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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첫사랑 (88/151)


88. 첫사랑
2022.11.05.



 


“예전에 로나가 해줬던 것처럼.”

일레온의 말에 엘리시아는 흠칫 놀랐다.

그의 길고 보기 좋은 손가락이 바구니에 놓인 빵을 잘게 찢어다 수프 그릇에 떨어뜨리는 걸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 해봐.”

“아.”

얼결에 입을 벌리자 일레온은 그녀의 입 안에 수프에 적신 빵 조각을 넣어주고는 세상 행복한 얼굴이었다.

엘리시아는 당황스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혼자 먹을 수 있어요.”

“알아.”

“그런데 왜…….”

“이런 거 아무한테나 해주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일레온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시선을 피하려다 뜨거운 수프를 머금은 씹지도 않은 빵조각이 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으. 콜록. 콜록.”

“괜찮아? 천천히 먹어야지.”

“무, 물 좀.”

엘리시아는 차가운 물을 마셨다. 겨우 정신을 차린 엘리시아는 의자를 들고 일레온이 제 쪽으로 이동해서 비어 있는 원래 그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런 엘리시아가 하는 짓을 보고 있던 일레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피하지?”

“배고프죠? 얼른 드세요. 식기 전에. 저도 배가 고파서.”

하지만 일레온은 다시 의자를 들고 엘리시아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뭐가요?”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기분이랄까. 먹여주고 싶어.”

“왜, 왜요?”

엘리시아는 자신을 느리게 훑는 일레온의 눈빛에 몸이 살짝 떨렸다.


“글쎄. 왤까?”

왜인지 이유를 맞추면 또 그에게 뭔가를 내어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어떤 것들은 진작에 구두로 저당 잡혀버렸다. 이제는 정말 나중에 뭘 해주겠다 하고 빠져나갈 만한 것도 없는데. 엘리시아는 요리가 가득 차려진 테이블을 내려다보다 비장하게 수저를 들었다.


“배고프죠? 다 식어버렸네. 당신도 먹여줄게요.”

엘리시아가 수프를 떠서 내밀자 일레온은 눈을 감고 그것을 받아먹었다.

꿀꺽.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보면서 엘리시아는 등 뒤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수프를 한 입 받아먹고는 천장에 매달아놓은 굴비를 보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이유가 뭐냐고.

아, 안 돼. 이러면 안 되는데.

어제 마리엘라가 정식으로 약혼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가문의 이름에 먹칠할 짓을 해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건 평소 마리엘라의 성격 대로라 뭐 그러려니 했는데 문제는 레브였다.

마리엘라가 진지한 얼굴로 제 양어깨에 손을 올리고 잔소리 할 때, 엄마의 어깨 너머로 보인 황녀는 다리를 삐딱하게 짚고 불량한 자세로 서 있었다. 팔짱까지 낀 채 마리엘라가 제게 하는 말을 엿듣고 ‘턱도 없는 소릴 하는군. 애들을 믿느니 내 슬리퍼를 믿겠어’ 하고 중얼거리는 걸 엘리시아는 들어버렸다.

저분이 대체 뭘 어디까지 아는 걸까?

정말 대공저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또 먹여줘. 응? 로나.”

애칭인 양 다정하게 로나라고 부르기까지 하다니. 제일 문제는 일레온 그 자체였다.

마리엘라의 당부를 요약하자면 ‘선 넘지 말아달라’라는 거였는데 일레온은 선이 없달까. 그는 그녀가 불명확한 선을 만들면 불만스러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부숴버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일도 있었다.


“일레온. 당신은 로나가 좋은가 봐요. 로나처럼 해달라는 말 벌써 몇 번째인 줄 알아요?”

망설이다 겨우 꺼낸 그녀의 말에 일레온은 아무렇지 않게 긍정했다.


“맞아. 그 여자가 내 첫사랑이거든.”

예전에도 몇 번이나 일레온이 ‘로나’를 ‘그 여자’라며 다른 사람인 것처럼 지칭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 그대가 로나보다 더 사랑받겠지. 그 여자는 한 번 도망간 전적이 있거든.」

 
도망가지 말아달라고 말했을 때도 그런 식이었다.

그때는 기억을 잃고 대공저의 메이드로 일했던 ‘로나’를 엘리시아 그녀 스스로도 따로 떼어 생각하고 있어서 아무렇지 않았는데.


“로나의 웃음소리는 정말 듣기가 좋았어. 로나가 웃을 때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빛이 비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일레온이 엘리시아의 턱을 쥐고 그를 보게 했다.


「머리카락은 금발인데, 조금 흔치 않은 금발이랄까요. 부스스한 색이 아닌 잘 우러난 차처럼 색이 짙답니다. 그리고 눈동자 색은 보랏빛인데 이것도 아주 흔한 보랏빛은 아닙니다. 색이 진한 데다 웃을 때마다 초롱초롱하게 반짝반짝 빛을 내는데 순수하고 귀여운 인상이랍니다.」

 
집사가 그렇게 말했었단다. 언젠가 엘리시아가 사람들이 그가 눈이 보이지 않아서 쳐다본다고 생각할까봐, 나 때문이라고. 내 외모가 튀어서 그렇다고 둘러대며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머리색을 한 여자를 찾을 때.


“어쩐지 분하군. 집사도 본 웃는 얼굴을 난 아직도 한 번도 제대로 못 봤단 말이지.”

일레온이 집요한 눈빛을 누그러뜨리며 부드럽게 그녀를 졸랐다.


“웃어봐. 엘리시아.”

“아…….”

엘리시아는 아랫입술을 안쪽에서 깨물었다.

난처하기 짝이 없다.


‘일레온. 내가 아니라 로나를 좋아해.’

자꾸만 그가 로나와 예전 엘리시아, 그리고 지금의 자신을 구분 지어서 말할 때 계속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로나처럼 소리 내서 웃어봐. 그게 그렇게 어렵나?”

“신전에서는 늘 조용조용 말하거든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엘리시아는 겨우 변명했다.


“그리고 당신이 아프니까, 로나는 당신을 모시는 게 일이니까. 일부러 더 그렇게 소리를 크게 내거나 했던 것도 있어서.”

“흠. 그런가. 그런 점도 있었겠군.”

엘리시아가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던 일레온이 진지한 얼굴로 몸을 돌려 그녀의 허리께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러면 웃을 수밖에 없을 텐데.”

“아! 하지 마요.”

일레온이 양 옆구리를 간지럼 태우자 엘리시아는 일어나서 도망치려 했다.


“어딜. 내가 놓칠 것 같…….”

“흑. 흐흑.”

방어적으로 몸을 웅크리려는 엘리시아를 장난스레 끌어안던 일레온이 일순 굳었다.


“엘리시아? 우는 건가?”

일레온은 물기를 가득 머금은 자수정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어쩔 줄 몰라했다.


“미, 미안. 그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어.”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흑.”

“내가 잘못했어. 아팠나?”

일레온이 꼭 안고 등을 쓸어주며 그녀를 달랬다.


“괴로워서…….”

“그래. 앞으로는 절대로 그대가 싫어하는 건 안 할 테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

일레온이 머쓱한 투로 계속 말을 걸었다.


“내가 눈을 뜨기만 하면 뭐든 해주겠다고 했었잖아. 좀체 웃어주지 않으니까 웃게 해보려고 한건데. 그렇게 힘들어할 줄 몰랐어.”

“미안해요.”

엘리시아가 작게 중얼거리자 일레온이 과장을 보태어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대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었어. 내가 과했던 것이니.”

“……미안해.”

그녀의 말 한마디에 일레온이 황망한 얼굴을 했다가 곧 입을 다물고 손끝으로 눈물을 거두어주었다.


“뭘 먹을 기분이 아닌 것 같은데. 좀 더 쉬는 게 좋겠군.”

엘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레온이 그녀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일레온이 침실 문을 닫고 사라지자 엘리시아는 침대 위에서 꾸물꾸물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나자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떡하지.”

눈물이 금세 차올랐다.

자신을 보면서 로나와 닮은 곳과 아닌 곳을 찾던 일레온이 떠올랐다.

많은 순간, 순간들이 엘리시아에게는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처럼 느껴졌었는데.

그가 좋아하는 건 기억을 잃었을 때의 ‘로나’고 지금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로나가 아닌데.”

그거야말로 듣고 또 들어서 나 자신인 줄 착각할 정도로 익숙한 엄마의 전생 기억의 일부일 뿐인데. 심지어 원윤지도 아니다. 전해 듣는 것만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오롯하게 베낄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어.”

일레온이 그녀가 세상에 존재하는 줄 알지도 못할 때, 엘리시아는 그를 알았고 벌써 그를 좋아했다.

어린아이들이 공주님과 왕자님이 주인공인 동화책을 읽으면서 두 주인공을 아끼게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건 잘못 태어난 제 탓이고, 자신만 원작의 밖으로 나가면 일레온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알아.」

「당신이 좋아하는 그 여자 아닐 수도 있어요.」

「상관없어.」

 
상관없다고 했었다.


「자꾸 도망가려고 핑계 찾지 말란 말이야. 내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기뻤는데.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일레온이 상관없다고 말해도 엘리시아 자신이 연연해 한다.

언제 그가 자신이 로나가 아니라는 걸 확신해버릴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면서 말이다.


“쉬운 일이 없을 텐데.”

그녀를 구명하기 위해 제국을 떠나려던 부모님이 모든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거기에 일레온 뿐 아니라 황녀인 레브까지 도움을 주기로 한 상태였다.

그것이 대외적으로는 두 집안의 결합, 가문끼리의 혼사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 모든 건 일레온이 엘리시아를 사랑해서,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감수하고 걸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한 일이었다.


“그가 나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일레온은 그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는데.

정말 할 수 있다면 어디서 머리라도 세게 맞고 기절해서 그때처럼 걱정 많고 불안하고 우울한 자신을 잊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아.”

엘리시아는 한참을 웅크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어쨌든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베르베를 향하던 배에서 뛰어내려 일레온의 손을 잡았을 때 돌이킬 수 없어진 셈이었다.


“로나처럼. 로나처럼 해달라고 했으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엘리시아는 두 주먹을 꼭 쥐고 심호흡을 했다.

***



“엘리시아.”

일레온이 바쁜 일을 처리하는 사이 엘리시아는 대공비의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왔어요?”

엘리시아는 읽던 책을 넓은 창틀에 내려놓았다.


“보고 싶었어.”

일레온이 희고 작은 여인의 손등에 입술을 문질렀다.


“제대로 하고 온 거 맞아요? 잠깐만요.”

엘리시아는 타박하듯 말하며 조금 흐트러진 그의 앞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어.”

그 손길에 일레온이 멈칫하다가 곧 표정이 환해졌다.


“흐트러져 있었나?”

“조금요.”

쑥스러운 듯 손으로 귓가를 괜히 만지는 일레온을 보며 엘리시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잖아? 로나가 했던 것처럼 해주니까 저렇게 좋아하는 것 좀 봐.’

로나는 일레온을 보살피는 게 일이라 그때는 머리고 옷이고 일레온이 혼자 해보다 흐트러진 데가 있으면 자주 손보아주곤 했다. 말투도 죄 잔소리하는 투가 되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감히 주인에게 잘못된 곳, 하면 안 되는 일 등을 간섭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레온은 그때 안 입던 잠옷을 저 때문에 입고 자려 할 정도로 좋아했었다고 하니까.

이런 식으로 로나가 하던 것처럼 챙겨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궁리해본 거였는데.

예상대로 반응하는 일레온을 보니 잘됐다는 생각보다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서 있어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차를 내어드릴게요.”

일레온은 홀린 듯이 엘리시아가 손짓한 대로 그녀의 옆에 가서 앉았다.


“큼. 흠. 그러게 집무실에 같이 갔으면 좋았잖아. 일을 서둘러 끝낼 필요도 없었을 거고.”

“그 말은 마치 빨리 끝내려고 대충 처리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로나처럼 말꼬투리를 잡아보았다.

로나처럼.


“그럴 리 없잖아. 이래 봬도 꽤 괜찮은 영주라고.”

“오늘은 스피아민트차와 올리비에가 직접 따서 말린 데이지 꽃차가 있어요. 뭘로 드시겠어요?”

“단 냄새가 좀 나는데.”

“스피아민트차가 설탕시럽에 담가서 재운 차예요.”

“그럼 민트차로 한잔 부탁하고 싶군.”

끈적한 차를 스푼으로 찻잔에 덜며 엘리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일레온은 단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따뜻한 물을 붓자 금방 달큼하고 시원한 향이 주변에 흘렀다.


“데이지를 마시려고 할 줄 알았어요.”

“그래?”

“당신은 단 걸 안 좋아하니까.”

엘리시아의 말에 일레온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불량하게 웃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엄청……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얼굴인데.”

요즘 일레온의 사소한 입술꼬리, 눈썹의 움직임 하나에 저도 모르게 긴장할 때가 있었다. 그동안 몰랐는데 마치 사냥 습관인 듯 일레온이 저런 표정을 짓고 나면 엘리시아는 몸 어딘가를 그에게 물리곤 했기 때문이다.


“잔 내려놔.”

“왜요? 시, 싫어요.”

일레온은 다 마시고도 내려놓지 않던 찻잔을 엘리시아의 손에서 뺏어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앗.”

그대로 그에게 끌려가 안기자 별렀다는 듯 입술이 포개어졌다.


“흐읏.”

일레온의 숨이 지날 때마다 혀끝에서 달콤한 민트맛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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