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 내 걸 내가 갖겠다는데 (79/151)


79. 내 걸 내가 갖겠다는데
2022.10.05.



“이대로 안고 자고 싶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은 엘리시아가 잠투정인 듯 일레온의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약속을 지킬 테니까. 이렇게 자도 괜찮잖아.”

엘리시아는 그 말을 끝으로 새근새근 고른 숨을 쉬며 온몸을 늘어트렸다.

반면 일레온은 몸 중앙의 심지에 성냥을 그어 불을 붙여버리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전신에 열이 돌았다.


“……엘리시아.”

일레온은 다급하게 막 잠이 든 엘리시아를 흔들었다.


“엘리시아. 자면 안 돼. 잠깐만 일어나 봐.”

엘리시아가 차분히 전한 간절한 바람에 화답하느라 겨우 잠재웠던 몸이었다. 그 안쪽부터 견딜 수 없는 무언가가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엘리시아. 눈 좀 떠봐.”

“으응.”

그가 아무리 성가시게 굴어도 엘리시아는 요지부동이었다.


“하아.”

일레온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진짜 얄미워서 어떡하지.”

이럴 거면서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둥, 옷을 벗겨주겠다는 둥 사람을 들었다 놨다 했단 말인가.


“엘리시아.”

일레온은 수건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매끈한 다리가 손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그것을 살살 어루만지며 일레온은 엘리시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게 말할 때 일어나는 게 좋을 거야.”

어느새 그는 눈빛도, 목소리도 탁해졌다.


“내 걸 내가 갖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그대의 불명예는 공작부인께만 비밀로 해주면 된다 하였으니. 갑자기 말을 바꾼 건 그대인 걸.”

일레온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이 엘리시아가 예민한 귓가에 닿았다.


“으…….”

잠든 것 같던 엘리시아가 작은 소리를 냈다.

미동도 하지 않고 꿀잠을 잘 것 같던 여자가 제 행태에 신호를 보내오자 일레온은 집요해졌다.

엘리시아에게 구석구석 입을 맞추자 잠잠하던 몸이 점점 움찔거렸다.


“……이, 일레온.”

잠에 취한 보랏빛 눈이 혼몽한 채 자신을 올려다보자 일레온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엘리시아. 잠깐 얘기 좀 해.”

겨우 몇십 분 전에 그녀의 확실한 말 한마디를 듣고자했던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엘리시아가 아무런 상식 없이 놀라기라도 할까 봐 나름대로 배려를 해주려고 한 건데 제 발등을 자신이 찍었구나 미칠 듯이 후회됐다.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품에 안고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잠이 완전히 깬 게 아니었는지 눈을 깜빡깜빡하다 그대로 그의 팔 안으로 쓰러졌다.


“눕지 말고. 응? 일어나 봐.”

“흐응.”

잠이 와서 짜증이 났는지 엘리시아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 순간 일레온은 잠시 심장이 따끔거렸다.


‘하. 이럴 때 쓸데없이 예뻐 가지고. 미치겠네.’

그는 엘리시아를 다시 침대에 눕혀주고 성가시게 굴기 시작했다.


“흐읏.”

예민한 자리를 한참 건드리자 엘리시아가 잠이 깬 것 같았다.


“일레온?”

“엘리시아. 지금.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일레온은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어서.”

고통스러웠다.

천상의 미인이 나태하게 눈앞에서 자신을 유혹하는데 안을 수가 없다니.

그는 자신이 그리 욕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남자들만 모인 병사들 사이에서 종일 여자를 안는 이야기 따위나 하는 놈들을 보면 뇌가 없고 근육으로 들어찬 놈들이 아닌가 우습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레온 역시 지금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엘리시아를 안고, 한데 구르고, 구르고 또 굴러서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고 싶은 그런 생각.


“이리 와요.”

그런 일레온에게 여자가 순진한 몸짓으로 팔을 뻗었다.


“엘리시아.”

일레온은 주체할 수 없는 욕구로 몸이 떨렸다. 그 몸으로 엘리시아를 짓누르자 답답하지도 않은지 그녀가 그를 그대로 꽉 안아주었다.

하얗고 자그마한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착하지.”

그의 목덜미, 어깨, 단단한 등 아래로 타고 내린 손이 탄탄한 등허리에 닿은 때.

일레온의 눈앞에서 벼락같은 불이 튀었다.

***

유테르 공작 저는 지은 지 꽤 오래된 건물이었다.

꾸준히 외관에 우윳빛 회반죽을 발라 보수하고 관리하는 커다란 저택 둘레로 넓게 자리한 정원 ‘유테르의 낙원’과 조화롭게 어울려 더욱 환하고 우아해 보였다.

그러나 오늘 밤, 저택은 평소와 달리 불도 꺼져있고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공작가의 안주인, 마리엘라 유테르가 항구에서 기절한 채 공작저로 실려 온 지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인. 이제 좀 정신이 드시오?”

겨우 의식을 회복한 마리엘라는 질리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여보. 아…… 아흐흑…….”

질리언의 얼굴을 보자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목을 조르기라도 한 듯 울음소리만 흘러나왔다.

그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외국으로 떠나고자 한 건 오직 자신과 딸아이를 위해서였는데.

남편의 인생은 자신과 결혼을 해서 꼬여버렸다.


‘질리언. 우리가 그토록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시아를 구하지 못했어요. 그 아이의 운명이 바다에 수장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데. 우리는 이제 어떡하죠?’

 
너무 끔찍해서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통스러워하는 마리엘라를 보고 질리언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겠소. 마리엘라.”

“아아…….”

“잠시 쉬도록 해.”

질리언은 염려를 담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편의 눈가도 붉게 부어 있었다. 그것을 본 마리엘라의 뺨을 타고 굵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질리언이 방 문을 닫고 나가자 그제야 한을 담은 목소리가 입밖으로 굴러 나왔다.


“소나텍. 내 손으로 널 죽일 거야.”

진작 그랬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엘리시아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리엘라가 소나텍을 죽음으로 모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던 건 가진 능력으로 인한 불리한 것도 있지만, 그와 똑같은 인간이 되기 싫다는 혐오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을 우습게 아는, 살인 따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파렴치한.

그리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열한 인간.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 것이다.

소나텍을 상대하려면 결국 엘리시아를 똥물 속에 집어넣어야 하는 셈이었으니까.

자신은 그저 치밀하게 계획해서 원작 밖으로 나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시아와 자신이 원작 밖으로 사라지면 소나텍이 더 이상 집착할 이유도, 간섭할 수도 없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마리엘라의 오판이었다.

소나텍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악독하고 비열한 심성이었으니.

진짜 소나텍을 마지막으로 본 건 20년도 더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가 이럴 줄 몰랐다.

왜냐면 소나텍은…….

탁.

방 안을 은은하게 밝히던 촛불이 일시에 꺼졌다.

스윽, 스윽.

푹신한 카페트 위로 뭔가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리엘라가 누워 있는 침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윽고 검은 로브를 입고 검은 머리카락에 가면으로 얼굴 위쪽 반을 가린 사내가 마리엘라의 지척에 멈춰 섰다.


“이런. 울고 있었나.”

“너…… 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마리엘라는 격분하여 이불을 걷어치우고 벌떡 일어났다.


“왜? 이 세계 안에서 내가 갈 수 없는 곳 따윈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여기가 어디라고 내가 못 올 거로 생각했나.”

공작부인의 방 곳곳을 유심히 이리저리 둘러보던 소나텍의 눈이 몸매가 드러나는 얇은 모슬린 잠옷을 걸친 마리엘라를 훑었다.


“그런 차림새는 또 처음 보는군.”

“닥쳐.”

“한 바퀴 돌아보지.”

마리엘라는 그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올렸다 내리쳤다.

하지만 허망하게 손목을 붙잡혔다.


“아직 기운이 있군.”

소나텍이 여상하게 말했다.


“원작을 수정했거든. 딸의 죽음을 알고 네가 미쳐버렸다고 말이지.”

가면 아래에서 움직이던 입술이 히죽 웃었다.


“아, 아직 살아 있나. 하긴. 배가 침몰하고 그 소식이 네게 닿을 정도가 되려면 내일 오후? 그쯤은 되어야 할 거야.”

“아악!”

마리엘라는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엘리시아를 살리고 싶나?”

흐느끼며 흔들리던 마리엘라의 어깨가 멎었다.

불신을 가득 담은 보랏빛 눈동자가 엉망으로 흘러내린 꿀 같은 금발 머리카락 사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볼 것 없어. 방법이 없지 않다는 거 알고 있잖아.”

마리엘라는 이를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악물었다.

소나텍은 몸을 돌려 침대 근처에 놓인 일인용 카우치 소파에 기대듯 거만하게 앉았다.


“나를 기쁘게 해봐.”

그는 마리엘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면 내게 자비를 구걸해보든가.”

“…….”

소나텍의 목소리는 단조로웠지만 금기를 망설이는 인간의 귀엔 더없이 유혹적이었다.


“그럼 엘리시아를 여주로 만들어주지. 일레온의 짝으로.”

침묵이 흘렀다.

마리엘라의 눈물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너, 너도…… 좀 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잖아.”

“그랬지.”

“여긴 책 속 세계가 아니야. 너도 알고 있잖아. 모두…… 진짜로 살아 있다는 거.”

“그 얘길 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인데.”

“넌 잘못됐어.”

그 말에 가면 너머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소나텍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내가 잘못됐다고? 네가 잘못됐지.”

“그래. 내가 잘못했다 쳐. 엘리시아는 무슨 죄야.”

“하. 엘리시아가 무슨 죄냐고? 그걸 몰라?”

소나텍은 어이가 없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 소릴 다른 빙의자들 앞에서도 해보든가. 우리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건 모두 네 탓인데.”

“…….”

“화풀이하는 게 잘못인가? 하듄샤에서 엔딩만 기다리는 멍청이들이 이 사실을 알고도 너나 엘리시아를 가만둘 것 같아?”

소나텍이 집요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원윤지. 너 괴롭히는 거 아니면 아무것도. 이 세계에 재밌는 게 없는 걸 어떡해. 집에도 갈 수 없는 마당에 말이지.”

“미친 새끼.”

소나텍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휘두르자 커다랗고 시커먼 덩어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쿵, 쿠궁.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건 따개비가 다닥다닥 들러붙은 물에 젖은 두꺼운 나무판이었다.

바닷물에 오래 잠겼던 것으로부터 비릿한 냄새가 올라와 마리엘라의 코에 닿았다.


“이……이게…….”

“네 딸이 탄 배 밑창에서 뜯어왔어. 침몰은 확실한 게 좋으니까.”

마리엘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엘리시아가 무슨 죄냐고? 네 딸인 죄지. 네 그 알량한 사랑의 증거로 태어난 죄.”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떠는 마리엘라를 보며 소나텍은 조소했다.


“네가 정해. 질리언마저 사지로 몰아넣을지. 아니면 남편마저 딸 곁으로 보내고 나서 후회할지.”

“아아악!”

마리엘라는 소나텍에게 달려들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푸욱.

소나텍의 심장에 칼을 꽂은 마리엘라가 부들부들 떨며 그를 노려보았다.


“죽어. 죽어버려. 정말…… 네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제 가슴에 꽂힌 칼을 내려다본 소나텍이 고개를 들어 마리엘라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도 네가 그러하길 바라. 나 아니면 너. 우리는 한 세계에서 함께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으니.”

소나텍이 비스듬하게 입술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우리가 한배를 탈 수 없게 만든 건 윤지 너야. 질리언을 선택한 너.”

“꺼져.”

마리엘라가 더욱 깊게 칼을 밀어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나텍의 몸에서는 피가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피부가 점점 빛을 잃고 회색이 되어가더니, 점점 온몸이 잿가루가 된 것처럼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그가 머물렀다 사라진 자리에는 검붉은 핏방울 같은 돌이 하나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수명을 다하기라도 한 듯 금이 가며 쪼개지더니 재로 변해 흩날리듯 사라졌다.


“으아아아!”

절규하며 눈물을 흘리자 침실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질리언이 들어왔다.


“부인. 진정해요.”

“질리언. ……미안해요.”

모든 것은 마리엘라, <눈먼 짐승의 꽃> 세계에 빙의한 원윤지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이 세계의 여주, 일레온의 짝이었던 엘리시아.

딸의 운명을 수정한 건 마리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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