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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네가 나를 원할 때 (78/151)


78. 네가 나를 원할 때
2022.10.01.



 
촛불이 꺼지자 엘리시아가 안심한 듯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이완시키는 게 보였다.


‘이게 뭐라고.’

오데르인 그의 눈은 밝든 어둡든 그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엘리시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가 보이지 않는 듯 꼼꼼히 살피는 걸 보니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그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진 건 그 직후였다.

일레온을 등지고 앉은 엘리시아가 옷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홀린 듯이 시선을 빼앗긴 그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젖은 채 몸에 감긴 얇은 천이 물 아래에서 흔들리며 떨어져 나가는 모습은 흡사 인어가 탈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늘고 굴곡 있는 몸에서 막 떨어져나온 허물이 물속에서 머리카락과 함께 흔들리다 하느작거리며 욕조 가장자리로 멀어져갔다.

엘리시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선에는 반듯한 직전이 하나도 없었다.

부드럽게 흐르는 어깨로부터 팔, 그 옆으로 옆구리에서 허리로 떨어지는 고운 선이 아쉽게 물 아래로 사라졌다.


“일레온? 당신도 편하게 씻어요.”

엘리시아가 몸을 제 쪽으로 돌렸을 때 일레온은 겨우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

“옷을 벗어야 씻죠.”

이 어둠이 뭐라고 그리 안심한단 말인가.

일레온은 물을 가르며 제 쪽으로 다가오는 엘리시아를 보았다. 태어나서 눈으로 본 것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풍성한 금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몸을 보일 듯 말 듯 가리고 있어 그를 애태웠다.

당장이라도 머리카락을 한데 걷어 쥐고 엘리시아를 끌어안고 싶다.

하지만 이대로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아슬아슬한 달콤함을 조금 더 느끼고 싶기도 했다.

한번 무너진 성역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의 비밀을 전부 다 온전히 제 것으로 하고 싶은 열망이 잠시 그를 참게 했다.


“내가 벗겨줄까요?”

엘리시아의 손이 제 가슴을 더듬는 감각에 더는 참기가 힘들었다.


 
촤악.

그가 몸을 일으켜 엘리시아를 덮치는 서슬에 욕조의 물이 거하게 흘러넘쳤다.


“하, 아으.”

갑자기 그에게 꽉 끌어안긴 엘리시아가 밭은 숨을 쉬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일레온. 나 너무 놀라서…….”

옷을 벗지도 않고 욕조로 들어온 건 서둘지 않기 위함이었다.

엘리시아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데, 부드럽게 할 자신도 없었다.

일레온은 오래 참았고, 그의 욕망은 일부 비틀려 있었다.

암시에 자아가 억눌려 있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일레온은 똑똑하게 기억했다.

카리나에게 구애하는 저를 보며 도망갈 속셈으로 모른 척했던 엘리시아.

그래놓고 남몰래 둘의 추억이 가득한 막사에 웅크리고 앉아 퉁퉁 부은 눈가를 한 채 울고 있던 엘리시아.


“그 저주 때문이야.”

엘리시아는 거듭 그에게서 달아났고, 때론 눈앞에서 그를 아무렇지 않게 모른 척했으니까.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다시는 그를 모른다 말 할 수 없게.

엘리시아를 저만 아는 곳에 가두어두고 싶거나, 할 수 있다면 통째로 제 배 속에 삼키고 싶거나.

예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에 온통 그만이 가득 차도록 가까이에서 마주 보며 그녀에게 자신을 쏟고 싶다.

엘리시아가 나쁜 거야.

그를 금단 증상으로 허덕이게 만들면서 순진한 얼굴로 단추나 풀어줄까 하는 그녀가 잘못이다.


“일레온. 으읏.”

욕조 테두리에 몰아 붙여진 채 엘리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제 이름은 가냘프고 달아서 귓가에 질척이는 꿀이라도 바른 것 같았다.

일레온은 한참 동안 엘리시아에게 상상하던 욕심을 채웠다.


“하아.”

짙은 키스 탓에 숨을 몰아쉬는 엘리시아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를 피하지 않았다.


“일레온.”

오히려 일레온의 입술 자국이 얼룩덜룩 남은 몸으로 슬쩍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나 당신이 정말 좋아요.”

일레온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기민한 감각이 무장해제 되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좋아해.”

그녀의 애정이 담뿍 느껴졌다. 엘리시아가 포옥 한숨을 쉬었다.


“이러기 전에 먼저 말하고 싶었는데. 나도 당신이 좋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차마 수줍어 입에 담지 못하고, 이렇게 빙글빙글 돌려 말하다니.

그런 모습마저 너무 사랑스러워서, 일레온은 기절할 것 같았다.

엘리시아는 그에게 시달린 것이 힘들었는지 늘어진 채 여전히 그의 품이었다.


“엘리시아. 이제 해도 돼?”

긴장한 마음으로 묻자 엘리시아는 허락 대신 입을 다물었다.

어깨를 웅크린 여자의 침묵이 길어지자 일레온은 물에 잠긴 채로도 입술이 마르는 게 느껴졌다.


“널 다시는 놓고 싶지 않아.”

한참 전부터 참고 있던 제 몸이 한계에 다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였냐면.

로나가 둘이 산책하던 후원에서 밤바람보다 산들산들한 손길로 작은 꽃을 꺾어 제게 쥐여줬을 때부터.

아니면 무도회에서 로나가 아닌 척하던 엘리시아의 흰 장갑을 낀 손이 제 손 위에서 긴장으로 떨리는 걸 봤을 때부터.

그도 아니면 카리나의 손등에 입맞추는 저를 보고도 태연히 차를 권하고 사라졌을 때부터였을까.


“너도 날 바랐으면 좋겠어. 엘리시아.”

확실한 말이 필요했다. 폭주하듯 달려드는 자신을 애정해서 밀어내지 못해 마지못해 안아주는 게 아니라 그녀도 일레온 그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그다음엔 아무리 싫다고 밀어내도 끝의 끝까지 봐주는 일이 없을 거라는 까만 속내는 지금은 뒷전이었다.


“나는…….”

엘리시아는 그의 말에 주저하며 눈을 피했다.


“오늘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일레온은 제 귀를 의심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허락의 말 대신 엘리시아는 선을 그었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되는데?”

일레온은 혈기왕성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엘리시아에게 양심이 있다면 정상참작을 해줘야 하는게 아닐까.


‘……울면서 도망가려나.’

그는 갑자기 울적한 기분이 되었다.

일레온이 꽤 오래 지냈던 사관학교도 그렇고, 전쟁터에서도 온통 한창 나이의 사내들뿐이다.

그러니 무용담처럼 지껄이는 음담패설을 귀가 썩을 정도로 들어왔고, 가는 곳마다 여심을 훔친다는 놈들이 여인을 기쁘게 하는 법이라며 떠들어 대는 걸 원치 않아도 몇 가지는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들이 말하는 ‘기쁘게 하는 법’의 레퍼토리가 늘 같았기 때문이다.

프러포즈 반지에 이어 음탕한 이야기를 지껄이는 놈들 역시 일레온은 뇌가 하체에 달린 머저리들이라고 생각했다.

일레온에게는 그런 것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엘리시아를 마주하면 손이, 몸이, 입술이 저절로 그녀를 향했다.

그 일은 자연히 일어나는 일이니, 배우고 익혀서 되는 게 아니라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였다.

……라고 일레온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니었으면 하는 이유가 뭔데?”

일레온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엘리시아가 지금 그의 옆에 있어도, 그의 품에 안겨 있어도 다시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아 불안했다.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어요.”

엘리시아는 목소리가 잔잔한 수면 위로 퍼졌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걸 물어보거나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마리엘라는 살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했다. 시키는 대로 외운 대로 말해서 들어간 하듄샤에서는 신관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했다.

내 생각. 내 자아. 내 기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엘리시아가 살아온 시간은 무언가를 위해 목적을 가지고 맞춘 행동과 일상이었다.


“일레온. 당신은 내가 처음으로 마음에 담아 본 것이에요.”

좋아하는 사람의 범주는 좁다. 엘리시아의 세상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제일 먼저 제 마음에 넣어본 것. 그녀에게 일레온은 그런 존재였다.


“오늘이 아니었으면 하는 건. 아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잖아요.”

해결할 일이 첩첩이 남아 있었다.

일레온을 떠나야만 했던 건 그의 탓이 아니라 엘리시아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내 몫까지 강하니까 괜찮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 알잖아요? 내가 변해야 해요.”

“엘리시아.”

“나는 변하고 싶어요.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게.”

조용조용 욕실에 울리는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간절했다.


“당신을 다시 떠나야 하는 일이 없게.”

“하아.”

일레온은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는 엘리시아에게 약했다.

진작 그녀에게 목줄이라도 잡혀버린 것 같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원하는 일을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알았어.”

수긍하는 말 한마디에 물에 젖어 아슬한 실루엣을 보이던 여자가 안도하는 낯을 했다. 엘리시아가 이렇게 순진한 얼굴로 말간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고문관이 따로 없었다.


“대신 약속해.”

“뭘요?”

“네가 나를 원할 때는 참지 말고 바로 말해야 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 엘리시아를 보니 일레온은 몸의 어딘가로 더욱 피가 몰렸다. 하지만 기왕 참아보는 김에 조금 더 그녀에게 점수를 따기로 했다.


“서둘지 않아도 괜찮아.”

“…….”

엘리시아는 뭔가 불만스러운 듯 물 아래로 몸을 낮추고 입으로 뽀글뽀글 거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왜 그래?”

“당신이 하고 싶은 거. 나도 해주고 싶었어요.”

일레온은 그 말에 일시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널 가지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어?”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잘 하고 싶으니까. 제대로 하고 싶어서.”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끌어안았다.

황홀하게 가슴에 닿아오는 촉감도, 부드럽고 따뜻한 엘리시아의 입술도.

그녀의 진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엘리시아의 마음이 제게 있기에 달려오는 소소한 기쁨일 뿐.


“엘리시아. 이건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많은 일 중의 하나일 뿐이야.”

일레온은 마음을 다잡았다.


“난 너와 모든 걸 함께할 거야.”

“좋……아요. 같이 해요.”

엘리시아가 품에 머리를 기댔다. 점점 눈커풀이 무거운 듯 멍한 얼굴을 하더니 곧 눈을 사르르 감았다.


“잠이 오나.”

“응…….”

“이대로 자면 감기 걸려.”

일레온은 잠시 엘리시아를 내려놓고 먼저 욕실을 빠져나왔다. 젖어버린 셔츠와 바지를 벗고는 물기를 닦지도 않고 대충 가운을 꿰어입었다.

다시 욕실로 들어간 일레온은 커다란 수건으로 따뜻한 물에 잠겨 있던 엘리시아를 감쌌다.

이미 눈을 감고 졸고 있던 그녀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계속 잠을…… 못…… 자서.”

“대공저에서? 왜?”

“당신을…… 모른 척 하는 거 힘드니까.”

침대에 눕힌 채, 물기를 닦아주고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꾹꾹 감싸 말려주자 엘리시아가 졸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졸리면 자. 그만 떠들고.”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듣기 좋으면서도 일레온은 잔소리를 덧붙였다. 그녀가 다시 제 영역 안으로 들어온 걸 이렇게라도 확인하는 게 미칠 듯이 좋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 시중들어준 적 없죠?”

“처음이야.”

“근데 왜 잘해요?”

“몸으로 하는 일은 다 잘하는 편이니까.”

“……부럽다.”

엘리시아는 반쯤 잠꼬대를 하듯이 웅얼거렸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

“실망하게 한 거 같아서요.”

“그럴 거 없어. 나중에 배로 받아낼 거야.”

“나는 갚을 게 없는데.”

비몽사몽한 와중에 계속 대답하는 엘리시아가 엉뚱해서 일레온은 혼자 미소지었다.


“잠깐만 일어나 봐. 옷은 입고 자야지.”

몸에 수건을 둘둘 만 채 침대 위에 흐트러져있는 엘리시아는 온몸을 깨물고 싶은 충동을 일어나게 했다.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 잠옷을 입혀주려던 일레온이 일순 엘리시아에게 끌려갔다.


“이대로 안고 자고 싶어.”

일레온은 잠시 생각의 흐름이 끊겼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은 엘리시아가 잠투정인 듯 일레온의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약속을 지킬 테니까. 이렇게 자도 괜찮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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