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일레온도 못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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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일레온도 못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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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일레온도 못하는 거
2022.10.19.
“나머지는 내일 사는 거로 하면 되겠지.”
도대체 엘리시아는 왜 저렇게 순진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현명한데 영악하지 않고, 바보가 아닌데 순수했다.
신전에서 자란 탓인가?
일레온은 옆에 놓인 드레스를 조금 건드려보다 곧 그만두었다.
온통 신경이 엘리시아와 에밀리가 소곤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있는 탈의실에 쏠려 있었다.
“다 됐어요. 이쪽으로 나오세요. 엘리시아 님.”
에밀리의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탈의실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치워졌다.
사락. 사락.
엘리시아가 천천히 걸어 방 가운데에 있는 단 위로 올라갔다.
천창에서 떨어지는 빛살 아래로 들떠서 감탄하던 로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방의 비밀을 알았어요. 이 자리에서 뭘 입어보든 전부 사게 될 것만 같아요.」
눈이 부셨다.
하느작거리는 연한 하늘색의 시폰과 레이스에 빛이 떨어졌다. 진한 금빛 머리카락과 함께 온통 찬란하게 빛을 튕겨내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온몸에 두른 광휘가 원래 엘리시아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어때요?”
인형처럼 감정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던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별로예요?”
별로냐니.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할 수가 있어?
일레온은 그녀의 말에 저도 모르게 발끈했다. 순진하다 못해 맹하게 느껴지는 여자의 무해함이 너무나도 유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너무 잘 어울려. 예뻐. 정말이야.”
그의 말에 엘리시아가 안심한 얼굴로 엷게 미소지었다.
“다행이네요. 처음 입을 옷을 잘 골랐나봐요. 그러면 이거 사고 얼른 가요.”
엘리시아에 말에 아까부터 넋이 나가 있던 일레온은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뭐라고? 이거 사고 가자니.
옷이 많다며 가게에 들어올 때부터 저어하던 그녀를 떠올리자니 왠지 이런 기회가 다음에 또 쉽게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일레온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다시 보니까 좀 그렇군. 옷은 별로인데 그대가 입어서 예뻐 보였나 봐.”
옆에서 벅찬 얼굴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던 에밀리가 순식간에 별로인 옷의 제작자가 되었다. 에밀리가 표정과 눈빛으로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대공 전하?’ 하고 무언의 항의를 했지만 일레온은 개의치 않았다.
“다음 거 입혀주겠나.”
“……네. 전하.”
그 사이 엘리시아는 그런가? 하며 갸우뚱하며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변했다.
겉모습은 그가 아는 그녀인데 속 알맹이가 바뀌었다.
그걸 여태까지는 주변 상황에 휩쓸려서 제대로 관찰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두근, 두근.
일레온은 심장이 울렁거렸다.
이 감각이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을 본 설렘일까, 아니면 드디어 진짜 엘리시아의 본질적인 모습을 마주했다는 기쁨일까.
일레온은 짧게 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엘리시아를 뒤쫓아갈 때 자신을 선택해주기만 한다면 그녀가 바라는 일을 무엇이든 할 거라 결심했다.
아직 뭘 해야 하는지 예언서에 관련해서라면 몰랐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엘리시아의 곁에서 방패가 되어서 그녀의 괴로움을 막아주는 일.
때로는 검이 되고 창이 되어 엘리시아를 위협하는 적을 도륙하는 일.
어디에서 방패가 되어야 할지, 언제 검이 되어야 할지는 차차 알게 되겠지만 그가 할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뭘까?
일레온은 티끌 같은 거스러미처럼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오. 이 드레스가 더 잘 어울려요. 엘리시아 님.”
탈의실 쪽에서 들뜬 것 같은 에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나와보세요.”
엘리시아가 꽃송이처럼 분홍빛 드레스를 입고 나와 단 위로 올라가는 걸 보고야 일레온은 잡다하게 떠오르는 상념을 잊었다.
***
으으. 아프다. 아파.
온몸이 잘게 다져진 듯한 통증에 카리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여기는…… 어디지?”
아담한 방은 밝은색으로 꾸며져 있었지만 천장이 낮았다. 그녀가 눕혀져 있던 침대도 이불과 베개는 깨끗해 보였지만 목재는 허름해 보였다.
‘사비엘이 쫓아오고 있었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 걸 보니 죽지는 않았나보다. 카리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야.”
그때 격렬한 통증이 밀려오며 그녀는 그대로 침대로 다시 쓰러졌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문밖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그녀와 또래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눈동자만은 잉크를 채운 듯 까맸다.
“정신이 들었나요?”
“네. 여기가 어디죠?”
카리나의 말에 남자가 호감을 불러오는 선한 미소를 지었다.
“병원이에요.”
“병원이요?”
“당신 숲에서 땔감을 줍던 아이들에게 발견되었어요. 절벽에서 떨어져서 나뭇잎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손끝이 튀어나온 걸 한 녀석이 보았죠.”
“아…….”
그제야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천천히 허공을 날아 떨어진 몸이 높이차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쌓여 있던 나뭇잎 더미 위로 떨어지고 반동으로 튀어 오른 낙엽들이 제 위로 우수수 쏟아졌었다.
‘사비엘은 나를 발견하지 못한 건가.’
그리 의문할 때였다.
“악. 아으으.”
참을 수 없게 아랫배가 뒤틀리는 통증이 찾아오며 온몸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아기.’
가슴이 덜컥 하는 기분이었다. 두 손으로 배를 감싸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서 카리나는 불길함을 읽었다.
“저 혹시…….”
“아기는 살릴 수 없었어요. 발견했을 때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아. 아아.”
카리나는 좌절했다. 그 아이는 짐이었고, 사비엘이 그녀에게 남긴 원치 않는 흔적이었다.
하지만 낳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원수처럼 원망스럽던 사비엘에게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매달려 볼 정도로, 그러나 비정한 아이 아버지로부터 내쳐지는 걸로도 모자라 위협을 당하고는 일레온의 그늘에 기대보려 할 정도로.
누군가를 속이고 이득을 취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카리나 제 안위만을 위했다기보다는 아이를 안전하게 낳고 싶은 본능이 앞섰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사비엘을 만났을 때부터, 아니면 ‘로나’가 제 운명을 점쳐주었는데도 따르지 않았을 때부터.
일레온에게 처음부터 끌린 자신과, 뒤늦게 아이까지 밴 제게 지극해진 그의 시간이 엇갈린 것 자체가.
“아흐흐.”
눈물을 흘리는 카리나에게 남자가 작은 컵에 든 약을 건넸다.
“당신은 더 쉬어야 해요. 카리나.”
한참 더 눈물을 쏟은 후에야 카리나는 약을 먹고 다시 잠들었다.
‘그런데 내가 이름을 말했던가?’
의식이 흐릿해질 즈음 의문이 잠시 떠올랐다가 잠에 묻혀 사라졌다.
***
엘리시아는 멍하니 거울을 보았다.
연한 푸른색에 허리 아래로 층층이 시폰으로 부풀려진 드레스는 오늘 엘리시아가 르발레인에서 입어본 열여섯 번째 드레스였다.
“어떠신가요? 대공 전하.”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에밀리는 이번에도 그녀가 아닌 일레온을 향해 의중을 물었다.
“흠. 글쎄.”
엘리시아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레온. 잠깐만요.”
그녀가 손짓하자 일레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이 드레스. 이게 마음에 들어요.”
“진심인가?”
엘리시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입었던 것들은?”
“다 예쁘지만 오늘은 한 벌만 사기로 했잖아요.”
아무리 드레스가 고가라고 하지만 이렇게나 많이 입어보고 한 벌만 사는 건 에밀리에게 민폐인가? 잠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전에 수도 인근 타운하우스 한 채 값만큼 공작저에서 드레스를 사들이지 않았던가. 엘리시아는 에밀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당신도 오늘 파란색을 입었잖아요. 둘이 맞춰입은 분위기가 날 거예요.”
이 사태의 원인은 엘리시아가 제 옷차림이 그와 어울리지 않아서 집에 일찍 가고 싶다고 한 데에 있었다.
일레온은 뭐랄까 본인이 원하는 걸 반드시 쟁취하고야 마는 근성이 있었다. 그는 오늘 엘리시아와 일찍 헤어질 마음이 전혀 없었고, 그녀는 집에 돌아가고 싶은 이유가 옷 때문이라고 말했으니 데이트를 하는 데 있어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하려 드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태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었다.
“얼른 나가서 데이트하고 싶어요. 네?”
“그래? 그럼 이만하도록 하지.”
제 짐작이 맞았는지 일레온이 여태 힘주고 있던 눈가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고작 옷 몇 벌 입어보는데 저렇게 눈에 힘을 주고 있을 이유가 뭐냔 말이다. 엘리시아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잠깐.”
에밀리가 주문서를 가지러 간 사이에 일레온이 소파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고 다가왔다.
반질반질 광택이 이는 실크로 만들어진 파란 리본이었다.
“이거 내가 해줘도 되나?”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돌았다. 그가 리본을 묶을 수 있게 손으로 머리를 한 움큼 잡자 일레온이 조심스레 리본을 감아 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행위가 낯선지 일레온은 나비 모양을 만들지 못하고 엉성하게 묶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뭐야. 일레온도 못하는 거 있네.’
근사한 모습으로 제 뒤로 다가선 남자가 점점 입술까지 꾹 다물고 집중해서 리본을 매기 위해 애쓰는 걸 엘리시아는 거울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할게요.”
그제야 엉성하게 묶인 리본에서 손을 뗀 일레온이 머쓱해 했다.
“보기와는 다르군.”
“당신이 이런 걸 매어 볼 일은 없었겠죠?”
보통 넥타이의 장식과 맵시를 내는 건 메이드나 집사가 도울 일이었으니까 그가 자신의 손으로 해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맞아. 하지만 푸는 건 쉽길래 매는 게 어려울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
엘리시아는 가만히 일레온을 노려보았다. 그게 오히려 그를 자극했는지 일레온은 천천히 엘리시아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하지 마세요.”
“여기는 바깥도 아니지 않나.”
“가게 안이잖아요.”
“그렇지만 별실이고 우리 둘뿐인데.”
일레온이 혀끝으로 그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엄청 갈급한 표정으로 그가 엘리시아에게 입술을 졸랐다.
“한 번만 하게 해주면 오늘은 참을게.”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은 참는다고? 내일은 안 참고?
어쩐지 자신이 몇 번이고 말려드는 일레온의 화법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응? 엘리시아.”
그런데도 일레온의 말 한마디에 엘리시아는 가슴이 떨렸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기억을 잃었을 때 그와 지냈던 일들을 엘리시아는 또렷하게 기억했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겪은 일이라기보다는 선명한 꿈처럼, 한 커풀 무엇이 씌워진 듯 거리감을 느꼈다.
엘리시아 자신의 기억이지만, 제가 한 일이 아니었다.
본래 성격도 뭣도 아닌, 원윤지로의 로나를 연기하고, 로나지만 엘리시아인 척하기도 했다.
그건 그녀 자신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일레온을 향한 감정은 이렇게나 하나일까.
크고 아름다운 보석 반지가 손에서 손으로,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어도 그대로 영롱하게 빛나는 것처럼.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도, 모든 것이 생각나는 지금에도 나는 당신을 이렇게나 마음에 담고 마는 걸까.
엘리시아는 허락하듯 눈을 감았다.
일레온이 조심스레 입술을 겹치자 맞닿은 온기 사이로 그의 향기가 실린 한숨이 스쳤다.
“엘리시아.”
그녀를 꼭 끌어안은 남자가 취한 사람처럼 그녀의 이름을 입 안에서 뭉갰다. 농염하게 비벼지던 말캉한 입술이 떨어지자 끌어안겨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일레온은 술독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눈에 초점이 흐렸다.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열이 홧홧하게 올라오는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웃어줘. 네가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