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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내가 네 몫까지 충분히 강하니까 (76/151)


76. 내가 네 몫까지 충분히 강하니까
2022.09.24.



“뛰어!”

일레온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엘리시아의 심장을 뛰게 하는 힘이.

그를 향하는 시선을 올곧게 할 힘이.


“아가씨!”

뒤에서 데릭이 황급히 그녀를 부르며 달려왔다.

고개를 뒤로 돌려 그 모습을 보던 엘리시아는 앞을 보았다.

뒤를 보는 건 싫어.

나도 앞을 보고 살고 싶어.


“엘리시아!”

일레온이 또 한 번 그녀를 불러주었다.

그의 부름에 출렁이는 파도와 쿵 하고 부딪혔다 멀어지는 두 배 사이의 불안정한 간격에 대한 두려움이 잊혔다.

다음 순간 엘리시아는 망설이지 않고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에, 엘리시아 아가씨!”

“꺄아악!”

뒤에서, 머리 위에서 일어난 소란이 멀어진다.

엘리시아의 눈에 보인 건 오직 일레온뿐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팔을 벌려 제게 떨어지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거의 마지막 순간, 일레온이 타고 온 배의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부딪힐 것 같아 겁이 났다.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제 속도를 찾아 귓가에 거센 바람이 부딪히는 순간 엘리시아는 눈을 꽉 감았다.

타악.

그런 엘리시아를 낚아챈 일레온이 반동으로 그대로 그녀를 안고 구르듯 뒤로 넘어졌다.


 
두근, 두근.

……살았다.

제 심장이 뛰는 소리인지, 일레온의 심장이 뛰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코끝에 닿는 익숙한 샌달우드 향기만이 눈을 감아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괜찮나?”

“으응.”

엘리시아가 그의 가슴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 일레온 당신은요? 괜찮아요?”

“멀쩡해.”

일레온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에 비하면 말이지.”

엘리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도망을 가?”

일레온의 붉은 눈동자에서 새빨간 불길이라도 솟을 것 같았다.


“아…… 하하.”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방금 뛰어내린 배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저기서 뛰어내렸단 말이야?’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일레온이 받아주면 뛰어내릴 수도 있을 것 같은 높이였는데, 절대 다시 기어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높았다.


‘도로 올라갈 수도 없고.’

왠지 도망치고 싶은 아슬아슬한 예감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딜.”

그런 엘리시아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일레온이 몸을 일으키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넌 기억을 잃은 게 아니었어.”

“당신은 기억을 잃어버렸잖아요.”

일레온의 눈썹이 불만스러운 듯 삐딱해졌다.


“그게 약속을 깰 이유가 되나? 결국 로나도 엘리시아도 내게서 도망쳤군.”

“미, 미안해요. 나는…….”

“사과받고 싶은 마음 없어.”

엘리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일레온이 지그시 얌전해진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옆에 있어. 엘리시아.”

일레온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내가 지켜줄게.”

“……그런 거 싫어요. 당신한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

그 말에 꾹꾹 눌렀던 눈물이 몸 밖으로 밀려 나왔다.


“나는 겁이 많아요. 무서워하는 것도 많고요.”

“나는 겁이 없으니까 괜찮아.”

일레온의 커다란 손이 머리에 얹혔다.


“나는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알아.”

“당신이 좋아하는 그 여자 아닐 수도 있어요.”

“상관없어.”

다정한 손길이 머리가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신전에서만 지내서 세상 물정도 잘 몰라요.”

“잘됐군. 나도 전쟁터에서만 살다가 눈을 뜬 지 얼마 안 됐으니. 같이 알아가면 되잖아.”

일레온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엘리시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찧었다.


“아야.”

“기어 올라갈 힘도 없으면서 저 위를 올려다보며 또 도망갈 생각이나 했겠지.”

“아니, 그런 게 아닌데.”

엘리시아는 쩔쩔매며 변명조로 대답했다. 그녀는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아서요. 당신이 좋은데, 그 감정을 지키는 데도 힘이 드는구나 하고.”

그러니까 마리엘라 앞에서, 소나텍의 방해 앞에 이렇게나 약해지는구나 하고 말이다. 엘리시아 자신은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약했다.

일레온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네 몫까지 충분히 강하니까 넌 약해도 괜찮아.”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그런 게 어딨어. 내가 싫어요.”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꼭 끌어안았다.


“자꾸 도망가려고 핑계 찾지 말란 말이야. 내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

그가 제 품 안의 엘리시아를 내려다보았다.


“난쿠 대륙으로 도망갔으면, 난 전쟁을 일으켰을 거야. 베르베를 벽돌 한 장까지 가루로 만들고 널 찾아내서 제국으로 도로 끌고 갔을 거야.”

“……농담이죠?”

“농담 같나?”

일레온이 피식 웃었다.


“궁금하면 한 번만 더 도망가.”

엘리시아의 몸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며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가 널 어찌하는지.”

일레온의 입술이 이마에, 콧등에, 코끝에 닿았다.

엘리시아의 입술에 제 것을 꾹 눌렀다 뗀 일레온이 그녀를 품에 안고 한껏 향기를 들이쉬었다.


“이제 살 것 같네.”

“나를 어떻게 기억했어요?”

“나침반 덕분에.”

일레온이 씁쓸하게 웃었다.

엘리시아가 그에게 작별을 고할 때, 일레온은 깊은 잠에서 깰락 말락 했다.

비몽사몽한 의식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레온. 나는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누구시기에 내게 이런 말을 하는가.


「나는…… 겁이 많아요.」

 
혼몽한 와중에 그녀의 말은 또렷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요.」

 
그런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에 그토록 심력을 뺏기고 있을까.


「그래서 미안해요. 잘 몰라서 미안해.」

 
일레온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

 
그녀가 마지막이라는 듯 이마에 입을 맞추었을 때, 퍼뜩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하아.”

그러나 환상이라도 본 것처럼 방 문은 닫혀 있고 주변은 조용했다.

달그락.

그때 그의 목에 매달려 있는 나침반을 발견했다.


「네가 가는 곳이 내가 가야 할 길이야. 그러니까 그대가 가지고 있어.」

「이제 우리는 어디든 항상 함께할 테니까.」

 
제가 맹세하듯 진심을 담아 했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침반.

이걸…… 엘리시아에게 주었었는데.

그 순간 무언가 속에서 금이 가는 파사삭 소리가 귀에 들린 것만 같았다.


‘……엘리시아!’

일레온은 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바로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하는 의식과는 달리, 엘리시아가 떠난 지도 한참 지난 후였다.

항구에 도착해보니 그녀가 탄 배는 이미 출항한 지 오래였다. 일레온은 잠시 해상길드에 몇 척인가 대공가의 배도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중 가장 날렵하고 빠른 배를 타고 엘리시아가 탄 배를 뒤쫓아 온 것이다.

그들이 해후하는 사이 엘리시아가 원래 타고 있던 배는 그새 꽤 멀어졌다.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선실로 끌었다.

고급스러운 가구로 꾸며진 선실에는 편히 쉴 수 있는 커다란 소파와 테이블, 술병이 든 유리캐비닛 따위가 놓여 있었다.

털썩.

반쯤 엘리시아를 들고 온 일레온은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먼 바다에서 달려와 두 사람을 할퀴어대던 바닷바람이 사라지자 엘리시아는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두근, 두근.

제 심장이 쿵쿵 거리는 게 배에서 뛰어내린 미친 짓 때문인지 일레온 때문인지 헷갈렸다.

엘리시아가 몸을 도로 일으켜 뭔가 마실만 한 게 없나 살피려 할 때였다.

그녀의 위로 그늘이 졌다.


“목이 마르…….”

일레온이 그대로 소파 위로 엘리시아를 내리눌렀다.


“흐읍.”

마음의 준비 없이 받아들인 일레온의 짙은 키스에 엘리시아는 금방 숨이 부족해졌다.


“이, 일레온.”

“목이 말라.”

그럼 물을 마셔야죠.

일레온은 엘리시아가 물이 솟는 샘이라도 된 듯 그녀의 입술을 차지했다.

목이 말라 바싹 말라 있던 입술이.

촉. 초옥.

질척하게 제 것을 휘감고 들쑤시는 일레온의 움직임에 점점 붉게 물들어 젖어 들었다.

푹신한 소파는 두 사람의 겹쳐진 몸으로 누르자 그만큼 움푹 팼다.

엘리시아는 그의 몸 아래 갇힌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정신없이 그녀의 입술을 물던 일레온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너무 진득해서 엘리시아는 두려웠다.


“무서워하지 마.”

일레온이 귓가에, 귓불에, 귀 뒤쪽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프게 하지 않을 테니까.”

“하윽.”

체온이 낮은 자리에 와닿는 일레온의 숨결은 훨씬 더 뜨겁게 느껴졌다.

엘리시아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전에 일레온과 키스할 때, 언젠가는 제가 그를 도발한 적도 있었다.


「겁을 내야 하나요? 제가 당신을요?」

「내가 덮칠 것 같으면 도망가라고 했잖아.」

「환영합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군. 공작부인께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당신이 어머니께 한 말을 지키지 못하면 비밀로 해줄게요.」

 
그랬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 몸을 타고 느껴지는 일레온의 열기를 보니 그때 그가 자신을 얼마나 봐준 건지 실감이 났다.

바닷바람 때문에 두툼하게 겹쳐 입은 옷 위로도 애가 탄 듯 돌아다니는 손길에 거침이 없었다.


“일레온. 잠깐만요.”

“못 참겠어.”

“여, 여기서……그럴 건 아니죠?”

겨우 그에게서 입술을 뗀 엘리시아가 긴장하며 묻자 그는 대답 대신 다시 키스했다.

배에서 내린 일레온이 엘리시아를 데려간 곳은 항구에서 가까운 여관이었다.

그 의도가 너무 완곡해서 그녀는 어쩔 줄 몰랐다.

엘리시아를 납치라도 하는 듯 넓은 어깨에 달랑 얹은 채 성큼성큼 복도를 걷는 일레온의 발걸음에는 한 점 망설임이 없었다.


“이, 일레온. 잠깐만요.”

엘리시아는 당황스러웠다.

오늘은 아니었다.

진작 일레온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내어준 몸이었다.

하지만 왠지 오늘처럼 많은 일이 일어난, 복잡한 날 이런 날 갑자기 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사이 둘은 많은 일을 겪었다.

대화.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서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몹시 서두르는 일레온은 몸으로 나누는 대화에 영혼을 판 것 같았다.


“왜? 이편이 더 빨라.”

아니, 그러니까 너무 빠르게 방으로 갈 필요는 없다고.

엘리시아는 말하고 싶었지만 몸이 흔들려서 혀를 깨물 뻔했다.

객실 문이 닫히자마자 일레온이 몸을 붙여왔다.


“으읍.”

아까 배 안, 선실에서 했던 키스는 장난이었다는 듯.

더 거칠고 뜨겁게 엘리시아의 입술을 눌러붙였다.


“아. 하아.”

“왜 이렇게 야한 옷을 입었어.”

밋밋하고 칙칙한 색의 로브를 더듬으며 일레온이 귓가에 속삭였다.


“어, 어디가 그렇다는 거예요? 이건 그냥 편하게 입으려던 건데.”

엘리시아는 지나치게 흥분하는 그를 보며 당혹스러웠다.


“벗기기 좋은 옷이잖아.”

다음 순간 허리를 동여맨 띠가 풀리며 헐거워진 로브가 단번에 어깨부터 발아래로 흘러내렸다.


“아.”

엘리시아는 소름이 돋았다.

맨 어깨가 드러나는 순간 일레온의 눈빛에서 뭔가 이성이 날아가는 걸 마주 보고야 말았다.

어둑한 방 안에서 붉은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사냥감을 멋대로 물어뜯으며 날뛰고 싶은 본능만이 남은 짐승처럼 보였다.

겁에 질린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그를 밀어냈다.

그런 자신의 행동이 일레온의 정염에 기름을 붓는 일인 줄 예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상상하지 못했다.

탁.

일레온이 저를 밀어내려는 그녀의 발칙한 손목을 붙잡아 양어깨 옆으로 벽에 눌렀다.

엘리시아는 날개에 핀이 꽂힌 나비라도 된 것처럼 바르르 떨며 그를 올려보았다.


“짐승을 길들일 때 수틀리면 물릴 수 있다는 걸 몰랐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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