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의욕 없는 시들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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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의욕 없는 시들한 영혼
2022.10.22.
“웃어줘. 네가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
일레온의 말에 엘리시아는 눈을 크게 떴다.
“내내 힘든 얼굴 하고 있잖아.”
“내가요?”
엘리시아는 놀랐다. 딱히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힘들고 고단하기로는 그냥 그녀의 삶 자체가 그랬던 거니까.
그게 표정으로 드러나는 걸까.
신관으로 대개 무감한 얼굴로 잔잔하게 지내는 시간이 가장 많았다.
제가 표정이 다양하지 않다는 걸 엘리시아도 스스로 알고 있긴 했다.
왜냐면 울고 웃고 화내고 슬퍼한다고 해서 무언가 바뀌는 게 아니니까.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어떤 일을 당해도 원래 그런 거니까, 몰랐던 거 아니니까, 올 일이 드디어 닥친 것뿐이니까 하면서 흘려넘기고 사사로이 반응하지는 않았다.
딱 한 번.
사비엘이 그레로사로 가는 신관들을 몰살하고 그녀를 억지로 누르려고 했을 때 빼고 말이다.
그땐 정말 견딜 수가 없어서 분노의 감정을 실어 칼로 사비엘을 찌르기까지 했으니.
그때 엘리시아는 정말로 그를 해치고 싶었다.
체념한 마음 밑바닥에는 그런 어둑한 진심도 숨겨져 있었다.
“그, 그랬어요? 아닌데. 힘든 게 뭐가 있겠어요.”
엘리시아는 양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됐죠? 웃어달라니. 그게 뭐 별거라고.”
일레온은 그런 그녀를 보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쩐지 그가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그렇게 사랑스럽기만한 상대일 수 없다는 걸.
대부분 인생에 초연해서 의욕 없는 시들한 영혼이 깃든 몸이라는 걸.
그의 품은 따뜻한데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일레온?”
그가 자신을 꼭 끌어안더니 관자놀이 옆으로 한숨을 쏟았다.
“아니야. 아무것도. 얼른 가자.”
막 일레온에게서 떨어졌을 때 에밀리가 주문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오늘도 구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이건 저희가 준비한 약소한 선물이에요.”
에밀리를 따라온 조수가 빌로드 쿠션 위에 큼직한 상자를 받쳐 내밀었다. 일레온이 뚜껑을 열자 안에는 백금에 꽤 큼직한 블루 사파이어가 장식된 화사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고맙군. 이대로 하고 가면 되겠어.”
엘리시아가 그 광경을 멍하니 보는 사이 일레온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밀며 목에 목걸이를 채워주었다.
찰칵.
커플러가 목 뒤에서 채워지는 감각에 정신이 든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손에 들린 주문서를 뺏었다.
“이게 대체 뭐예요?”
오늘 입어본 열여섯 벌의 드레스를 전부 산 걸로 적혀 있었다.
그런 엘리시아의 손에서 주문서를 도로 가져가며 일레온이 넉살 좋게 웃었다.
“데이트하러 가자. 엘리시아.”
***
하듄샤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게 잘 느껴지지 않았다.
적막하다 못해 고요한 공간에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며 그림자를 드리울 때가 되어서야 하루가 흘러가나보다 싶을 정도였다.
이리스와 루벤, 에쇼는 오늘도 한자리에 앉아 초조하게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스가 창가에서 서성이다 전서구가 날아들자 재빨리 창을 닫았다.
[전면수정. 엘이 탄 배 침몰. 살아 있음. 남주와 함께. 원작복귀희망.]
짤막하게 적힌 문구를 곱씹으며 이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라고 왔어, 누나?”
에쇼가 초조한 듯 묻자 이리스가 쪽지를 건네주었다.
“하. 전면수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네.”
로벤이 에쇼에게 건네받은 쪽지를 읽고는 바로 벽난로에 던져넣어 태웠다.
“원작에 복귀를 희망하시다니. 예언서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소나텍은 마리엘라를 괴롭히기 위해서라면 원작을 여기저기 들쑤시는데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 세계의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도 말이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공작부인이 하겠다고 하면 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대답한 이리스의 표정 역시 그리 밝지 않았다.
“엘리시아가 탄 배를 침몰시키다니.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그는 정말 미친 작자예요.”
신관인 그들은 낮에 수장고가 빈틈을 타, 소나텍이 수정해버린 필사본을 확인한 상태였다.
말도 안 되게 뜯어고친, 원작의 흐름에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유테르 공작가의 비극’을 읽으며 어찌나 황당하던지. 떨리는 마음으로 마리엘라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비둘기를 보내고 한참 연락이 없어 기다리던 참이었다.
“아직도 소나텍에게 그 정도 수정할 힘이 남아 있을 줄 몰랐습니다.”
“의외였죠. 그런 힘이 있다 한들 뭔가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남겨둘 줄 알았는데.”
에쇼가 코웃음을 쳤다.
“그 멍청한 새끼는 마리엘라가 엘리시아와 함께 원작 밖으로 나가는 지금이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했을걸.”
로벤과 이리스는 할 말이 없었다. 그들도 속으로는 에쇼가 생각한 것과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리엘라는 원작을 수정하는 게 아니라 되돌리려고 할 거예요.”
“원작에 복귀를 희망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소나텍이 망쳐놓은 부분을 수정하겠죠.”
‘원작’이라는 건 이 세계를 움직이는 지침, 세계관 그 자체였다.
개입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원작의 흐름이 일관되게 모든 것을 움직인다.
하지만 원작을 수정하는 건, 어마어마한 개연성을 소모한다. 한 줄, 한 문장을 고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바뀜으로써 영향받는 다른 문장들이 함께 적절히 수정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강제력에 의해 저항을 받게 된다.
이런 사실을 감지할 수 있는 이들은 하듄샤에 신관으로 있는 빙의자들 중에서도 직접적으로 신과 소통을 할 수 있는 몇몇에 불과했다.
그리고 혼란을 막기 위해 신들이 그들에게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다른 신관들에게 전할 수도 없었다.
소나텍이 수정한 이 세계의 내일은 어찌 될까?
알 수 없었다.
일레온이 완결편에 다다른 후에 어떻게 될까보다도 훨씬 공포스러웠다.
한 사람의 선택과, 패악에 내일이, 미래가 휘둘린다.
신들이 함구령을 내려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몇몇 이 사실을 아는 이들 빼고는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니 말이다.
“공작부인과 이야기를 나눠야 해요. 그래야 그녀를 도울 수 있을 테니까.”
“신들께서는 그녀가 소나텍을 적극적으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신들은 이제까지 마리엘라가 너무 소극적이었다고, 그게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이리스가 마리엘라를 돕는 것과 로벤, 에쇼가 그녀를 염려하는 건 목적이 달랐다.
이리스는 빙의자도 아니었고 마리엘라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래서 마리엘라를 도와 소나텍으로부터 엘리시아를 구하고자 했다. 그건 살아갈 방향이, 목적이 없는 이리스를 여태 버티게 해주었다.
하지만 로벤과 에쇼는 다섯 주신과 오데르를 등에 업고 있다.
이미 세계를 초월해버려서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신들이 신탁을 통해 그들에게 배 놔라 감 놔라 전언만 보내는데 이리스는 살짝 질려 있었다.
진짜 전능한 신이고, 소나텍이 신좌에 올라 그들과 함께 영원한 존재로 세계의 틈새에 남는 게 싫다면 무언가 해줘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입만 털 뿐이었다.
신관이면서도 이리스가 신성에 대한 공경을 잃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지금 우리가 공작저를 찾아갈 순 없어요. 아직 소나텍이 엘리시아가 살아 있다는 걸 모르니까. 우리 때문에 들켜서는 안 되겠지요.”
“답답하군요.”
로벤과 에쇼의 머리 위에서 번쩍이는 스파크가 일었다.
이리스는 이제 듣지 않아도 스파크의 파형만으로도 신들의 반응을 짐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신께 전해요. 아무리 그렇게 말해봤자, 우리가 당장 마리엘라나 엘리시아를 만날 수는 없다고요.”
에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나. 누나도 이게 들리는 거야?”
그런 동생을 보며 로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살롱은 운치 있는 곳이었다.
울창한 숲속에 이국적인 기둥이 나란히 서 있는 석조 건물이 서 있었는데, 야외에 마련된 테이블은 앞이 탁 트인 경사 가까이에 놓여 아래로 불이 하나, 둘 들어오는 콘스탄스 에비뇽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엘리시아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과해요.”
“뭐가?”
일레온은 여유롭게 풀어진 얼굴이었다.
그의 뒤로 반라의 여인이 어깨에 항아리를 올린 조각상에서 졸졸졸 연못으로 물이 흘러내렸다. 둘이 앉아 있는 곳과 꽤 떨어진 본관 건물 기둥 사이사이에는 금실로 테두리가 장식된 발이 내걸렸다. 무늬가 특이한 괴석을 매끈하게 갈아 만든 테이블의 테두리는 금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과하다고 말했지만 그걸 배경 삼아 앉아 있는 일레온과는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엘리시아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 여겨질 뿐.
‘기분 상하려나.’
엘리시아는 르발레인에서 살롱으로 이어진 데이트 코스에서 일레온이 써버린 돈이 얼마인지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 돈을 하듄샤에 기부했다면 근래 기부금이 줄어 고생하는 보육원 서너 곳은 거뜬히 건사했을 텐데.
그런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일레온은 그녀가 기뻐하길 바라면서 이런 일을 했을 테니까.
「웃어줘. 네가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
그런데 그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내내 마음에 걸렸다. 거기에 그가 지출한 금액이 아깝다는 잔소리까지 더한다면 일레온이 기분이 상할까봐 걱정이었다.
잔소리를 도로 속으로 집어넣은 엘리시아는 대신 다른 것에 집중했다.
“고마워요. 이런 곳에 데려와주어서요.”
일레온이 반색하며 기쁜 낯을 하는 걸 보자 엘리시아는 잔소리를 관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도 자주 와 본 곳은 아니야.”
“그래요?”
“여기는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자주 오시던 곳이지.”
“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남겨주신 편지가 있었어. 거기 쓰여 있더군.”
은애하는 이와 함께 보는 풍경은 특별해서 본래보다 좋아 보이지만, 그중에 본래 예쁜 풍경은 잊지 못할만큼 더 아름다워 보였다고.
“그걸 읽을 때만 해도 잘 모르겠다고 여겼는데. 엘리시아. 그대가 허락해준다면 언젠가 여길 함께 오고 싶다고 쭉 생각했어.”
“어때요? 직접 와 본 소감은요.”
엘리시아가 묻자 일레온은 그녀가 귀한 예술품이라도 된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감상했다.
“말씀하신 대로군.”
일레온은 고운 이를 아름다운 풍경 가운데에 두니 그거야말로 잊지 못할 장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스스로를 볼 수 없으니 말해주어도 그가 느끼는 감동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시종이 커다란 은쟁반에 과일주와 치즈, 빵 등 가벼운 요깃거리를 얹어 날라왔다.
“한잔하겠나.”
잘 익은 과일주에서 달콤한 향이 물씬 풍겼다. 혀 아래에 살짝 침이 고이는 느낌이었지만 엘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술은 마셔본 적이 없어요.”
“신관들은 술을 마시지 않던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기회에 한번 마셔보는 건 어때? 다시 신관이 될 것도 아니고.”
“아직. 다음에 마셔볼게요.”
엘리시아의 마음속에서는 공작가 영애 엘리시아와는 거리감이 있었다.
오래 하듄샤의 신관으로 살아온 탓일 거다.
마땅히 귀족가의 레이디로 누릴 법한 드레스와 장신구의 사치스러움이 부담스럽게만 느껴지니 곤란했다.
파문당한 걸 알면서도 마음은 아직 속세로 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하듄샤 안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로나는 어떻게 그렇게 지냈지.’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인격도 변할 수 있는 걸까.
보통은 기억을 잃어도 성격이나 취향 같은 게 변하는 건 아니지 않나.
다시 생각해도 의문스러웠다.
“일레온. 저는 아직 바깥 생활이 익숙하지 않아요.”
엘리시아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래도 분명히 천천히 익숙해질 테니까. 당신이 조금만 기다려주면 좋겠어요.”
그의 옆에서 가까이 걷기가 어색하다던가.
그가 억지로 잡아끌지 않으면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게 되지 않는다든지.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워서 절로 시선을 피하거나 하는 것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걸 미안해하지 마. 엘리시아.”
일레온이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대가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고 있으니.”
그제야 또 마음의 짐이 약간 덜어진 듯했다.
“저 잠시 손 좀 씻고 올게요.”
엘리시아가 그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막 뒤를 돈 엘리시아를 향해 허공에서 화르륵 일어난 검은 불꽃이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엘리시아의 상체를 휘감은 불꽃을 보며 일레온이 소리쳤다.
“엘리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