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키스하는 걸 허락 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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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키스하는 걸 허락 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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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키스하는 걸 허락 하실까?
2022.11.23.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화낼 건가.”
일레온은 낭패스러웠다. 하필이면 목소리가 떨릴 것이 무어란 말인가.
그녀를 다시 보기 긴장했던 것처럼,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그냥 보낸 게 아쉬웠던 것처럼.
갈무리되지 않은 감정이 그의 목소리를 울렸다.
‘신관 엘리시아’는 일레온에게 아릿한 상처로 남아 있었다.
엘리시아가 그를 모른 척 밀어낼 때의 모습이니까.
그런 그녀는 보고 싶지 않았다. 신전으로 돌아갈 준비를 위해 완전히 신관으로 옷과 머리까지 정리한 모습 따위는.
외적으로 신관이 되어버린 엘리시아를 눈에 담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녀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끊임없이 일레온의 가슴을 불편하게 건드렸다.
그가 마리엘라에게 언제까지 엘리시아가 하듄샤에 머물러야 하느냐 묻자, 그녀는 솔직하게 모른다고 답했다.
예언서를 빼내는 데 성공해야 엘리시아가 하듄샤에서 나올 수 있다고 말이다.
그게 언제란 말인가.
사흘 뒤, 일주일 뒤, 어쩌면 몇 달 뒤?
마리엘라의 계획에 무어라 반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레온 자신이 소나텍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냥 검을 휘둘러서 거두어버릴 수 있는 목숨이라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렇게 할 텐데.
뭐가 그리 복잡하단 말인가.
엘리시아와 함께할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잠시의 이별을 참으라니.
일레온은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것 같아 괴로웠다.
전술과 전략은 오랜 세월 몸담은 기사단에서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마리엘라의 말에 귀 기울이고 타당하다는 듯 그녀를 지지해주는 레브마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모르는 적을 상대할 수는 없다.
정보 하나가 병사들의 목숨을 구한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시아를 하듄샤로 보내라는 마리엘라의 말은 그냥 싫었다.
싫어.
싫다고.
얼마나 애 같은 생각인가. 유치하고, 대안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아는 바가 없으니까.
그녀가 하듄샤로 출발하자마자 그래도 얼굴 보고 보냈어야 한다고 후회가 밀려왔다.
엘리시아가 자신을 피하는 것처럼 선을 그은 건 그날 하루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집사의 말을 듣고 곱씹다 보니 혹시나 싶은 말들이 떠올랐다.
오해가 있었을까? 마음이 상했을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한 번이라도 더 보고 보냈어야 했을 것을. 괜찮을 거라고 내가 금방 데리러 갈 거라고 든든한 말이라도 건네고 작고 고운 얼굴을 감싸 다독여줄 것을. 복잡하고 들끓는 감정의 가장 끝에 오는 건 후회였다.
엘리시아를 못 보는 건 내 손해인데.
제 살 깎아 먹는 짓을 했단 말인가.
집사에게 하듄샤에 신관과 독대를 청할 수 있는 기부금은 어느 정도나 내야 하냐고 묻고는 열 배가 되는 금액을 준비해서 날이 밝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왔다.
「엘리시아 님 말씀이십니까?」
일레온을 맞이한 신관이 난감해 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엘리시아 님은 파문당하셨다가 막 하듄샤에 복귀하신지라, 아직 신도분들을 뵙는 자리에 내정되시지 않아서…….」
그는 일레온이 말없이 내민 커다란 금화 주머니를 긴가민가하는 기색으로 살펴보고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곧장 엘리시아를 부르러 갔다.
신관들은 모두 빙의자다.
그들은 진짜로 다섯 주신과 오데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만물 공통으로 섬길 것은 ‘돈’이 아닌가. 이 세계에서 직업도 연고도 변변하지 않다면 생존에 꼭 필요한 건 신앙심이 아니라 돈일 테니까.
그것을 확인하고 나자 일레온은 더욱 김이 샜다. 신전을 가장하여 빙의자 이탈을 막고자 하는 이런 곳에 엘리시아를 두기 더 싫어졌다.
일레온이 복잡한 심경을 한 바퀴 되짚어 올 때까지도 엘리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끌어안은 게 문제였나.
그래도 신전 안인데 허락 정돈 구했어야 했나.
엘리시아의 눈치를 보던 그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화가 났군.”
엘리시아, 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아?
더욱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으로 일레온은 천천히 그녀를 놔주었다.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도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조금 전까지 흔들흔들하던 마음이 중심이 잡힌 듯 딱 멈추었다.
일레온은 찬찬히 신관 차림새의 엘리시아를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에 엘리시아는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기라도 한 것인지, 뒤집어쓴 후드의 양쪽 어깨로 흘러내린 금발의 끝, 하얗게 탈색한 자리를 주먹으로 모아쥐었다.
“왜 그래?”
“그냥…… 이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왜?”
“우습잖아요. 신을 이용하려고 이런 꼴로 있다는 게.”
신의 뜻을 따르는 그들의 종이라는 증거.
눈처럼 새하얗고 때 묻지 않은 흰 종이처럼 희게 변한 머리카락 끝이 못내 신경 쓰이는지 엘리시아는 자꾸만 제 머리카락을 주먹 안으로 숨기려 들었다.
“그러지 마.”
일레온은 엘리시아의 손안에서 그것을 뺏었다.
그리고 천천히 찬란한 금빛이었던, 하얗게 변한 자리에 입을 맞추었다.
경건하게, 무언가를 맹세하는 듯 진지한 일레온의 태도에 엘리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내게 그대는 유일한 사람이야.”
일레온은 진심으로 고해하러 기도실에 들었다. 이 자리에서만은 엘리시아에게 무엇이든 진실만을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여태 거짓으로 그녀를 꾄 것은 아니었지만, 제게 선을 긋는 여자의 마음을 흔들려고 얕은수를 쓴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대가 어떤 모습이든, 어디에 있든 나는 상관없어. 내가. 내가 널 원하는 거니까.”
“……일레온.”
엘리시아가 끌어안는 대로 그의 품에 안겼다. 마음을 온전히 가져간 이의 무뎌진 태도에 일레온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께서는…….”
일레온은 손끝에 사그락거리는 신관복의 감촉을 느끼며 물었다.
“내가 그대에게 키스하는 걸 허락 하실까?”
엘리시아가 얼굴을 붉혔다.
그때 엘리시아를 품에 안고 있는 일레온의 눈앞에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아프지도, 따갑거나 차거나 뜨겁지 않은 신성한 불꽃.
엘리시아의 머리 위로 떠 오른 것이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일레온에게는 일순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예전에 엘리시아가 자신을 잊은 척할 때와 달리 이번에는 그 힘이 그를 밀어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고 나자 겨우 긴장이 풀렸다.
“신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엘리시아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혼자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그토록 너그러우신 신이라니 앞으로 신전에 자주 와야겠군.”
일레온은 눈을 감고 눈 부신 빛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마주 닿은 둘은 한참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엘리시아는 이리스와 함께 하듄샤의 정원을 걷고 있었다.
“빨리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그러게요.”
그들은 계획대로 수장고의 예언서를 건드려보았다.
거기서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책장을 넘겨 읽어왔던 예언서가 마치 제단에 딱 달라붙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분명 무거울 테니 들어 볼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어.”
“맞아요. 내용만 확인하면 되었으니까.”
여자끼리 힘이 달려 그런가 싶어 로벤, 에쇼까지 다시 가 책을 들어보려했지만 그런 문제가 아닌 듯했다.
그들은 수장고 안에서 예언서를 없애려 했다. 빙의자들 모두 그것을 신성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 로벤과 에쇼가 조금 힘들어했지만 엘리시아와 이리스는 아니었다.
“없앨 수도 없다니.”
이리스가 한탄하듯이 작게 말했다. 엘리시아의 한숨이 그 뒤를 따랐다.
예언서를 읽기만 할 땐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찢을 수도, 태울 수도 없었다. 촛불을 가져다 대어보고 화약가루를 떨어뜨리고 불을 붙여보아도 온전했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이 담긴 신물 자체라는 자각이 들었다.
물리적인 법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물건.
엘리시아는 예언서를 건드릴 수 없다는 걸 알고 두려웠다. 다른 이들은 자신을 도우려는 거지만, 그녀에게는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그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건, 엘리시아의 목숨 또한 경각에 달해 있다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남들에게 말 못 할 그늘이 가슴 속에 드리웠다.
“엘리시아 님.”
수련 신관 한 명이 부리나케 그녀를 부르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대신관님께서 부르십니다.”
“알레한드로 님께서요?”
이리스가 엘리시아를 보았다.
“엘리시아 님은 파문당하셨으니까요. 알레한드로 님께서 다시 면담을 하려 하시겠지요.”
“당분간은 머물러야 할 텐데.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전에 마리엘라가 하듄샤에 머물게 해달라고 할 때 너무 냉정하게 그녀를 파문하던 대신관의 태도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하듄샤는 빙의자들을 거두어 머물게 하는 곳으로 대외적으로 교단의 형태를 갖추어 역할을 할 뿐 내부적으로는 정말 다들 신을 섬기고 있는 건 아니었다. 신탁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고위 신관이 엘리시아와 로벤, 에쇼 셋 정도에 불과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는 엘리시아를 굳이 밖으로 쫓아냈던 셈이다.
“나중에 뵙겠다고 말씀드릴까요?”
눈치를 보던 수련 신관이 물었다.
“아니에요. 지금 바로 뵈러 가겠습니다.”
“저도 같이 갈게요. 엘리시아 님.”
이리스가 뒤를 따랐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축복이 함께하길.”
오랜만에 보는 알레한드로는 피로한 듯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예전에는 젊어 보이는 얼굴에 새하얀 머리카락이 특유의 신성해 보이는 느낌을 주곤 했는데, 고작 반년 사이에 좀 더 나이를 먹은 탓인지 나이 들어 보이고 초췌해 보였다.
‘손은 또 왜 저러시지?’
알레한드로는 대신관이다보니 다른 빙의자들과 달리 몹시 바쁜 몸이었다. 하듄샤와 교단이 제국민들을 상대로 종교로 주관하는 모든 행사에 참여하다 보니 콘스탄스 제국 전역을 돌아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그가 스스로 생활에 필요한 일을 하거나 다칠만한 험한 일을 직접 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알레한드로의 손에 매인 붕대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갔다.
“알레한드로 님. 손을 다치셨어요?”
엘리시아가 염려하자 그에 대답하지 않고 알레한드로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에게 향했다.
“엘리시아.”
“네. 대신관님.”
“그대는 파문당한 몸이 아닌가.”
“기억이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하듄샤에 막무가내로 돌아오다니.”
대화를 듣던 이리스가 끼어들었다.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신관이 아닌 빙의자라도 여기가 책 속 세계라는 첫 신탁밖에 갖지 못한 이들도 하듄샤로 오면 받아주는걸요.”
“엘리시아는 상황이 다르지. 절차라는 게 있지 않나?”
“엘리시아 님이 뭐가 다른데요?”
“신관 엘리시아를 모르는 이가 없는데. 수도에 파다한 소문을 모르나? 게다가 파문당한 상태에서 사교계 데뷔를 하고 대공이 구혼하고 있다고 염문설까지 뿌리고는. 어찌 하듄샤에 다시 발을 들인단 말인가.”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면담실 안으로 로벤과 에쇼가 들어왔다. 그들의 머리 위를 떠도는 광휘를 보며 알레한드로의 얼굴이 굳었다.
“엘리시아의 복귀는 대신관님 혼자 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로벤이 말하자 에쇼의 머리 위에서도 스파크가 튀었다.
“신의 뜻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알레한드로 대신관은 불쾌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파문당한 신관 엘리시아는 하듄샤에 발을 들이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엘리시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하듄샤로 돌아왔습니다.”
엘리시아가 두 손을 기도하는 자세로 가슴에 포개고 눈을 감자 그녀의 머리 위로, 또 동시에 로벤, 에쇼의 머리 위로 동시에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이리스와 수련 신관들의 눈이 커졌다.
엘리시아와 신관들의 입에서 동시에 신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신관 엘리시아가 하듄샤로 돌아온 건,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뜻입니다.”
알레한드로의 얼굴이 금이 간 듯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