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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뛰어! (75/151)


75. 뛰어!
2022.09.21.



 


“미안해요.”

엘리시아는 일레온을 바라보았다.

사랑을 하는 데는 자격이 필요했다.

사랑을 고백할 용기.

사랑을 지킬 능력.

엘리시아는 딱 두 번, 마리엘라 앞에서만 일레온을 사랑한다고 입에 올려보았다.

차마 그에게는 직접 말할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나면 책임을 져야 한다.

혼자 좋아하는 일은 보답받지 못하는 대신 저 혼자 삭이면 그만이었다.

서로 마음이 통해서 쌍방의 감정이 되고 나면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섣불리 그에게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 못한 건 엘리시아의 이런 비겁한 생각이 끝내 진심을 꽁꽁 싸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일레온. 나는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사실일까 끝없이 의심했다.

원윤지로, 로나로, 엘리시아로. 그리고 지금의 자신으로.

누군가인 척, 연기하지 않는 제게 그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하고 확신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는…… 겁이 많아요.”

마리엘라에게 큰소리쳤지만 죽는 건 두렵다.

삶의 끝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제게 저주처럼 따라붙은 원작의 강제력이 일레온에게도 영향을 줄까봐 무서웠다.


“그리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요.”

겨우 세 살 때 신전에 들어가 바깥세상이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른다.

엘리시아가 모르는 건 너무나도 많았다.

기도와 명상, 신과의 대화로 채워진 시간이 무려 열일곱 해였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서 팔 할이 넘는 시간을 신관으로 살았다.

그 시간이 진심으로 신을 섬기며 평생을 바치려 한 거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마리엘라에 의해 도망칠 기회를 잡을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함이라면 하듄샤를 나가 신관이 아니게 된 순간 쓸모없어지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미안해요. 잘 몰라서 미안해.”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사랑을 지키는데도 뭔가가 이토록 많이 필요한 줄 몰랐다.

마음만으로는 안되는 줄 모르고, 덜컥 가슴에 그를 먼저 품었다.

엘리시아가 부족해서 그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마리엘라가, 소나텍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너무 볼품없는 존재여서, 그를 아프게만 하고 지켜줄 수가 없다.

엘리시아는 목 뒤로 손을 돌려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내었다.

하도 자주 만지작거린 탓인지 일레온이 줄 때보다 반들거리는 나침반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네가 가는 곳이 내가 가야 할 길이야. 그러니까 그대가 가지고 있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던 일레온의 표정이 생생히 떠올랐다.


「이제 우리는 어디든 항상 함께할 테니까.」

 
그는 진심이었고, 그가 한 말에 대해서 티끌만큼의 의심도 없었다.

언제까지나 그들이 함께할 거라고 믿으며, 증표로 이것을 준 셈이었다.

엘리시아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야 한다.

길잡이로 수천의 목숨을 구했다는 행운의 나침반이 탐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돌려주는 게 맞다고 여겼다.

갖고 싶다고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으니까.

엘리시아는 조심스레 일레온의 목에 그것을 걸어주었다.

잠들어 있는 그의 가슴에 놓인 나침반을 보니 눈가가 시큰해졌다.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

침실 문이 열리더니 데릭이 눈빛으로 그녀를 재촉했다.

방을 빠져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엘리시아는 일레온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

하듄샤의 수장고.

빙의자들이 대륙의 거악을 물리치고 콘스탄스 제국을 세웠다는 신화. 건국 신화의 뼈대가 예언서라 불리는 한 권의 책에 담겨 둥근 방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인적이 드물어 조용한 방에 그림자가 찾아들었다. 검은 후드를 눌러쓰고 흰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였다.


“원윤지와 엘리시아가 항구로 향했군.”

소나텍은 꽤 즐겁다는 투였다.


“후훗. 기대되네.”

소나텍은 사냥의 때를 기다리는 매처럼 여유로웠다. 아니 여유로움을 가장하려 한 태도였다. 예언서를 느긋하게 살피면서 때때로 옆에 세워둔 모래시계가 흘러내리는데 시선이 머물렀다. 모래시계가 모두 떨어지고 배의 출항시간이 되자 그는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촛불에 일렁이던 그림자로부터 솟아나듯 작고 새카만 새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새는 소나텍의 주변을 빙글거리다 그의 손등 위에 내려앉았다.


“그래. 배가 떠났단 말이지. 이제 때가 되었어.”

소나텍이 부지런히 필사본의 페이지를 넘겼다.


“오늘이 원윤지의 제삿날이 되겠군.”

그 집요한 말과 행동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소나텍이 허공에서 손을 휘젓자 조금 전까지 손등에서 깃털을 다듬던 새가 허공에서 소용돌이치는 연기처럼 변하더니 곧 그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은 펜이었다.

보랏빛 역광이 돌던 까만 새가 물건으로 변한 듯한 펜에는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수정을 마무리해야겠지.”

그가 필사본의 한 문장을 펜으로 찍고 손을 들어 올리자, 적혀 있던 글이 책에서 글자만 떼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으로 주르륵 달려 올라왔다.

<“이제야 네가 내 사람이 된 것 같아.”>

<사비엘이 황홀한 듯 미소를 짓자, 엘리시아는 그런 그를 보며 부들부들 떨다 울음을 터트렸다.>

<엘리시아가 황궁의 연못에서 숨을 거둔 채 발견된 건 그다음 날이었다. 하지만 사인은 익사가 아니라 교살이었다.>

엘리시아의 죽음이 예견되었던 바로 그 부분이었다.

글자를 떼어낸 소나텍이 펜을 허공에 휙 뿌리자, 글씨들이 마치 먼지라도 되는 것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본문을 지워낸 자리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했다.

이윽고 소나텍은 비어 있는 공간에 새로운 글귀를 적어넣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적을 때마다 검은 깃펜이 어두운 빛을 발했다.

<사비엘과의 추문은 드높은 신관 엘리시아의 명예에 큰 흠이 되었다. 하듄샤에서 파문당한 엘리시아는 끝내 콘스탄스 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마리엘라는 항구에 서서 멀어지는 배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어떻게든 될 거야.”>

<땅에 떨어진 딸의 명예는 엘리시아가 떠나고 나면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질 것이다.>

<“새 삶을 살렴. 내 딸. 뒤는 돌아보지 말고.”>

<하지만 마리엘라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엘리시아가 탄 배가 항구를 떠나고 하루 뒤, 난쿠 대륙으로 향하던 중 거센 풍랑을 만나 침몰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인근을 지나던 다른 배들이 그들을 구하려 했지만, 이안류에 갇힌 배는 소용돌이 치는 파도에 뒤집혀 빠르게 침몰해버렸다. 겨우 목숨을 건진 이들 가운데에 엘리시아는 없었다.>

<“아, 아. 내 딸이! 엘리시아!”>

<제 목숨보다 귀한 딸이었다. 마리엘라는 딸의 비참한 소식에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녀는 결국 남편인 질리언과 함께 딸을 집어삼킨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유테르 공작가의 비극이었다.>

소나텍이 적어넣은 글귀가 잠깐 빛을 내다 천천히 검게 변했다. 시간이 지나자 원래 그 책에 쓰여 있던 것과 같은 검은 문자로 바뀌었다.


“완벽해.”

만족한 표정으로 허공에 손을 털자, 조금 전까지 그의 손에서 글귀를 적어넣던 깃펜이 사라지면서 작은 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허공을 나는 새는 아까처럼 빛을 발하지 않았다.


‘이제 기껏해야 한 번이나 더 수정을 할 수 있으려나.’

여태 아껴 써왔지만 미미한 힘만이 손에 남았다. 그러나 소나텍은 소모된 권능이 아깝지 않았다. 이제 그가 신좌에 오르는 걸 막을 자는 없을 테니까.


“이걸로 원윤지를 끝낼 수 있겠지.”

소나텍이 가면 아래로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여자가 후회하는 꼴은 직접 가서 보아야겠어.”

 

***

마리엘라는 항구에 서서 멀어지는 배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어떻게든 될 거야.”

그녀는 다짐하듯 했던 말을 또 중얼거렸다. 마리엘라를 보며 질리언이 어깨를 끌어안았다.


“괜찮소?”

“그럼요. 물론이죠.”

마리엘라는 아무렇지 않게 남편을 보려 했다. 마음과 달리 자꾸만 표정이 어두워졌다.

데릭에 의해 묶인 채, 끌려가듯 갑판 위로 승선하던 딸의 마지막 얼굴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젠가 엘리시아가 떠날 때의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

마리엘라의 바람 속에서 엘리시아는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희망에 찬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며 배에 올랐다.

난쿠 대륙에서 함께하게 될, 원작에 쫓기지 않는 미래를 꿈꾸며 말이다.

이토록 희망과 현실이 다를 수가 있을까.

억지로 가기 싫은데 등 떠밀려 보내듯 엘리시아가 떠나게 될 줄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애는 강한 아이요. 우리 걱정보다 더.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부인.”

마리엘라는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요 얼마간의 상황들이 너무 급박했던 탓에 쉬지 못한 머리가 뜨끈했다.


“새 삶을 살렴. 내 딸. 뒤는 돌아보지 말고.”

그것만을 바랄 뿐이었다.

모든 것을 한 번에 끊어내야 했다.

그게 아니고는 원작에서 엘리시아의 존재를 빼낼 방법이 없었다.

마리엘라는 엘리시아를 태운 배가 구불구불한 만을 따라 멀어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끝났어.’

소나텍이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었다.

더러워서 피한 거지.

지킬 것이 있는 쪽은 방어에 급급했다.

치졸하고 악독한 자식.

그를 생각하면 정말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정도였다.

하지만 엘리시아가 무사히 떠났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널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엘리시아.’

내 딸로 태어나서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길.

마리엘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바랐다.

엘리시아가 제국 땅을 벗어나는 걸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마리엘라는 드디어 제게 저주처럼 씌워진 굴레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딸의 운명이 비틀린 걸 알고 나서 처음으로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푸드덕.

전서구가 날아와 주위를 맴돌았다.


“무슨 일이지?”

질리언이 팔을 뻗자 비둘기가 날렵하게 내려앉았다. 새의 다리에 묶인 편지를 확인한 질리언의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다 못해 파래졌다.


“왜요? 당신. 무슨 일인데요?”

마리엘라는 대답 없는 남편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았다.

[오늘 자 수정. 배 침몰. 내일. 엘리시아 사망.]

전언을 읽은 그녀는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에, 엘리시아.”

이미 엘리시아를 태운 배는 한참 전 멀어져 보이지 않았다.


“아아악!”

마리엘라는 미친 사람처럼 맨몸으로 바다로 뛰어들려 했다.

그 모습에 놀란 뱃사람들이 그녀를 몸으로 막았다.


“아, 안 돼.”

“마리엘라!”

그녀는 울면서 엘리시아를 몇 번이고 부르다 질리언의 품에서 기절했다.


 

***



“죄송합니다. 아가씨.”

데릭은 배가 완전히 항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나서야 엘리시아를 풀어주었다.

반나절 넘게 억지로 포박당했기 때문인지 손에 피가 잘 돌지 않았다.

엘리시아는 손을 꾸물럭 주무르며 갑판에 서서 배가 나아가는 길을 바라보았다.

천 미터가 넘는 깊이의 만 위로 배들이 꽤 빠르게 오갔다. 협곡을 타고 흐르는 바람 때문이다.

아직 돛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배가 항해하는 주변이 점점 넓어지는 게 벌써 바다와 이어지는 만의 입구까지 왔나 싶었다.


“……일레온.”

그의 오늘은 어땠을까.

아프지 말았으면 하는데.

앞을 봐야 할 때라는 걸 안다.

그런데 자꾸만 뒤로 고개가 돌아갈 때는 어째야 할까.

배의 앞쪽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배가 나아가는 방향의 풍광이 더 좋기 때문이다. 너른 바다를 처음 보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뒤만 보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푸르고 높은 절벽 사이로 조금 전 지나온 만을 훑었다.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 미련을 놓지 못하던 그녀의 눈에 이상한 것이 띈 건 그때였다.


“저게 뭐죠?”

“그러게요. 엄청 빠른 것 아니에요?”

유유히 운항하는 커다란 상선들 사이로 아담한 배 한 척이 물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는데요.”

“어머, 이러다 부딪히는 거 아니에요? 너무 빠른데.”

빠르게 달려온 배는 그들이 탄 배의 근처에 와서도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 그걸 본 승객들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미쳤나 봐.”

“다들 피해! 배가 충돌해요!”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비스듬히 배의 후미를 미는 서슬에 커다란 배가 요동치며 출렁거렸다. 그 충격에 엘리시아와 승객들이 미끄러지듯 일시에 넘어지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엘리시아는 갑자기 밀려온 멀미 기운에 갑판 바닥에 손을 짚고 숨을 골랐다.

날벼락 같은 충돌에 승객들이 혼란스러워할 때였다.


“엘리시아!”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귀를 의심했다.


“엘리시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엘리시아는 난간에 손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제가 탄 배를 향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일레온이 보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일레온이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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