는 손을 저었다.
끔찍한 소리에 잠을 청하다 뛰쳐나온 엘리시아는 집사를 돕지도, 레브를 위로할 수도 없었다.
몸을 가눈 레브는 고개를 돌려 머뭇거리고 선 엘리시아를 보았다.
“저 애는 싸우길 선택한 것 같군.”
“…….”
“엘리시아. 넌 도망칠 건가?”
엘리시아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일레온이…… 일레온이 어째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까만 해도 카리나와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지 않았나.
자신만 없다면 그는 제게 주어진 운명 속에서 정해진 성공과 명예를 모두 손에 넣을 것이다. <눈먼 짐승의 꽃>의 남주로서 말이다.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운 가시밭길로 향하고 있는지, 엘리시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만 떠나면 될 일이었는데.
레브는 멍하니 선 엘리시아를 지나쳐 자신의 침실로 사라졌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주춤주춤 일레온의 방문 앞으로 간 엘리시아는 그대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등 뒤의 문 안에는 또 고통에 발작하는 일레온이 묶여 있었다.
엘리시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문질렀다.
긴 밤이 시작되었다.
***
일레온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그러고도 꽤 시간이 지날 때까지 엘리시아는 그의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가 소리지를 때마다 꽉 움켜쥐고 있던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몸을 일으킨 엘리시아는 조심스레 일레온의 침실로 들어갔다.
달칵.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작은 소음이 났고 일레온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그대는…….”
“……엘리시아입니다.”
“고통받는 어린 양에게 신께서 자신의 종을 보내주셨군.”
엘리시아는 일레온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팔과 다리를 침대에 묶어놓은 모습을 다시 보니 억장이 무너지며 눈물이 흘렀다.
“왜 우는 거지?”
“아닙니다. 울지 않았어요.”
“눈물도 흘리고 코를 훌쩍이지 않았나.”
“제가 알레르기가 좀 있어서.”
깜깜한 방 안에서 일레온의 붉은 눈동자만이 선명했다.
‘이런 모습을 다신 보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가 눈만 뜨면 일레온은 꽃길을 갈 거라고, 앞으로 그의 인생에 이런 비참한 광경은 더는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럴 줄 알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엘리시아는 잊어야 할 사람인데, 그의 옆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인데 그녀가 일레온에게 영향을 주고 있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 같아서 슬퍼졌다.
“땀을 닦아드릴게요.”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물 주전자를 만져보았다.
집사가 가져다 둔 지 얼마 되지 않은 건지 아직 따뜻했다.
조르륵.
물을 대야에 따르고 수건을 담갔다 꾹 짜서 일레온의 얼굴을 닦아주자 그가 시원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제법 잘하는군.”
“신전의 신관들은 구호활동을 하니까요.”
엘리시아는 둘러대었다.
고위 신관들은 구호활동에 나서지 않는다. 보통 신과 대화는 불가능한 하급 신관들이 그런 활동을 맡곤 했다.
하듄샤의 신관들로 말할 것 같으면, 원작에 대한 이해도에 따라 가질 수 있는 신성력의 등급이 달랐는데 어느 정도 읽고 빙의했는지, 또 원작을 얼마나 기억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천차만별이었다.
적게 읽어도 외운 듯 기억해서 신성력이 좀 더 높을 수도 있고, 다 읽었지만 비슷비슷한 제목과 클리셰의 향연 속에 이 작품이 그 작품 같아 기억을 잘 못 해서 신성력이 낮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레온이 알 길이 없으니 엘리시아는 대충 대답했다.
“구호활동이라니. 감사한 일이군. 내친김에 부탁 좀 해도 되나.”
“네. 뭐든 필요하신 게 있다면 말씀하세요.”
“목이 마른데 물 좀 줄 수 있나. 거기 작은 주전자가 있을 거야.”
일레온이 목이 탄 듯 불편한 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그의 입술에 물을 머금은 엘리시아의 입술이 닿았다.
몇 번의 물이 꼭 물린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일레온은 제게 물을 머금은 채 얼굴을 내리는 여자를 보았다.
‘신관이라 그런가.’
그녀의 낯빛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요했고 부끄럽거나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하듄샤에 대해서는 어릴 적, 어머니인 레브와 몇 번 간 것 외에 크게 인상적인 일도 없었고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잊은 것 같은 여인은 성스러워 보였다.
물 주전자의 차가운 물은 잠시 여자의 온기를 머금고 제게 스며들었다.
꽃냄새 같은 것이 입안에 느껴졌다.
그 여자의 몸에서 날 것 같은 향기가 코와 입안에 내내 머무는 느낌이었다.
이런 상황에 그런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이 일레온은 낯설었다. 싫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해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움직임에 집중해버리고 만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엘리시아가 입술에 남은 물 자국을 옷 소매로 문질러 닦을 때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뻔했다.
“신전의 구호활동이란 게…… 늘 이렇게 해주나?”
이런 기분 좋은 일을 해준단 말인가. 일레온은 낯선 신전 문화에 호기심이 일었다.
“아니요.”
“그럼 왜……. 물은 저 주전자로 입에 대어주면 걸로 충분히 마실 수 있는데.”
엘리시아가 도리어 의문을 품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았다.
“전에 입으로 먹여주어야 한다고, 집사님도 그렇게 하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뭐? 집사가 내게 물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일레온은 황당했다.
“집사가 그리 말했나?”
“대, 대공 전하께서 말씀하셨는데……요.”
“내가 그리 말했다니. 그보다 어머니께서 모셔오기 전에 나를 만난 적이 있었나?”
엘리시아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해.’
일레온은 어째서인지 이 대화를 여기서 끝내야 할 것만 같은 절박한 감정에 휩싸였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물 좀 어떻게 먹었고 그딴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3만 병력을 갑자기 진군시켜야 할 때도 이렇게까지 다급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의 감을 상당히 믿는 편이었으므로 곧 입을 다물었다.
“왜 이런 선택을 하세요?”
엘리시아가 망설이다가 그에게 물었다.
“이런 선택?”
“이렇게 아프시지 않아도 되잖아요. 분명히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내가 왜 발작했는지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
일레온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혹시 저주에 걸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어.”
“왜요?”
“잘 모르겠지만……. 뭔가 떠오를 것 같은 순간 머리가 아프더군.”
일레온이 눈을 찌푸렸다.
“예전에 눈이 보이지 않을 때. 마치 눈 속에 살아있는 벌레나 작은 동물이 들어 있는 기분이었거든.”
그래서 낫고자 할 때마다 날뛰면서 그를 괴롭혔다. 그건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처럼 반응했기에 더욱 아프고 소름 끼쳤다.
“이게 비슷해서……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아.”
“너무 아프잖아요. 그냥 안 아프면 안 되나요?”
일레온은 피식 웃었다.
“오데르의 피는 신이 축복한 자손이란 뜻이라고들 하지. 보통 사람들과는 감각이 달라. 이건…… 지금 견뎌야만 한다고 무언가가 외치는 것 같아. 예지라고 해야 할지 예감이라 해야 할지 애매하지만.”
엘리시아는 물기 어린 눈으로 일레온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당신이 이 고통의 끝에 기억을 되찾았는데 내가 사라지고 없으면 실망할까요?’
레브의 말이 맞았다.
일레온은 싸우고 있었다.
카리나의 손을 잡고 암시가 주는 평화 속에 그가 머문 시간은 너무 짧았다.
어째서일까?
무엇 때문에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나 때문이야.
엘리시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아 물수건을 정리하는 척하며 일레온의 곁에서 멀어졌다.
“고맙군.”
일레온은 그런 엘리시아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상태가 나아지면 하듄샤에 기부라도 하겠어. 아, 파문당해서 상관이 없나?”
“아닙니다. 언젠가 돌아갈 곳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방에서 물러났다.
문을 닫고 나자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나. 잘못 생각했나 봐.’
사람의 마음이란, 사람의 기억이란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고 자를 수 있는게 아니었다.
오데르의 우월한 존재는 그런 예감을 좇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자 엘리시아도 감화라도 된 것처럼 일레온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레온과 자신의 관계는 서로가 곁에 없더라도, 마음속에서 이어질 것이다.
엘리시아가 그를 기억하고, 일레온이 엘리시아를 기억하고.
서로를 그리워하고.
어떤 말과 행동을 곱씹으며 후회한다면, 그건 끝난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남은 삶 전부, 평생 동안 그리움 속에 갇혀 살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원작에서 살해당하고 사라질 운명이었으니, 제가 그를 떠올리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레온은 사랑을 해야 한다. 온전히 마음을 쏟는 사랑을 해야 할 운명을 타고났다.
그것을 자신이 가로채버린 건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엘리시아는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자신이 그를 떠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 실책이었다.
떠나도 끝나지 않을 거라면, 그의 옆에 있어야 맞았다.
‘하지만 엄마가 반대하실 것 같아.’
마리엘라는 소나텍에 의해 엘리시아의 삶이 왜곡되는 것을 스무 해 동안이나 괴로워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지만, 엘리시아의 일이 되면 예민하고 막무가내인 점도 있었다.
레브가 며칠이나 저택에 불러 다시 생각해보라고 누누이 말해도 벽을 세우고 따를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솔직히 황녀 전하께서 자신과 일레온을 책 속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셨을 때 조금 시원했는데.’
늘 엘리시아 자신이 마리엘라에 대해 느끼던 모순이었다.
그렇게 운명은 바꿀 수 없다고, 원작대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면서 엘리시아의 운명을 바꾸어 원작 밖으로 탈주시킬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마리엘라의 말대로 원작이 바뀌지 않는 거라면, 엘리시아 또한 원작 안에서 운명의 끝을 맞이해야 하는 게 아닐까.
‘만약에 내가 일레온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고 한들 소나텍에게 맞서려면 엄마가 도와주셔야 할 텐데.’
그게 문제였다. 소나텍에게 대항하려면 그를 아는 마리엘라의 협조가 필수였다. 엘리시아가 떠나지 않겠다고 했을 때, 그녀 역시 돕지 않겠다고 해버리면 모두의 개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시아가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을 거라고, 마리엘라는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휴.”
막막한 느낌에 엘리시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때 집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엘리시아 님. 신관께서 일을 하고 계십니까. 제가 주인님께 혼납니다.”
집사가 재빨리 엘리시아가 들고 있던 물수건이 든 대야를 받았다.
“구호활동은 익숙한 일인지라. 괜찮습니다.”
베르나르와는 늘 합이 좋았다. 그런 그에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 척을 해야 한다는 게 엘리시아는 괴로웠다.
얼른 자리를 피하려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베르나르에게 묻고 말았다.
“대공 전하께서 목이 마르시다고 해서 물을 먹여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집사께서 전하께 물을 입으로 먹여드리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