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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한 번 더 해도 되나? (81/151)


81. 한 번 더 해도 되나?
2022.10.12.



 


“저 여주가 되고 싶어요.”

엘리시아는 떨리는 마음으로 말했다.


“뭘 걱정하시는지 알아요. 엄마가 절 위해 그동안 애쓰신 것도 알아요.”

그래도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

누구의 옆에서, 누구의 손을 잡을지.

엘리시아는 그게 일레온이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가 <눈먼 짐승의 꽃> 남주여서 그와 함께하기 위해 자신이 여주가 되어야 한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 책에 대한 걸 아시잖아요.”

엘리시아는 간절한 눈빛으로 마리엘라를 보았다.


“도와주세요. 제가 일레온과 함께할 수 있게.”

그녀와 꼭 닮은 마리엘라의 보랏빛 눈동자에 그렁하게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 엘리시아.”

“……엄마.”

순순히 그러라고 대답한 마리엘라를 보며 엘리시아는 깜짝 놀랐다.

의외로 마리엘라는 결연한 눈빛으로 엘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해보자. 할 수 있어.”

“어, 엄마.”

오히려 당황한 건 엘리시아였다.

마리엘라가 이렇게 별다른 말 없이 그러자고 할 거라곤 생각지 못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얼떨떨했다.


“엄마는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엘리시아.”

마리엘라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 엄마.”

선선한 그녀의 반응에 얼이 빠진 듯한 엘리시아를 마리엘라가 품으로 끌었다.


“엘리시아!”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며 희다 못해 파르스름한 안색을 한 질리언이 달려 들어왔다.


“오오. 네가…… 네가 어떻게 여기에.”

“아빠.”

엘리시아가 눈물 글썽한 채로 바라보자 하룻밤 새 움푹 팬 중년 남자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항구에 갔었단다. 너를…… 네 소식을 알아보러…….”

꼭 끌어안고 서로를 다독이는 세 가족을 일레온이 묵묵히 지켜보았다.

***

겨우 진정한 마리엘라와 질리언은 공작 부부의 침실에 나란히 앉았다.

공작저 안에서 가장 벽과 문이 두껍고 조용한 공간이 바로 이곳이었다. 같은 이유로 안의 소음이 밖으로 새지 않아 중요한 대화를 나누기에도 적합했다.

눈물만 그쳤다뿐이지 마리엘라의 손은 여태 경련하듯 떨렸다. 그것을 안쓰럽게 바라본 질리언이 가만히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이제 좀 낫소?”

“네.”

“이런 게 천운이 아닐까?”

질리언이 한숨을 쉬었다.


“그 애를 클레벤트 대공이 직접 데리러 갔다니.”

“…….”

“아직 마음이 많이 힘든 거요? 엘리시아 그 애가 탔던 배가 침몰한 건 그대 탓일 수 없소.”

엘리시아가 타고 난쿠 대륙으로, 항구도시 베르베로 향하던 배는 소나텍의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정상적으로 운항할 수 있는 시기에 배가 침몰하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손에 꼽게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내일을 살아가야 할 이들이 애꿎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엘리시아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 돌아온 걸 알고도 마리엘라의 굳은 어깨와 질린 얼굴이 풀어질 기미가 없자 질리언은 아내의 손과 어깨를 감싸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질리언. 당신께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가 어서 해보란 듯 눈을 맞추자 마리엘라의 눈동자가 다시 물기로 젖어들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 거요. 이야기하기가 힘들면 굳이 하지 않아도.”

“아니요. 지금. 지금 해야 해요.”

마리엘라가 고개를 흔드는 서슬에 눈가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아래로 흘렀다.


“엘리시아가 클레벤트 대공과 맺어지고 싶다고 했어요.”

질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테르 공작가의 가주로 아무리 딸의 단속을 아내가 한다 쳐도 대공이 그리 문턱이 닳도록 제집을 드나드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대공이 열렬하게 엘리시아에게 구애 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대신전에서 신관으로 자라 사고로 사라졌던 딸이 무슨 우연으로 대공저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눈도 보이지 않았던 일레온이 어떻게 엘리시아에게 저리 푹 빠졌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질리언은 예언서에 따라 죽을 운명인 딸아이를 도피시켜야 한다는 아내의 말을 믿었다. 그럴 예정이니 콘스탄스 제국에서 누군가와 연을 이어나갈 이유가 없어 혹여 혼담이 정식으로 들어온다면 거절해달라는 마리엘라의 뜻을 따를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클레벤트 대공, 일레온은 직접 먼 바다까지 배를 몰고 가 딸을 구해온 이였다. 마리엘라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 그간 일레온이 공작저에 방문할 때마다 일부러 마주치지 않았던 질리언은 실로 그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는 셈이었는데 이미 엘리시아와는 꽤 감정이 깊어 보였다.


“그래. 나는 반대하지 않을 거요.”

말해놓고 질리언은 슬쩍 마리엘라의 눈치를 보았다.


“물론 그대가 싫지 않다면.”

“그 애의 뜻대로 해주고 싶어요. 클레벤트 대공가와 혼사를 서둘러야겠어요.”

질리언은 아내의 손을 쥐었다.


“좋소. 그것만으로도 황태자를 피할 수 있을 게 아니오?”

“질리언.”

마리엘라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마치 큰 죄를 짓기라도 한 것처럼 몇 번이고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떼었다 도로 다무는 여인을 보며 질리언이 제 품으로 마리엘라를 안으려 할 때였다. 그의 온기를 떨리는 손으로 밀어낸 마리엘라가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께 거짓말을 했어요.”

“거짓말이라니?”

“예언서 말이에요. 엘리시아가 황태자의 손에 죽을 운명이라 도망치게 해야 한다는 거.”

질리언의 눈이 커졌다.


“예언서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당신이 한 말은 모두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소.”

“엘리시아는 처음부터 일레온의 반려였어요.”

“그게 무슨 말이오?”

마리엘라는 떨리는 손으로 질리언의 옷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그때 내게는 예언서를 고칠 수 있는 힘이 있었어요. 엘리시아를 사비엘에게 죽을 운명으로 바꾼 건 나예요. 질리언.”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게 말이 되오? 그러면 우리가 그동안 엘리시아를 지키기 위해 했던 일들은…….”

“불행하려고 그런 선택을 한 건 아니에요. 처음 이 세계에 오게 되었을 때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었어요.”

혼란스러워하는 질리언을 보며 마리엘라는 고개를 떨구었다.


“예언서에 적힌 끝을 보는 것. 그게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었어요.”

마리엘라는 질리언의 소매를 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마치 그가 자신을 뿌리치지 못하게 매달릴 수 있는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어째서…….”

“당신을 만났잖아요. 질리언.”

마리엘라가 서글픈 얼굴로 흐린 미소를 지었다.


“당신과 함께 여기서 살아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레온의 짝과 사비엘의 짝을 바꾸었어요.”

“……예언서의 끝을 바꾸기 위해?”

“네. 그랬어요.”

마리엘라와 질리언이 만난 건 제국 아카데미, 베를라스 학원에서였다.

아카데미 안에서는 신분의 익명성이 보장되었다. 가문을 가린 채 서로를 이름으로만 불렀다. 성실한 면학과 바람직한 우정의 교류를 위해서였다. 학생들의 우위에 설 수 있는 입지는 오직 그들의 지지에 의해서만 결정됐다. 담장 너머의 신분 고하를 학내로 끌고 들어왔다가 발각될 시에는 바로 퇴학 처분이 내려졌다.

서로를 마음에 두고 결혼을 약속했지만 마리엘라와 질리언은 그저 상대가 귀족이니 성혼하는 데 문제가 없겠거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마리엘라가 허울뿐인 남작가의 여식이라는 점이 질리언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질리언의 가문이 제국에 둘 뿐인 공작가라는 사실에 마리엘라가 놀랐지만 그렇다고 둘의 애정이 변할 것은 아니었으니까.


“저라고 그 예언서를 모두 외울 리는 없었어요. 당신이 유테르라는 사실도 모를 때였고,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생기지도 않은 딸아이가 그런 운명으로 점지 될 줄 몰랐어요.”

질리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군. 그런 거였어.”

덤덤한 반응에 마리엘라는 어쩔 줄 몰랐다.


“그러면 클레벤트 대공과 엘리시아가 이어지면 원래 예언서의 끝을 볼 수 있을 테니. 당신은 이곳을 떠나야 하는군.”

“……미안해요. 질리언.”

마리엘라는 눈물을 흘렸다. 그는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드넓은 공작저의 부지에 ‘유테르의 낙원’이라 불리며 회자 될 정도로 대단한 정원을 꾸며줄 정도였다. 질리언의 마음에 상처를 남겨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그녀를 괴롭게 했다.


“미안해할 것 없어. 마리엘라.”

질리언이 예전 아카데미의 동급생이었던 시절 말투로 말하자 마리엘라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혼자 고민하게 해서 미안해. 그래. 뭔가 내게 전부 털어놓지 않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하지만 네가 너무 괴로워 보여서.”

질리언은 제 소매를 잡은 마리엘라의 손을 떼어 맞잡았다.


“달라질 건 없어. 지금 이 사실을 알고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너와 함께할 거야. 마리엘라.”

“질리언.”

“엘리시아는 내 딸이야. 우리는 그 애의 부모고. 아이의 행복을 우선하는 건 당연한 거야. 마리엘라.”

질리언은 마리엘라의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거두어주었다.


“엘리시아가 행복해져야 너와 나도 행복할 테니까.”

“으…… 흐흑.”

헤어짐을 그려보고도 불행을 말하지 않는 남편의 품에서 마리엘라는 목놓아 울었다.

***

엘리시아는 입고 있는 후드를 더 깊게 눌러썼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배를 탈 채비를 했던 엘리시아는 두툼하고 칙칙한 색의 로브를 걸치고, 그 위에 후드를 두른 차림이었다.

그런데 그 차림새로 공작저에 돌아가서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얼결에 빠져나오니 여전히 그 옷차림이었다.

공교롭게도 일레온은 오늘따라 굉장히 근사했다. 푸른색 재킷에 은장의 더블버튼이 빛나는 상의에 검은색 바지를 매치해 입었을 뿐인데 흰 편인 피부에 붉은 눈동자와 대비되는 효과가 있어서 그런지 엄청 눈에 띄었다.

지나가던 아가씨들이 한 번씩 홀린 듯한 눈으로 일레온을 돌아보는 걸 엘리시아는 칙칙한 옷을 입고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나 일레온은 그녀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어서 그런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거 같았다.

옆에 선 엘리시아 혼자 민망했다. 차라리 메이드 옷을 입었더라면 주인과 하녀라고 생각이라도 할 텐데 그와 자신은 무슨 사이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언밸런스한 차림새를 하고 나란히 걷는 중이었다.


“이거 받아.”

멍하니 서 있던 엘리시아에게 일레온이 서점의 매대에서 집은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표지에는 고풍스럽고 심오해 보이는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책의 제목은 ‘생명의 나무’.

언뜻 보면 종교 서적 같기도 했다. 어딘가의 신화에는 우주는 한 그루의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말이다.

책 표지를 살피며 어리둥절해하는 엘리시아에게 일레온이 씩 웃으며 귓속말로 작게 말했다.


“아기 만드는 방법이 나와 있는 책.”

엘리시아는 깜짝 놀라며 볼을 붉혔다.


“결혼식 전날까지 같이 공부하자.”

“이, 이런 걸 왜 봐요.”

“그대는 모르는 게 많다고 하지 않았나? 뭐든 같이 알아가자고 했잖아.”

“…….”

질색하며 매대에 책을 돌려놓은 엘리시아는 빨개진 얼굴로 괜히 후드를 더 꾹 눌러썼다.

일레온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딱히 반박하기가 애매해서 곤란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이건 왜 이렇게 뒤집어쓰고 다니지?”

“앗.”

엘리시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일레온이 후드를 시원하게 젖혔다.

그러자 안에 갇혀 있던 엘리시아의 금빛 머리카락이 출렁이며 그녀의 어깨 너머로 쏟아져 내렸다.


“와. 예쁘다!”

길을 지나던 꼬마아이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엘리시아는 부끄러워서 얼른 머리카락을 한데 그러모아 정리하고 다시 후드를 눌러썼다.


“뭐예요. 갑자기.”

그런데 일레온이 뭔가에 홀린 듯 자신을 보고 있는게 아닌가.


“방금 거. 한 번 더 해도 되나?”

“네?”

일레온의 손이 후드를 다시 벗길 것처럼 닿자 엘리시아는 후드 가장자리를 손으로 붙잡았다.


“왜요. 하지 마세요.”

“아니. 너무 예뻐서 그래. 한 번만 더 보게 해줘.”

일레온이 눈을 살짝 찡그렸다.


“왜 이런 걸 뒤집어쓰고 있는 거야. 얼굴 보기에도 아까운 시간에.”

“오늘 너무…… 나서요.”

“뭐?”

엘리시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은 근사한데 차림새가 이래서요. 같이 다니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일레온이 잠시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 그렇다고 같이 다니기가 싫고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좀 부끄럽다고. 내가. 내가. 내가.

그때 일레온이 후드 가장자리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촉.

엘리시아는 얼빠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입술을 훔친 일레온이 웃었다.


“후드도 장점이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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