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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숨 쉬어 (86/151)


86. 숨 쉬어
2022.10.29.



 


“황후 폐하를 지난주에도 뵈었는데 깜빡했지 뭡니까.”

쨍그랑.

……다그르르.

깨진 찻잔과 헛짚은 손 탓에 바닥에 뒤늦게 떨어진 잔 받침이 고요한 가운데 바닥을 울리는 소리를 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라피나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겨우 대답했다.

마크시스 황제는 그런 황후를 보며 물었다.


“레브를? 어디서 마주쳤단 말인가. 자네는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왜 내게 이야기하지 않았지?”

세라피나 황후는 평정을 찾은 얼굴로 대답했다.


“황녀께서…… 먼 여정을 다녀오시느라 뭔가 착각을…….”

“로렐 호수.”

레브가 입을 열자 세라피나 황후의 눈이 경악을 담았다.


“저인 줄 아셨을 텐데요. 알아보시고 안부 인사라도 해주실 줄 알고 기다렸는데 모른 척 지나가시더군요.”

세라피나 황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 제가 황녀를 보았다면 반갑게 맞이하였겠지요. 폐하께서 어찌나 찾으시는지 시달린 지 오래라.”

“훗. 반갑게라.”

레브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픽 웃으며 찻잔을 입에 가져가는 걸 보며 세라피나는 심장이 발목 언저리로 떨어져 내리는 막막한 기분이었다.

본래 스스로 평범한 사람, 선한 사람이라 자평하는 이가 나쁜 짓을 할 때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허락된 일이라는 정신승리와 들키지 않을 거라는 사회적 체면에 대한 방어.

레브를 감금하고 그녀의 피를 취한 건, 모두 ‘신’께서 원한 일이었다.

콘스탄스 제국이 어떤 나라인가?

다섯 주신과 오데르가 대륙의 재앙을 물리치며 건국한 이천 년 제국이었다. 다름 아닌 황제의 직계 핏줄이 신좌에 오른 오데르가 아닌가.

신이 신관을 통해 직접 예언과 직언을 내리는 나라.

그러니 ‘신’께서 원한다는 말에 세라피나는 의심 없이 굴종했다.

게다가 신의 대리인께서는 어찌나 신성하신지 늘 기척도 소리도 없이 그림자에서 솟아난 듯 나타나지 않는가.

헤이른 후작가의 자산을 등에 업고 레브를 가둘 배를 지으면서도 단단히 입단속을 시켜 그것이 자신이 배후임을 드러내지 않았던 터라 절대로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레브의 저 태도는 뭐란 말인가?

마치 제가 한 짓을 모두 안다는 듯한 확신이 있어 보였다.


‘아니지. 알면서 저렇게 행동한다고?’

세라피나의 생각에 만약 레브가 이 사실을 안다면 황후궁의 벽돌 하나까지 가루로 만들 거라 의심치 않았다. 레브는 여자임에도 오데르의 능력을 타고나 소드마스터에 다다랐으니 말이다.


‘몰라. 모르는 게 틀림없어. 배를 부수다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럴 리 없어, 그 배에는 나와 관련된 건 아무것도.’

세라피나 황후는 평정을 되찾았다.


“로렐 호수라니. 당치 않습니다.”

그때였다. 눈을 가늘게 뜬 마크시스 황제가 되물었다.


“그렇지.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별장에 다녀오지 않았나. 그럼 레브가 본 게 황후가 맞을 수도 있겠군.”

세라피나 황후는 도움이 되지 않는 마크시스 황제를 속으로 원망했다. 그는 그녀가 로렐 호수 근처의 후작가 별장에 다녀오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 그렇군요. 이 사람이 이렇게 정신이 없답니다. 그래서 좀 쉬러 다녀오려 했는데. 호호.”

어색하게 넘기자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였다.


“황태자 전하 드십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비엘이 알현실로 들어섰다.

그는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볼이 조금 꺼져 있었다. 게다가 눈 아래로 다크서클까지 내려와 며칠 식사도 못 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끈하게 잘생긴 외모 탓인지 수심이 가득해 보일 뿐이었다.


“고모님.”

“오, 사비엘. 이제 건강은 좀 나은 거니? 모처럼 대공저에 발길 해주었는데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해 아쉬웠단다.”

“사비엘이 대공저에 갔었다고?”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의 마크시스 황제를 두고 레브가 일어서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비엘을 끌어안고 인사를 나누었다.


“네. 괜찮습니다.”

사비엘은 다급하고 초조해 보였다. 레브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세라피나 황후는 갑작스러운 사비엘의 등장으로 화제가 바뀐 것에 안도했다.

그런데 저 애가 여긴 갑자기 왜 온 거지? 몸이 편치 않아 수정궁에서 쉬겠다더니?

의아한 마음에 세라피나 황후는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입니까.”

“고모님께서 귀국하셨다기에 꼭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후훗. 다 큰 녀석이.”

조카의 말이 싫지 않았는지 레브는 연신 미소를 지었다.


“유테르 공작부인이 알현을 올 때 불러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더니.”

레브와 사비엘의 은근한 유대감이 못마땅한 세라피나 황후가 굳이 입을 대었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 말씀을 올리셔야지요. 황녀.”

세라피나 황후를 피로한 눈으로 보고 있던 황제가 나섰다.


“자, 자. 그만하고. 레브. 조만간 귀국 환영 연회라도 열어야겠구나.”

“저를 그리 반길 사람이 있겠습니까.”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느냐. 그동안 여행한 곳들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네. 황제 폐하. 선물로 사 온 것들은 시종을 통해 전해두었으니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자리가 파하는 분위기가 되자 급히 내온 차에 손도 대지 않고 곁에 앉아 있던 사비엘이 레브의 옷 소매를 잡았다.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

“지금 말입니까? 황태자 전하.”

레브가 세라피나의 말을 따랐다는 듯 눈을 치켜뜨고 그녀를 바라보며 사비엘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세라피나가 무언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인 것처럼 화들짝 했다.


“예. 지금이면 더욱 좋습니다.”

“그러지요.”

사비엘과 레브가 물러간 후, 황후궁으로 돌아간 세라피나는 화를 참지 못했다.


“아악!”

무엇을 향한 분노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일을 시킨 ‘신’인지, 신의 도구로 선택된 자라며 자신을 꼬드긴 ‘신의 대리인’이란 자 때문인지.

레브의 붉은 눈동자 앞에서 꼭 궁지에 몰린 쥐 따위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황후인데.”

이 제국 최고의 고귀한 여인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편으론 이 분노의 근원이 다른데 기인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일레온이 눈을 다시 뜨다니.”

그의 눈을 멀게 할 거라고, 오데르의 상징인 그 눈을 잃어버리면 다시는 사비엘의 자리가 불안하게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절박한 모정으로 두려움을 겨우 이기고 레브의 피를 뽑았건만.

일레온이 다시 눈이 멀었다는 소문이 잠깐 돌다 흐지부지되었고, 그가 멀쩡히 눈을 뜨고 돌아다닌다는 보고를 받고 세라피나는 치미는 분노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데 레브에게 면전에서 그런 말까지 듣다니.


“나와! 나오라고!”

신의 대리인의 뻔뻔한 얼굴이라도 한 대 후려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세라피나는 레브의 피를 숨겨둔 곳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붉은 피가 든 유리병이 여전히 잘 있었다.


“신이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뭔가를 결심한 듯한 세라피나는 감춰둔 유리병을 하나 꺼냈다.

***

태양궁의 알현실을 빠져나온 레브가 사비엘을 돌아보았다.


“무엇을 묻고자 하였지?”

“그…….”

사비엘은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며칠 전, 그는 클레벤트 대공저에 찾아갔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거기에서 카리나를 마주치고 말았다.

분명 부관이 은밀히 처리했다고 했건만 그녀가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고 있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부관은 그날로 사비엘의 칼을 맞고 병가 중이었다.

<“전하, 제가 전하의 아이를 가졌어요.”>

<엘리시아가 울먹이며 말했다.>

<“사비엘, 당신의 아이예요.”>

정신이 흐릿해지면서 의식의 아래 가라앉아 있던 암시가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사비엘 그 스스로는 그것이 암시 때문인 줄은 몰랐지만, 아이를 가진 여인을 떠올리기만 해도 울렁거리면서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실로 사비엘은 미쳐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광증이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여인의 목숨 하나에 집요하게 온 신경이 쏠려 있지 않은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카리나를 해쳐야만 사비엘 그가 살 수 있었다.


“사비엘. 안색이 좋지 않은데.”

“예. 예에. 고모님. 별일 아닙니다. 아닙니다.”

사비엘은 횡설수설하고는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가 달아나듯 그 자리를 피했다.


“헉. 헉.”

뭔가 머릿속에서 날뛰는 기분이었다. 레브에게 카리나가 어째서 대공저에 머무르게 되었는지 물었어야 했는데.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그러고 나면 그 여자의 목을…… 목을…….


“아아악!”

사비엘은 고통스레 머리를 쥐어뜯으며 침대도 아닌 바닥을 굴렀다. 무언가 속에서 가슴 한복판과 그의 머릿속을 물어뜯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때 기척도 없이 소나텍이 다가왔다.


“소, 소나텍.”

사비엘은 살길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일으켜 검은 후드의 자락에 매달렸다.


“이 고통을…… 끝내다오. 내게 어서 약을.”

“쉬이. 괜찮습니다. 황태자 전하.”

“아니. 난 나을 수 없을 거야. 카리나. 그녀가 내 아이를 가진 채 도망쳤어. 그 여자는 나를 망치고 말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 진정하십시오.”

사비엘을 부축하듯 끌어안은 소나텍의 손끝에서 검은 새가 솟아나 폴폴 날아올랐다.


“곧 편해지실 겁니다.”

사비엘의 주변을 맴돌던 새가 머리에 내려앉자 사비엘은 고른 숨을 내쉬며 곧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소나텍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악몽의 속을 헤매고 있겠지?”

검은 새의 궤적을 쫓다 보면 어느새 망상의 세계에서 카리나를 두 번, 세 번, 끝없이 가련한 숨을 끊을 테니.

곧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더 이상 오데르의 피를 얻기가 힘들 텐데. 암시가 깨져버린 일레온을 어째야 할지 모르겠군.”

카리나를 제 자리에 돌려 넣기 위해서라면 일레온이 엘리시아를 잊는 게 먼저였다. 그래야 카리나에 대한 감정을 품을 수 있을 테니까.


“그 정도까지 수정할 수 있으려나.”

펜에 남은 잉크는 이제 아주 조금이었기에 소나텍은 양을 가늠해보았다. 어쨌든 수정을 덜 할 방법은 그에게도 아직 여럿 있었으니 조급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방구석의 그림자에 녹아들 듯 몸을 숨긴 그가 다시 튀어나온 곳은 밝은 창에 얇고 깨끗한 커튼이 걸린 소담한 방이었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 머물렀던 것 같은 방은 비어 있었다.

소나텍은 코로 숨을 내쉬고는 가면과 검은 후드를 벗어 구석에 잘 정리했다.

달칵.

문 안으로 카리나가 들어왔다.


“앗, 언제 오셨어요? 선생님.”

“방금요. 몸은 좀 어떤가요?”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훨씬 좋아졌어요.”

“다행이네요.”

“선생님께서 치료를 잘 해주셔서 그렇죠.”

“또 그렇게 부르네요. 편하게 대해달라니까.”

상냥한 청년의 말에 카리나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럴게요. 소나텍.”

카리나를 보며 소나텍은 미소지었다.

펜을 쓰지 않고도 전개를 건드릴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

푹 자고 눈을 뜨니 언젠가 본 것 같은 광경이 보였다.

살색.

그리고 일레온의 보기 좋은 곡선을 그리는 목울대.

……훕.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는 남자는 탄탄한 상체를 드러낸 채였다.


‘어제 누울 때는 분명히 잠옷을 입고 있었잖아?’

또 잘 시간이 되자 일레온은 그녀를 자신의 침실로 데려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황녀 전하께서 보고 계신데 어떻게 이래요?」

 
쩔쩔매는 엘리시아에게 일레온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머니께서는 아까 저택으로 가셨어. 내일 황제 폐하를 알현하실 예정이라.」

「아무리 그래도.」

「뭐가 문제지? 언제 그대가 위험해질 줄 알고 다른 데서 쉬게 한단 말인가?」

 
그래서 결국 손만 잡고 자기로 했는데.

일레온의 손이 제 허리를 잡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야 해.’

그가 눈을 뜨기 전에. 으아아! 이 상태에서 일레온이 잠이 깨기라도 하면 얼마나 부끄러울까.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제발…….


“엘리시아.”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남자가 잠결인 듯, 잠이 깨려는 듯 숨을 내쉬며 입술 끝을 휘었다.


“숨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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