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제일 위험한 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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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제일 위험한 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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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제일 위험한 건 나
2022.11.16.
“쇼. 내가 그 사람을 속상하게 했어.”
“냐.”
엘리시아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쇼가 울었다. 마치 왜? 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일레온은 내게 실망했겠지?”
제 기억 속에 떠오르는 로나를 되짚어보았다.
그녀는 자신처럼 하루하루 죽을 운명에 목이 졸리지도, 불안해 하지도 않았다.
로나의 선택을 좌우하는 가장 큰 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본능이었다. 그 와중에도 여기가 책 속이라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로나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엘리시아는 손으로 제 얼굴을 더듬더듬 만졌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아.
분명히 사람들이 거룩한 신의 양이라고 감탄하곤 하는 무감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
그는 한번 웃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고 했지만, 사실 그녀에겐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살면서 그런 식으로 웃어본 적이 있었을까? 엘리시아는 웃을만한, 감정이 크게 술렁일 기쁘고 즐거운 일을 겪어본 기억이 없었다.
로나일 때도 그런 웃는 얼굴을 스스로 본 적은 없으니까 그 느낌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겠지 상상만 할 뿐이었다.
“휴.”
“냐아.”
한숨을 쉬자 쇼가 또 뭔가 아는 것처럼 따라 울며 엘리시아의 다리 위에서 배를 보이며 드러누웠다.
“후훗.”
귀여운 어리광에 엘리시아가 작게 웃자 쇼가 폴짝 뛰어 책상 위로 올라앉았다.
“냐아옹.”
긴 울음소리에 엘리시아는 얼른 가 쇼를 품에 안았다.
“안 돼. 밤에 그렇게 울면 쫓겨나.”
“냐아.”
이번에는 기어코 그녀의 품에서 몸을 돌리더니 쇼가 앞발로 서랍에 매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엘리시아는 서랍을 열고 조심스레 서랍 구석을 손톱으로 건드렸다. 그러자 얇은 나무판이 슬쩍 들리며 그 아래에 깔린 얇은 노트가 보였다.
“휴. 다행이다. 아직 있었구나.”
그레로사로 가는 길에 사고가 난 후, 벌써 꽤 오래 시간이 지났다. 다른 신관이 이 방을 쓰거나 했다면 제 물건이 없어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엘리시아는 다른 이들과 달리 실종 상태였기 때문에 돌아오라는 뜻으로 그녀가 쓰던 방 만은 비워두었다고 했다.
엘리시아는 얄팍한 노트의 표지를 넘겼다.
익숙한 제 손글씨가 보였으나, 처음 부분은 훨씬 어릴 때 쓴지라 조금 삐뚤삐뚤했다.
<어느 날 엘리시아는 사고로 기억을 잃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일레온과 마주친다.>
맥락 없는 문장으로 시작한 그것은 이른바 망상 노트였다.
열두 살 때였나.
그해 신년제 전에 대 기도회에 참석했던 마리엘라가 기도실로 엘리시아를 찾았다.
「요즘은 무얼 하며 지내고 있니?」
「교리 공부가 거의 끝나가요.」
「그렇구나.」
신전 안에서 어린애들이 할만한 놀이 같은 건 딱히 없었다. 엘리시아는 그때 한창 사춘기의 초입이었다.
저를 이렇게 살게 한 엄마에 대해 야속한 마음이 클 때였다.
「엘리시아. 무료할 때가 있으면 글을 써보렴.」
「왜요? 다음에 오실 때 검사하려고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난 단지…….」
되바라진 볼멘 투에 마리엘라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커졌다가 미안한 감정을 담고 슬퍼졌다.
「글로 쓴 소망은 강력한 힘을 얻는단다. 무엇이든.」
마리엘라가 돌아가고 난 후, 엘리시아는 심통이 났다. 하지만 하듄샤의 안에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줄 사람은 없었다. 엘리시아는 어린 나이였지만, 때때로 엄마의 빙의 나이를 따라 스물일곱 살인 것처럼 말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마리엘라가 미리 알려준 대로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활이 끝없이 수년간 이어졌기에, 본래 나이의 정서적 발달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꽁해진 속을 다스릴 방법이 없었다.
<일레온은 기억을 잃은 엘리시아를 자신의 집에 살게 해줬다. 방은 따로 썼다.>
그래서 이 노트를 썼었다.
<일레온이 엘리시아를 좋아해서 결혼도 하고 싶어한다.>
마리엘라가 싫어할 만한 것들을 잔뜩 적어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반항과 금기의 대향연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다 조금 더 지나 소녀 감성이 자랄 즈음이 되자 그것들이 내용에 반영이 되었다.
<엘리시아와 일레온은 첫 입맞춤을 나누었다. 물론 둘 다 서로 처음이었다.>
문득 쇼가 글자를 읽는 것처럼 그녀가 쓴 글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보지 마. 창피해.”
“냐옹.”
엘리시아는 노트를 덮어 서랍에 넣으려다가 도로 책상에 펼쳤다.
펜을 꺼내 든 엘리시아는 빈자리에 글을 적어넣었다.
<직접 만나본 일레온은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엘리시아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지만, 실은 만나기도 전부터 좋아했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하고 싶다. 일레온의 옆에 있고 싶다. 그런데 그가 실망하는 것처럼 보이면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엘리시아는 고민하지만 곧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글로 적으면 소원이 힘을 얻는다던 엄마의 말에라도 기대고 싶었다.
엘리시아는 노트를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
일레온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 엘리시아가 대공저를 떠나고 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엘리시아와 이런 말다툼을 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계획의 큰 그림은 마리엘라가 짜고 있으니 딱히 거스를 수 있지도 않았다. 일레온은 겨우 울컥하는 마음을 누르며 날이 밝으면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집사를 통해 건네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서둘러 당장 가겠다더니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엘리시아와 그의 어머니를 둘러싼 비밀은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완전히 허구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일레온 그 자신이 신화 속 오데르의 힘을 이어받았으니까.
그녀가 그런 사정으로 말을 못 하는 것이 있을지언정 솔직한 성격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겉도는 대화로 며칠을 흘려보냈다 생각하니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 아까워.
그렇게 둘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계속 이어지리라 여겼는데, 이런 식으로 엘리시아가 멀어질 줄 몰랐다.
천천히 다시 이야기를 잘 나누면 될 줄 알았는데, 거리를 두고 답답하게 구는 엘리시아를 ‘함께 하기 위해서’라며 저택 밖으로 내보내다니.
일레온은 불쾌한 감정을 곱씹다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미친 것 같군.”
엘리시아가 며칠 태도가 달라져서 그것만으로 이렇게까지 기분이 상한 게 아니었다.
“하듄샤라.”
그녀가 저택 밖으로 나간 것, 그의 영역을 벗어난 것 자체가 거슬렸다.
배로 엘리시아를 쫓아갔을 때 그녀가 자신을 거부한다면 억지로라도 잡아 올 생각이었던 건 진심이었다.
그에 이어서 오늘은 ‘계획’을 논한 이가 레브와 마리엘라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절대로 안 된다고, 엘리시아를 넓고 큰 저택에서 가장 찾기 힘든 어느 곳에 가두기라도 했을 것 같았다.
이런 충동이 드는 게 정상인가?
보통 사람들은 연애에 이런 격렬한 감정을 다들 느끼는 건가?
일레온은 이렇게까지 몰리는 감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생사를 가르는 전쟁터 한복판에서조차 그는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높은 확률로 살 거란 걸 그의 피가 약속했다.
그러니 긴장하지 않는다.
쉬이 초조해지지도 않았다.
“엘리시아에게 제일 위험한 건 나일 수도 있겠는데.”
그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릴 때였다.
똑똑.
집무실 문을 두드린 베르나르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가지고 들어왔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주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이 들 것 같지 않군.”
보통 사람들은 이럴 때 술이라도 마실 텐데. 안타깝게도 오데르의 몸은 취하지도 않았다. 정신이 강제로 아슬아슬하게 벼려진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면 주신의 축복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일레온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자비였다.
“엘리시아 님이 걱정되셔서 그러십니까?”
베르나르가 운을 띄우자 일레온은 컵을 들어 올리다 말고 도로 내려놓았다.
“글쎄. 내가 뭘 걱정하는 건지도 모르겠군.”
엘리시아의 신상은 괜찮을 거라고 마리엘라가 호언장담하였으니, 그녀에게 너무 목을 매고 있는 제가 문제인가? 일레온이 생각할 때였다.
“외람되지만, 전하. 엘리시아 님과 결혼하고 싶으신 게 맞으십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당연한 거 아닌가.”
눈먼 짐승을 대신해서 수년간 저택을 돌봐온 집사는 기억을 잃고 일하던 로나가 납치될 때부터 기억을 찾은 엘리시아가 머무는 동안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일레온이 암시에 걸려 카리나를 대공비의 방에 데려갔을 때가 가장 기괴했다고 멋쩍게 말하기도 했다.
이제는 레브와 마리엘라가 의논하는 자리에 차를 내어가거나 하는 일은 베르나르만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대공저에는 여전히 일하는 이가 적었고, 눈치 빠르고 영리한 집사는 이 일이 집안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될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는 시중드는 이들을 단속했다.
“그러시군요.”
“집사. 그 반응은 뭔가? 탐탁하지 않아 보이는데.”
“아닙니다. 제가 감히 주인님께 그리하겠습니까?”
‘외람되지만’ 하며 운을 띄운 것 치고는 평소 베르나르의 성격과 달리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로 베르나르는 아예 말을 안 하면 모르되 직언하는 편이었다.
“자네답지 않군. 내게 시위하는 거로 보이지 않나.”
“하하.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만.”
“왜 그러지? 자네가 괜한 일로 그러진 않을 텐데. 나중에 나무라는 일은 없을 테니 말해보게.”
베르나르가 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목소리를 좀 더 낮추었다.
“엘리시아 님은 로나 양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진지하게 하는 말에 일레온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주인님. 주인님께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이걸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베르나르가 푹 한숨을 쉬었다.
“로나 양이 하던 일은 주인님을 모시는 게 아닙니까.”
눈이 보이지 않던 때의 일레온은 꽤 안정이 되고 나서야 규칙적으로 살려고 애를 썼을 뿐 그전에는 대단히 불규칙했다.
볕을 느끼지 못하는 몸은 밤이 찾아와도 잠들지 못하고, 해가 떠도 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으니.
로나는 그런 생활패턴을 규칙적으로 만들어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하지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일레온이 해 뜬 후에야 잠들고 점심이 지나 일어날 때도 있었으니 그런 날 밤새 말동무가 되어주고 나면 로나도 늦잠을 자게 됐다.
“엘리시아 님은 매일 새벽 기도를 하시더군요.”
“새벽 기도를 했다고?”
“예. 로나 양일 때는 늦게 잠들면 늦게 일어나기도 했는데 엘리시아 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레브, 마리엘라와 이야기가 늦은 시간까지 이어져도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차비를 하고 다섯 시부터 아침 일곱 시까지 매일 꼼짝도 하지 않고 묵상을 했다는 말에 일레온은 놀랐다.
“내 침실을 같이 쓸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저도 잊은 것처럼 행동하셨지 않습니까. 철저히 신관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 그랬지.”
다시 떠올려보아도 정말 기분이 진창에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무표정한 가면을 쓰고 자신을, 이 저택에서 있었던 모든 것을 외면하던 엘리시아.
“그런 분께 자꾸 로나처럼 해보라 말씀하십니까?”
“내가?”
“네. 전하께서 하셨지요.”
그러고 보니 엘리시아가 넌지시 말한 적도 있었다.
「일레온. 당신은 로나가 좋은가 봐요. 로나처럼 해달라는 말 벌써 몇 번째인 줄 알아요?」
뼈가 있는 말이라고 느끼지 않아서 가볍게 대꾸했는데. 실은 아니었던 건가.
일레온은 낭패스러웠다.
“나는 그냥. 그녀가 이 집에 머물게 됐으니 예전에 있던 일들이 떠올라서 말한 것뿐인데.”
로나를 황망히 놓쳤다가 이렇게 그녀가 다시 대공저에 와준 게 좋아서.
“무심하십니다. 그분은 퍽 고민이 많아 보이시던걸요.”
일레온이 또 한 번 미간을 구겼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지?”
“물으신 적이 없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집사를 추궁하며 책임을 전가할 일이 아니었다. 일레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