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입으로 먹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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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입으로 먹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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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입으로 먹여드립니다
2022.09.17.
“그런데…… 집사께서 전하께 물을 입으로 먹여드리나요?”
“네에?”
집사가 펄쩍 뛸 것처럼 반응하자 대야에서 밖으로 물이 튀었다.
“제, 제가 말입니까?”
“전에 대공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었는데…….”
그녀의 말에 베르나르가 당황한 듯 눈을 굴리다 문뜩 의미심장하게 엘리시아를 보았다.
“예전 일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만.”
엘리시아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앗, 이건 신관 엘리시아라면 알 리가 없는 얘기였는데.’
일레온이 의뭉스럽게 말을 돌리길래 이상하다고 느껴서, 궁금했던지라 자신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아, 하하.”
베르나르가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 주인님께서 저리되신 것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
엘리시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그가 산뜻하게 말했다.
“대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신관 엘리시아 님. 저도 제가 좋을 대로 생각하면 되니까요. 크게 상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집사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물론 대공 전하께서 침대에 묶여계시는 동안 물은 입으로 먹여드립니다.”
“저, 정말요?”
“그렇습니다.”
“아, 그, 그렇군요.”
엘리시아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 너무 늦은 시간이라 저는 이만…….”
“가서 얼른 쉬십시오. 오늘 도와주신 건 감사드립니다. 신관님.”
엘리시아가 허둥대며 사라지자 베르나르는 한숨을 쉬었다.
“또 입으로 물을 먹여드린 모양이지요.”
제 주인이란 인간은 어쩌면 몹쓸 저주에 걸려 기억도 못 하면서 그 물을 받아먹고 있냔 말이다.
하지만 베르나르는 일레온의 저력을 믿었고,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는 분명히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충심으로 입술이라도 팔 수밖에.
섬기는 주인의 사랑을 지킬 수만 있다면 말이다.
“얼른 돌아오십시오. 전하.”
베르나르는 일레온의 방문을 한 번 더 쳐다보고 몸을 돌렸다.
***
카리나는 초조한 심정으로 너른 대공비의 방 안을 서성였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일레온을 유혹하는 일은 쉬웠지만 실패했다.
“분명히 제대로 알아들었잖아?”
그녀의 말뜻을 이해했으니 어디가 좋겠냐고 묻기까지 한 게 아닌가.
그런데 하녀가 일할 때 입는 옷차림을 보고 그다음부터 일레온의 반응이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이, 일레온 님이 책을 읽어달라 하셨어요.」
게다가 일레온이 잠든 직후 책을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방에 들어온 집사에게 부끄러운 꼴을 들키고 말았다.
「그 옷은 대공저 사용인들이 입는 것인데요.」
「제가 가, 갈아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서 잠시 빌려 입은 거예요.」
「누구한테요? 지금 저택 안에 그 옷을 입는 여자 사용인이 한 명도 없습니다만.」
베르나르라고 했던가? 집사는 까칠한 태도로 그녀를 비난하는 투였다.
「대공저의 살림은 제 몫입니다. 아무리 전하께서 모시는 손님이시더라도 함부로 보관품을 내어가시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불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집사의 말이 맞다. 손님이 초대받은 저택을 뒤지고 다니는 일이 없어야 하고 잘 교육받은 아가씨라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집사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일레온이 씻는 동안 메이드 옷을 갈아입을 때만 해도 금방 다시 벗을 줄 알았지. 그걸 누가 보게 될 줄 알았나.
아무튼 카리나는 주인의 잠자리를 살피러 온 집사에 의해 침실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일레온을 만날 수 없었다. 제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호언하는 그에게 집사가 무례하다고 벌을 주라 할 셈이었던 카리나는 김이 새고 말았다.
“아프다는 것도 핑계 아니야?”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악마 같은 사비엘의 마수를 벗어나 일레온에게서 느꼈던 보호받는 느낌, 따스하고 안락한 기분이 파삭 소리를 내며 깨지는 것만 같았다.
“기회는 또 있을 거야.”
카리나는 답답한 가슴에 깊게 숨을 들이쉬며 저택 밖으로 나섰다. 정원에서 산책이라도 하면 조금이라도 속이 나아질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백마를 타고 대공저의 커다란 문을 통과하는 이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늘어선 황궁 호위 기사들. 카리나의 눈이 흡뜨였다.
“사, 사비엘.”
제법 거리가 있지만 그녀를 알아본 사비엘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도망쳐야 해.’
팔에 촘촘할 정도로 소름이 올라왔다. 카리나는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가 뒷문으로 달렸다.
“헉. 헉.”
며칠 쉬었지만 금방 기운이 빠질 것처럼 숨이 찼다. 하지만 카리나는 저택 후원과 이어진 숲을 향해 내달렸다.
‘잡히면 안 돼.’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작정한 자였다.
그게 아니라면 같이 마차에 탔던 하녀를 밖에 내동댕이칠 리 없다.
제게 황궁 호위가 아닌 심부름꾼을 보낼 리 없다.
흔적을 지우려는 듯 억지로 마차를 갈아 태울 리 없다.
그리고 저렇게 시퍼런 눈으로 검을 뽑아 든 채 제 뒤를 쫓을 리 없다.
자연스레 이어진 길을 따르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다 뒤를 돌아본 카리나의 눈에 살기등등한 얼굴로 말을 탄 채 저택을 휘돌아 달려오는 사비엘이 보였다.
기겁한 그녀는 길도 없는 언덕을 정신없이 오르기 시작했다.
“앗!”
발이 허공을 디딘 것은 한순간이었다.
“꺄악!”
낙엽이 쌓인 완만한 길 가장자리로 생각하고 밟은 자리가 낮은 절벽의 끄트머리였다.
“흐으…….”
부엽토 더미로 구르며 떨어진 몸 위로 날아오른 낙엽이 거칠게 덮였다.
곧 눈앞이 흐려지며 카리나는 정신을 잃었다.
***
대공저를 떠나는 엘리시아의 짐은 단출했다.
배를 타고 제국을 떠나, 유테르 공작가의 먼 친척이 자리를 잡은 난쿠 대륙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제국이 자리하고 있는 하메로 대륙과 난쿠 대륙은 배로 일주일은 걸릴 거리였다.
완전히 다른 새로운 곳에서의 삶.
엘리시아가 내내 기다려왔던 그때가 왔다.
원작에서 영원히 떠나는 순간이 말이다.
하메로 대륙 중서부에 위치한 콘스탄스 에비뇽은 내륙의 거항이었다.
빙하에 의한 침식이 내륙 안쪽까지 깊게 파놓은 만을 따라 거대한 배들이 너른 물 위로 잘도 드나들었다.
콘스탄스 에비뇽과 난쿠 대륙 최동단에 위치한 입문 도시 베르베를 연결하는 배는 자주 뜨지 않았다.
해류의 영향이었다.
매달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시기는 불과 열흘 정도에 불과했다. 그 시기를 지나면 두 대륙 사이에서 역류하는 해류 탓에 배가 나아가지 못하고 가운데 갇힌 것처럼 빙글빙글 머물게 된다.
그때를 피해 배를 띄우다 보니 두 대륙을 오가는 배는 열을 지어 오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일시에 출항했다.
전에 엘리시아가 출항일 직전에 대공저로 도망쳤기 때문에, 하릴없이 다음 출항일을 기다려야 했다.
마리엘라는 씩씩한 척 작은 여행가방을 단속했다.
“짐은 이거면 충분해.”
몇 번 갈아입을 가벼운 옷가지와 말린 간식거리 약간, 그리고 혹시 몰라 준비한 신분증명이 전부였다.
“1등 선실이니 먹을 것은 선원에게 부탁하면 언제든 가져다줄 거야. 돈을 쓸 일은 없어. 오히려 소지금이 있으면 위험할 수 있으니.”
그러면서도 마리엘라는 난쿠 대륙에서도 쓸 수 있는 금화 하나를 가죽 팔찌 안에 숨겨 엘리시아의 팔목에 채워주었다.
마리엘라가 하는 것을 인형처럼 가만히 눈만 깜빡이며 쳐다보던 엘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엄마.”
“응?”
“저 가고 싶지 않아요.”
“……엘리시아?”
엘리시아는 두 손으로 마리엘라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제발. 잠깐만 제 얘기 좀 들어주시면 안 돼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마리엘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난쿠 대륙으로 떠나면 소나텍은 더는 네게 간섭하지 않을 거야.”
“도망치는 거. 이제 지겨워요.”
“지겹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니? 도망치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우리는 한 번도 원작에서 도망칠 수 없었어.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우리라고요? 엄마는…… 정말 저를, 일레온을 동등한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세요?”
엘리시아는 울먹였다.
“언젠가 그러셨죠. 빙의자들에게 이 세계 사람들은 개미처럼 보이는 거라고요.”
앞에 달콤한 과자 부스러기를 놓아주면 정신없이 기어가는 개미.
때론 위에서 잘못 떨어진 물방울, 단 한 방울에 갇혀서도 숨이 끊어질 수 있는 개미.
“그래서 소나텍이 저를 이토록 우습게 보는 거라고요.”
“그래. 그러니 너는, 널 보호하고 싶은 나는 그를 이길 수가 없어.”
“그럼 엄마도 개미의 마음은 모를 거 아니에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도 개미는 아니니까. 오히려 개미를 밟을 수 있는 입장인 게 사실이니까.”
“엘리시아.”
“저도 생각이 있어요. 마음이 있고요.”
엘리시아는 마리엘라가 마음을 돌려주길 바랐다.
“저 진짜 그를 사랑해요. 떠나고 싶지 않아요.”
일레온은 아직도 고통 속에서 잊은 것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떠나는 게 그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
엘리시아 자신만 아니면 일레온은 원작 속에서 축복받은 삶을 살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느새 마리엘라의 의식이 엘리시아 자신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것일까.
정말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떠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믿었단 말인가.
일레온은 손을 뻗으면 안을 수 있는 카리나 대신, 엘리시아를 찾고 있었다.
뇌를 헤집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말이다.
“그가 저를 포기하지 않잖아요. 이대로 일레온을 두고 갈 수는 없어요.”
“그럼. 데려가기라도 하게?”
“어, 엄마.”
“둘이 서로 끌어안고 같이 타죽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마리엘라가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게 평생 널 살리려고 애쓴 엄마한테 할 소리니?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여기 남겠다는 게?”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넌 정말 엄마 마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구나?”
“흐흑.”
엘리시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마리엘라의 뜻에 반항해본 적은 없었다. 엘리시아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처음이었는데.’
일레온과 함께하고 싶다고 가출했던 건 자신이 원윤지라고 착각할 때였다. 그러니 ‘엘리시아’로 엄마에게 반대의 뜻을 내보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이야기가 한 자리에서 맴돈다.
나를 위해주는 엄마의 마음을 짓밟은 나쁜 아이가 되어버렸어.
의식이 ‘나는 원윤지다’ 하고 도피하고 있을 때, 마리엘라에게 했던 말들은 억눌려왔던 본심일 수 있었다.
차마 자신을 위해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포기하고 옮길 계획을 세우는 아빠, 엄마에게 하지 못했던 말.
그냥 차라리 여기서 죽으면 안 되겠냐고.
죽는 게 뭐가 그리 두렵냐고.
도망치지 말고 그들에게 대적할 방법을 찾아보면 안 되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마리엘라는 소나텍의 이야기만 나오면 거의 경기할 듯 질색했고, 엘리시아는 그녀의 고통에 짐을 얹고 싶지 않았다.
그걸 인제 와서, 일레온 때문에 마리엘라에게 가슴에 대못 박는 말을 하는 자신은 진짜 나쁜 딸인 걸까.
그를 사랑하면서 마리엘라에게 상처 되지 않을 방법은 없는 건가. 정말로?
엘리시아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당장 출발하자.”
“엄마.”
“레브 황녀가 돕겠다고 해도 널 이 집에 두는 게 아니었어.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오데르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하다니. 내가 정신이 나갔지. 혼자 중얼거리며 가방을 챙긴 마리엘라는 엘리시아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사랑은…… 보지 못하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단다.”
“제발…….”
“데릭!”
마리엘라가 방 문 밖에 서 있던 호위를 찾았다.
“엘리시아를 묶어요. 그게 좋겠어.”
마님의 명에 호위가 가느다란 밧줄을 챙겨 들자 엘리시아는 기절할 것 같았다.
“엄마!”
빠져나갈 틈은 없었다.
“제발 한 번만요. 같이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면…….”
“아니. 넌 당장이라도 일레온에게 매달려서 울기라도 할 것 같구나. 배가 출발할 때까지 데릭이 널 감시할 거야.”
“잠깐, 잠깐만요.”
엘리시아가 마리엘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럼…… 일레온에게 작별 인사만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그에게 돌려줄 물건이 있어요.”
“…….”
“그다음엔 엄마가 시키시는 대로 할게요. 흐흑.”
마리엘라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짧게 해. 바로 출발할 테니까.”
엘리시아는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릭이 연행하듯 문을 지켜선 가운데 엘리시아는 겨우 일레온의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일레온.”
기척에 예민한 그는 기절한 듯 잠들어 있었다.
식은땀에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반듯한 이마에 어지러이 들러붙어 있었다.
엘리시아는 안타깝게 그 머리카락을 떼어 가지런히 매만졌다.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