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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너도 달아 (80/151)


80. 너도 달아
2022.10.08.



 
모든 것은 마리엘라, <눈먼 짐승의 꽃> 세계에 빙의한 원윤지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책에 실린 이야기는 모든 것이 명확했다.

과거, 현재, 미래.

이야기의 서사는 숲속에 난 샛길과 같았다. 나무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일 듯 말 듯 한 길을 더듬어 따라가다 보면 길은 확실히 존재하고 지나온 자리와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인다.

무엇이 영향을 주어서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근거.

책 한 권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누군가의 인생의 시작이고 끝이었다.

처음 <눈먼 짐승의 꽃> 이야기 속에 들어왔을 때, 윤지는 혼란스러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의식에 새겨진 신탁 한 줄만이 엔딩을 보면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일이 쉬울 리는 없었지만, 윤지는 차츰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로 상상해서 지어냈다고 생각하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어딘가의 세상이었고, 우연히 자신을 통해 원래 세계의 책으로 그 일부가 쓰여졌다는 걸.

윤지가 쓴 책 <눈먼 짐승의 꽃>은 두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이곳이 책 속의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걸 인정하고 나서야 마음이 열렸다.

두 번째 삶을 온전한 인생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마리엘라는 운명처럼 질리언을 사랑하게 됐다. 그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깊은 마음을 품었다.

소나텍은 마리엘라의 그런 선택을 우습게 여겼고, 그녀는 그가 몹시 불편했다.


「결혼을 한다고?」

「응.」

「왜 굳이? 하지 마.」

「할 거야. 그리고 행복해질 거야. 이 세계의 일부로서.」

 
그녀의 말에 소나텍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비웃었다.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해?」

「왜 그런 눈으로 봐?」

 
불쾌해진 그녀가 묻자 그는 설렁설렁 대답했다.


「아니, 어차피 원래 세계로 돌아갈 때 버려질 것들에 의미 부여하는 네가 너무 한심해서.」

 
소나텍이 한 말은 두고두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끝이 난다고?’

스무일곱 해를 원윤지로 살았고, 어린아이의 몸에 빙의해 열일곱 해를 마리엘라로 살았다.

두 삶은 완전히 다른 배경과 의미를 가졌고 비교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전생의 기억으로 실감이 멀어진 윤지의 삶보다, 지금 마리엘라 그녀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는 질리언이 함께 있는 이 삶이 좀 더 생생하고 소중했다.

그녀는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빙의할 때부터 마리엘라가 지니고 있던 아티팩트였다.

작가의 펜.

아직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지만 사용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고민을 끝낸 어느 날, 마리엘라는 하듄샤로 향했다.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수장고.

그 안에는 예언서로 불리는 <눈먼 짐승의 꽃> 필사본이 놓여 있었다.

빙의자들의 모임이나 다름없는 하듄사의 중앙에서 마리엘라는 목걸이에서 펜을 불러내었다.

<눈먼 짐승들의 꽃> 작가인 원윤지에게만 주어진 능력.

원작 수정.


‘돌아가지 않을래.’

마리엘라의 손에서 황금빛 깃펜이 형형하게 빛을 발했다.

하지만 어디를 고칠지 깊게 생각하고 온 건 아니어서 마리엘라는 잠시 주춤했다.

곧 그녀가 허공에 펜을 긋는 대로 책의 글자가 뜯겨 올라와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글자가 빈 공간에 차곡차곡 내려앉았다.

여주를 여조와 바꾸면 된다.

그것만으로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체가 완전히 반대로 바뀌는 셈이니까.

그러면 원작 엔딩은 영원히 오지 않게 될 것이고 질리언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

사랑에 눈이 먼 그녀의 욕심과 치기가 부른 작은 수정.

마리엘라는 자신이 큰 잘못을 한다는 생각도, 죄책감도 없었다.


「여기는 진짜 살아 있는 세계야. 정말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태어나지도 않은 주인공의 엔딩을 기다리는 게 말이 돼?」

 
남주는 태어났지만 여주는 아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게으르게 허송세월하며 신전에 의탁하고 있는 다른 빙의자들을 정신 차리게 할 한 방이라 생각했다.

질리언과 결혼하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제가 낳은 딸이 뒤바뀐 운명으로 여주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망 캐릭터가 되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다시 숨겨두었던 아티팩트를 찾았을 때 그것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느새 소나텍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그날부터 마리엘라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소나텍은 이미 미쳐 있었다.

이 세계의 신좌를 노리는 악역.

최악의 배후.

원래는 없었던 이 세계의 흑막.

그런 줄도 모르고 그가 손을 뻗지 않을 원작 밖으로 나가면 된다고 생각한 자신이 바보 멍청이였던 것이다.


“나 때문에 엘리시아가 죽은 거야.”

축복받고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엘리시아가 도피의 삶으로 불행하게 지내다가 끝내 이런 죽음을 맞은 건 전부 자신의 탓이었다.


“으흐흑. 소나텍. 넌 꼭 내 손으로…….”

그리고 나도.

마리엘라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일차원적인 복수를 다짐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소나텍은 결국 그녀를 싸움판 위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다시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 피를 보지 않고는 끝나지 않을 일이 있었다.

마리엘라는 긴 밤 내내 슬피 울었다.

공작저의 밤이 깊도록 복도를 울린 건, 자식을 잃은 어미의 울음소리였다.

***

엘리시아는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났다.


‘이렇게 자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일레온의 집에서 납치당한 후 지금까지 쉬거나 제대로 잠든 적이 없었다.

한동안은 마비독을 해독하느라 죽은 듯이 잤지만, 그건 잠이 든 게 아니라 몸이 버티지 못해 기절한 것에 가까웠다.

그 뒤로는 일레온을 모른 척 한 것 때문에 괴롭고 힘들어서 밤마다 뜬 눈으로 지냈다.


‘일레온.’

어제 그가 자신을 데리러 와주어서 너무 기뻤는데.


‘내가 거기서 어떻게 뛰어내렸는지 모르겠어.’

사실은 엄청난 높이였는데.

그 순간을 떠올리자 발 밑이 휑한 느낌이 들면서 사각거리는 얇은 이불이 기분 좋게 감겨 있던 다리가 저렸다.


“으.”

엘리시아가 몸을 움츠리자 일레온이 그녀를 꽉 안아주었다.


“일어났나?”

“헉.”

눈을 뜨자 포근하게 베고 누워 있던 것이 그의 팔이었다. 코앞에 보이는 일레온의 목울대에 엘리시아는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네. 당신도 잘 잤어요?”

부끄럽지만 겨우 건넨 말에 그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니.”

응? 일레온이 왜 이러지?


“난 한숨도 못 잤어.”

“왜요?”

“왜라고? 어젯밤 일을 기억 못 하는 건가?”

“어제요? 어제…….”

일레온이 그녀를 바랐지만 엘리시아는 해결되지 않아서 끙끙거리며 안고 있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너그럽게 그녀를 이해해 주었다. 기뻐하다가 욕조 안에서 일레온에게 기대 잠이 든 것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음. 기억이 나는데요. 욕조에서 잠이 든 것까지는.”

“욕조? 기가 막히는군. 그대가 내게 한 짓을 모두 잊었나.”

내가 무슨 짓을 했지?

하듄샤에서는 내내 혼자 방을 썼기 때문에 엘리시아는 자신이 잠버릇이 고약한지 그런 건 알지 못했다.


“나를 농락해놓고 기억도 못 하다니.”

억울해하는 일레온의 귀가 붉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본 엘리시아는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내가 일레온을 덥쳤나?’

그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은 안 된다고 해놓고 잠결에…… 그를 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레온의 몸은 아름다웠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목, 어깨, 가슴에서 배로 이어지는 근육을 구경해버린 엘리시아는 안본 척 하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황급히 거울 앞으로 간 엘리시아는 잠옷의 끈을 풀고 어깨를 내려 왼쪽 등을 비추어 보았다.


‘휴. 이게 있는 걸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걸 텐데.’

일레온이 왜 저러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꺅.”

불시에 뒤로 다가온 일레온이 엘리시아를 안고 도로 침대로 끌고갔다.


“일레온. 으응.”

입술을 맞댄 남자는 금방 질척하게 숨을 엮었다. 아침에는 가벼운 키스만 하는게 보통이지 않나? 찬란한 아침볕 아래에서 제게 애정을 퍼붓는 일레온은 근사했고 그의 표정, 속눈썹 하나까지 너무 잘 보였다.


‘그러면 일레온도 내가 잘 보일 텐데.’

제대로 빗질도 하지 않고 잠든 머리는 엉망이었다.


“잠깐만. 그만해요.”

엘리시아가 그를 밀며 몸을 옆으로 돌리자 일레온이 등에 자리한 꽃송이 같은 반흔에 입을 대었다.


“이게 그건가? 신관들의 몸에 있다는 반흔.”

“흑.”

느른하게 입술로 그 자리를 문지르는 감각에 엘리시아는 등줄기가 오싹했다.


“내가 뭘 어쨌길래 그래요? 나 놀리려고 거짓말하는 거죠?”

엘리시아가 따지자 일레온이 한숨을 쉬었다.


“그대는 나를 쓰다듬었어.”

뭐라고?


“어린아이처럼 달래주었지.”

엘리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강아지가 되기라도 한 기분이었어. 아. 개새끼란 뜻은 아니고.”

도대체 일레온이 한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뭔가 지은 죄가 있는 듯한 기분 탓에 일레온에게 한참 동안 입술을 깨물린 후에야 침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

일레온과 엘리시아는 항구 근처의 시장을 구경했다.

여관에서 아침식사를 하지 않고 일부러 엘리시아를 데리고 나온 일레온은 연신 입을 벌리고 신기한 듯 상인들을 구경하는 그녀를 보고는 흐뭇한 얼굴을 했다.

그중에 달콤한 꿀 향기를 내뿜으며 긴 막대에 커다란 사탕을 도르르 말아주는 노점 앞에서는 한참 동안 그것을 구경하느라 움직이지 못했다.


“사줄까?”

엘리시아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다.”

꿀같이 진한 금발 머리카락의 아가씨가 주먹만 한 호박색 사탕을 들고 있는 걸 보고 지나는 이들이 ‘요정 같다’고 소곤거렸다. 엘리시아의 눈은 사탕 가운데에 들어 있는 빨간색 꽃에 고정되어 있었다.


“먹기 너무 아깝네요.”

“사탕은 그냥 두면 끈적해지면서 녹아버려.”

살짝 혀를 대어 단맛을 본 엘리시아가 해맑게 웃었다.


“엄청 달아요.”

일레온은 엘리시아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너도 달아.”

 

 
얼굴을 붉힌 채 펄쩍 뛴 엘리시아에게 혼이 나고도 일레온은 뭐가 좋은지 연신 웃는 낯이었다.


“무슨 고민이 있어?”

엘리시아가 아침 식사를 하러 앉은 식당에서도 내내 손에 든 사탕을 보며 멍하니 있자 일레온이 물었다.


“휴. 엄마가 뭐라고 하실지 걱정돼서요.”

마리엘라를 생각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같이 가 줄게.”

엘리시아는 고개를 들어 일레온을 보았다.


“그래서 만약에 화가 난 공작부인께서 혹시 또 배에 너를 묶어서 태우신다면, 나도 그 배에 타도록 하지.”

“푸훗.”

아침에 머리를 감고 따로 손질하지 않은 일레온의 앞머리는 부스스하게 내려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랑 조금 달리 좀 더 자유분방해 보였다. 그 아래로 붉은 눈동자가 따스한 온기를 싣고 자신을 보자 엘리시아는 어떻게든 될 것 같은 근거 없는 용기가 솟았다.


“좋아요. 그럼 우리 아침 먹고 바로 부모님을 뵈러 가요.”

“그래. 결혼 허락도 그 자리에서 받을 수 있겠나.”

“추천하는 건 아니에요. 분명히 화내실 거라고요.”

일레온과 엘리시아는 사이좋게 따끈한 수프와 빵을 먹었다.

언젠가 대공저에서 늘 함께하던 아침식사가 떠오르는 평온한 시간이었다.

그것이 폭풍 전야와 같은 고요함이라 할지라도 둘은 잠시 오붓한 한때를 즐겁게 보냈다.

하지만 유테르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본 마리엘라의 반응은 둘 다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엘리시아!”

마리엘라가 통곡하며 딸을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 것이다.


‘아직 구혼장을 보여드리지도 않았는데.’

일레온이 입술을 벙긋거리자 엘리시아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꺼내지 마세요.’

엘리시아는 좀체 진정하지 않는 엄마의 등을 다독였다.


“죄송해요. 엄마.”

“으흐흑.”

마리엘라는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마리엘라가 지난 스무 해 동안 그녀를 원작 밖으로 내보내려 애쓴 날들이 얼마인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일레온과 함께 하겠다며 출발한 배에서 내려 되돌아온 걸 마리엘라가 어찌 생각할지는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엄마. 저는 일레온이랑 함께 행복하고 싶어요.”

지금이니까.

일레온이 곁에서 그녀를 지지해주니까 처음으로 제대로 마리엘라에게 말할 수 있었다.


“저 여주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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