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인사가 잘못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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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인사가 잘못되었군요
2022.10.26.
“엘리시아!”
일레온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지만 ‘데이트’라 생각한 탓에 오늘은 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제길.
엘리시아를 품으로 끌어안으며 팔을 휘젓자 뱀이 똬리를 틀 듯 그녀를 휘감던 검은 불꽃이 사라졌다.
“엘리시아. 괜찮아?”
“네. 네.”
하얗게 질린 엘리시아가 가늘게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몸에 새긴 듯 익숙한 공포.
엘리시아는 이 불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묻는 건 나중 일이다.
“흑.”
놀란 엘리시아가 떨면서 작게 흐느끼자 일레온은 그녀를 달랬다.
내가 지켜 줄 거라고.
그러니까 이제 안심하라고.
마음을 담아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느다란 몸을 끌어안고 뺨을 맞대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녀를 다독일 때였다.
화륵.
아까 엘리시아의 머리에 엉성하게 매어준, 결국 보다 못한 에밀리가 힘을 주어 풍성하게 맵시를 살려 묶어주었던 파란색 리본.
리본이 한쪽 끝에서부터 먹혀가듯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불티 대신 회색의 잿가루가 허공으로 날렸다.
일레온은 그것을 손으로 뜯어내듯 잡아채어 바닥에 던졌다.
화르륵.
그 기세에 살아있는 생물이 반응이라도 하듯, 남은 리본 위로 기세를 키운 검은 불꽃이 날름거렸다. 불꽃이 리본을 핥아먹은 듯 태우고 나자 재마저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이, 일레온.”
엘리시아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일레온은 검은 불꽃이 사그라든 자리를 노려보았다.
***
늦은 시간 대공저의 응접실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레브와 마리엘라, 질리언. 거기에 일레온과 엘리시아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일레온이 운을 떼었다.
“검은 불꽃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거였는데 이민족의 화약을 섞은 그런 불도 아니고. 발화점이 없이 허공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더군요.”
그 말에 마리엘라가 핼쑥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강제력이 작용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강제력? 그게 무엇이지?”
레브가 물었다.
“수정된 원작은 그대로 이루어지려는 힘을 받게 됩니다. 소나텍이 엘리시아가 탄 배가 침몰할 거라고 고쳐 쓰는 바람에 난쿠 대륙으로 가던 배가 실제로 침몰했어요. 그러니까…….”
엘리시아를 향한 마리엘라의 눈빛은 고통스러운 모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엘리시아는 죽고 없어야 할 사람이 되었어요. 그래서. 아마 그래서 강제력이 엘리시아를 제거하려고 하나 봐요.”
일레온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거하려고 하다니 그게 무슨 어이없는 말인가.
살아 있는 사람을 태우기라도 할 작정인가.
“그건 이 세계를 강제하는 힘이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어요. 흔적도 없고 언제 시작될지 몰라요.”
작은 리본을 태운 힘이 곧 엘리시아 그녀 전체를 태울지도 모른다.
“무슨 방법이 없겠나?”
“제가 맨손으로 휘저으니 불꽃이 사라지긴 했습니다.”
“그건 전하께서 주인공이셔서 그럴 겁니다. 이 세계는 전하께만은 어떠한 해도 끼칠 수가 없어요.”
“강제력은 예언서에 반할 때 나타나는 힘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전하를 제거할 수 없지요. 무엇으로도 전하의 존재를 대체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오데르의 힘을 가진 사내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겠습니까.”
잠시 모두 침묵했다.
“그럼 어쩔 생각이지? 클레벤트 대공과 유테르 영애의 혼사를 결정한 지 아직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혼사라니요?”
일레온이 놀라자 레브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넌 어제 엘리시아 영애를 쫓아 항구로 가고 지금 어미의 얼굴을 처음 본다는 걸 잊은 것 같구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제게 붙인 자가 제가 어디를 갔는지 보고 드렸을 것 아닙니까.”
“성의를 보여야지. 그리고 무례한 건 봐줄 수가 없구나. 혼담을 여기서 무르는 건…….”
레브의 말에 일레온이 자세를 바로 했다.
“제 혼담은 가주인 제게 결정권이 있습니다.”
“황명을 빌리면 막지 못할 것도 없지.”
일레온은 잠시 언젠가 황제에게 받아 둔 그가 원하는 혼사를 허한다는 칙서를 떠올렸지만 호승심이 강한 레브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여 입을 다물었다.
“강제력이 네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다니. 그러면 당분간 엘리시아는 계속 대공저에서 지내는 게 좋겠군.”
“네?”
갑자기 제게 돌아온 화살에 엘리시아가 눈을 크게 떴다.
“대공이 유테르 공작저에서 지낼 수는 없지 않겠나.”
“황녀 전하. 그래도 혼인은 중대사고 관례라는 것이 있사온데.”
질리언이 당혹한 얼굴로 말하자 레브가 곧바로 그의 말을 끊었다.
“유테르 경. 내가 틀린 말을 했나? 그대 딸을 구명하고자 하는 일 아닌가. 그 강제력이 언제 엘리시아를 삼킬지 모르고, 예언서를 언제 고쳐 쓰게 될지 모른다면 최대한 일레온이 엘리시아와 가까이 있기라도 해야 할 테지.”
“하지만.”
재차 반발할 것처럼 반응하는 딸 가진 아버지, 질리언을 마리엘라가 만류했다.
“황녀 전하 말씀이 모두 옳아요. 아직 막을 방법도 모르고 대책이 없으니까요.”
“그래. 그럼 제대로 대책을 세울 때까지 엘리시아가 여기서 일레온과 함께 지내는 거로 하지.”
레브가 뭔가 제 뜻대로 되었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은 이만 나가보렴. 어른들끼리 좀 더 할 이야기가 있으니.”
엘리시아와 일레온을 쫓아내듯 내보내고 나자 다시 레브의 얼굴이 냉정해졌다.
“폭풍이 지나간 것 같군. 마리엘라 그대는 내게 좀 더 설명을 해주어야 할 거야.”
마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데르는 이 세계 세계관이 보증하는 신의 핏줄입니다. 애초에 그렇게 설정되었기 때문에요.”
“그래서?”
“오데르는 매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사실은 세계관 속에 매여 있지 않아요. 주인공이니까요.”
“그렇군. 그럼 나와 일레온은 앞으로 뭘 하면 되지?”
“이제부터 소나텍을 잡을 겁니다.”
마리엘라는 단호한 눈빛이었다.
“제게는 그를 잡을 힘이 없어요. 하지만 황녀 전하와 대공 전하는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나타나야 잡을 게 아닌가. 게다가 분신술 비슷한 것을 쓴다지?”
“덫을 놓을 거예요. 나타나지 않으면 배길 수 없게 만들어야겠지요.”
딸이 죽음에서 돌아오니 예전과는 다른가 보군.
열심히 이런저런 계획을 설명하는 마리엘라를 보며 레브는 양심이 조금 찔렸다.
‘내 아들이 몇 날 며칠을 드나드는데 구혼장을 받아주지도 않았다지?’
엘리시아와 일레온 둘 다 제 3의 장소로 보내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누가 머무는지 모를 거라면 일레온을 유테르 저택에 보내도 큰 문젠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공작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형태로 스승과 제자 사이를 가장할 수도 있고 말이다.
‘일레온이 좋아할 것 같아서 그렇게 하라고 한 건데.’
마리엘라는 레브가 일레온을 꼭두각시 취급을 했다는 데에 대한 치졸한 한 방을 돌려줄 겸 엘리시아를 대공저에 머무르게 했다는 걸 영원히 모를 예정이었다.
***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온 일레온과 엘리시아는 저택의 후원으로 향했다.
일레온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무슨 생각해요?”
“내가 누구인가 하는 생각.”
일레온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난 이제까지 내가 선택한 일을 해왔어. 그렇게 믿었지. 하지만 이렇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적나라하게 보는 기분은 무엇으로 설명하기 어렵군.”
그의 말을 듣고 엘리시아는 뭔가 위로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면 엘리시아야말로 자신이 선택해서 살아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왜 그런 표정이지?”
“아니에요. 아무것도.”
“말해봐.”
엘리시아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당황스러운 거 이해해요. 이제까지 선택했던 것이 암시에 의해 누군가의 조종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테니.”
그녀는 일레온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뭔가 위로의 말 같은 거 하고 싶은데. 나는…… 내가 선택한 대로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엘리시아가 힘없이 웃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생각도 많이 하고 결정도 많이 해보려고요. 그렇지만 당장 갑자기 달라지는 게 아니니까.”
뭘 해야 할지 막막하다.
이 세계의 신, 새로운 신좌를 노린다는 소나텍을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는지 엘리시아는 아는 것이 없었다.
마리엘라가 시키는 대로 하면, 그건 그것대로 또 이전과는 차이 없는 생활 아닐까.
날 위해 엄마가 정해주는 대로 살아간다면.
그런데 그렇지 않고는 소나텍에게 닿을 길이 없으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엘리시아.”
“네?”
“그대가 할 일은 하나뿐이야.”
일레온이 힘주어 말했다.
“내 곁에 함께해주는 거. 그거 하나면 돼. 그럼 넌 내가 지켜줄 거니까.”
엘리시아는 어색한 얼굴로 망설이다가 일레온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그에게서 풍기는 샌달우드 향기가 물씬 그녀를 감쌌다.
“너무 든든하다.”
“누구든 너 손끝 하나 못 건드려.”
마침 발이 멈춘 자리가 엘리시아가 납치당했던 텐트가 보이는 곳이었다.
어느 때를 떠올렸는지 맞잡고 있던 일레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켜줘요.”
엘리시아는 눈을 감고 그의 팔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꾸만 가슴 속을 어지럽혔다.
나 때문에.
일레온이 함께 위험해지면 안 되는데.
그가 원해서 그녀를 선택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엘리시아는 슬퍼졌다.
***
태양궁 알현실이 들뜬 분위기에 휩싸였다.
긴장이 되기라도 하는지 서서 방 안을 서성이던 마크시스 황제를 보며 세라피나 황후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폐하. 진정하시지요.”
“그래. 그래야지. 허허.”
그러면서도 좋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시종이 큰 목소리로 고했다.
“레브 오데르 콘스탄스 황녀 전하 드십니다.”
검고 풍성한 긴 웨이브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마흔셋이라는 나이로 보이지 않는 홍안의 미인이 알현실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그녀를 감싼 활기가 마차가 아니라 직접 말을 타고 왔는지 승마복 차림의 레브와 더없이 어울렸다.
“오오. 레브.”
“그동안 만수무강하셨습니까. 황제 폐하.”
“잘 돌아왔다. 잘 돌아왔어.”
어찌나 감격했는지 마크시스 황제의 눈가에는 얼핏 눈물이 고인 듯 보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편지 한 통을 하지 않고. 제국의 황녀가 어찌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며 지낼 생각을 한단 말이냐.”
“제가 부족함이 많아 견문을 넓히고자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황제는 부쩍 기력이 떨어져 이제는 조금 할아버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할아버지가 맞지.’
손주가 잉태 중이라는 사실을 알면 심약한 오라비가 기절이라도 할까 싶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손주를 안을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싶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카리나 영애를 찾지를 못했는데.’
며칠 전 대공저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일레온이 엘리시아를 쫓아 나간 직후의 일이었는데 사비엘이 말을 탄 채 대공저의 후원까지 뛰어 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레브가 손수 검기가 실린 검을 칼집 채 날려 그를 기절시켜야 했다.
나중에 사비엘의 부관이 부랴부랴 황녀 전하의 소식을 듣고 인사차 들른 것이라 했지만 레브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사비엘이 제 아들에게 늘 시비조인 걸 알았지만 장성한 아들이 전쟁터로 떠난 데다 자신도 제국에 머물지 않아 직접 그 꼴을 본 적은 없었는데 난동을 직접 보니 가관이었다.
‘인사차 들렀다는 건 핑계고 카리나를 찾으러 온 거였을 수도 있는데.’
그러나 다른 가문 영애의 임신 사실을 상의도 없이 황제에게 아뢸 수는 없었다. 레이디의 가문을 모욕하는 일이었기에 레브는 그 사실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황후 폐하.”
레브가 고개를 숙이자 세라피나 황후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황녀. 황제께서 오죽 황녀를 찾으시는지, 이 사람이 여러 번 황녀가 다녀갔다는 나라에 연통을 넣었는데 번번이 떠나신 후라 답장이 오지 뭡니까.”
“예에. 아무래도 둘러보고 싶은 곳이 많아 서둘러 다니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세라피나 황후는 태연을 가장했지만 가슴이 벌렁거렸다.
‘세이렌 호에서는 분명 날 알아보지 못했어.’
그런데 어쩐지 자신을 쳐다보는 레브의 눈빛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해 찝찝했다.
“인사가 잘못되었군요. 저도 모르게 오랜만에 뵈었다고 인사를 하고 말았으니.”
“음?”
차를 마시던 황제가 눈을 크게 떴다.
“황후 폐하를 지난주에도 뵈었는데 깜빡했지 뭡니까.”
쨍그랑.
황후의 손에 들린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