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살림을 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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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살림을 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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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살림을 차리지
2022.11.30.
“여기서.”
털썩.
일레온에게 밀린 탓에 엘리시아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야트막한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자, 천장이 낮은 탓인지 일레온은 평소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엘리시아의 심장이 갑자기 쿵쿵 소리를 냈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하듄샤는 빙의자들의 커뮤니티에 가까웠다. 그래서 실제로 어마어마하게 생활 규율이 엄격하거나 하지 않은 편이었다. 일례로 여자 신관인 이리스나 자신의 방에 남자 신관인 로벤이나 에쇼가 드나드는 것도 문제는 없었다.
교리 신관이 이 세계의 신교 교리를 읊는 건, 하듄샤가 이곳에서 실제로 신전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마치 한 편의 연극 속에서 ‘신관’이라는 배역을 맡기로 했으면, 온당히 신관으로서 해야 할 말과 행동이 있으니 말이다.
신도들에게 기도회를 열 수 있는 고위 신관이 정해져 있고 나머지는 매일 봉사활동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빙의자들 입장에서는 하듄샤의 신관이란 건, ‘진짜 신관’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눈먼 짐승의 꽃> 세계의 비밀을 아는, 원작을 아는 다른 세계에서 온 입장에서 아무리 역할에 몰입해도 진짜 신관이라 여길 리 없다.
그러다 보니 하듄샤 내에서 연애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오히려 책 속 세계의 사람과 연을 맺는 것보다 같은 기억과 추억을 가진 이들끼리 서로를 위로하고 이해하다 보면 마음이 통할 때가 많기 때문이었다.
얼마든지 연애하다가, 결혼을 해서 하듄샤에서 나가겠다고 하면 신전에서 밖에 집을 마련하거나 할 정착지원금을 줄 정도였다.
어쨌든 하듄샤에서 연애 금지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다, 당신 방에서 쉬는 게 낫지 않아요?”
일레온의 눈빛이 못마땅한 티를 내는 걸 보면서 엘리시아는 괜히 긴장이 됐다.
“엘리시아.”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른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눈높이를 맞춘 붉은 눈동자가 점점 제게 가까이 다가오자 엘리시아는 눈을 꽉 감아버렸다.
‘응?’
하지만 기다리던 입술을 제게 닿지 않았다. 엘리시아는 도로 눈을 떴다.
“눈은 왜 감아?”
일레온이 장난스레 눈을 휘며 후드를 넘기더니 가발을 벗었다.
“붕대 좀 풀어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네?”
머리 위에서 스파크가 터지며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엘리시아는 신탁을 닫아버렸다.
일레온을 만날 때는 늘 주신들을 차단하곤 했는데, 오늘은 알레한드로가 갑자기 파문 건으로 면담을 한다고 부르는 바람에 잊고 있었다.
‘음흉하게 뭘 보려고.’
방금 전까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던 다섯 주신들을 생각하니 엘리시아는 치가 떨렸다.
“혼자 할 수 있잖아요?”
일레온은 눈 아래 제 얼굴을 여태 둘둘 말고 있는 붕대를 손으로 더듬었다.
“아까 감을 때는 집사가 도와줘서.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군.”
엘리시아는 짧게 한숨을 쉬며 이리저리 살피다 안으로 잘 끼워 넣어진 붕대의 끝을 찾았다. 답답할까봐 그랬는지 얇고 가느다란 붕대로 여러 겹을 감싼 탓에 다시 쓰려면 조심조심 풀어야 할 것 같았다. 엘리시아는 푸는 대로 손에 둘둘 말면서 붕대를 정리했다.
“다 됐어요.”
“이제 살 것 같네.”
일레온은 제 얼굴을 거칠게 손으로 훑었다.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그런 남자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가발을 썼다 벗은 탓인지, 늘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삐죽 흐트러졌다. 붉은 눈동자에는 조금 피로한 느낌이 담겼다. 방금 붕대를 풀어낸 얼굴은 한참 눌린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붉어 보였고, 결론적으로 뭔가 불량하고 퇴폐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말도 안 돼.
일레온 클레벤트의 이런 모습이라니.
팔레가라 전쟁사를 읽어주다 잠들어서 한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도 일레온은 이런 식으로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다. 그것을 ‘로나’ 시절에도 남주 버프인가보다, 아침에도 굴욕 없이 뽀송하다니 – 정도로 여겼던 엘리시아 입장에서는 어쩐지 홀린 듯 눈을 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신관복.
별 장식도 없고 밋밋한 흰색 신관복을 17년을 입고 살았는데, 어째서 일레온이 입으니까 한층 거룩하고 신성해 보이는가.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다시 신탁을 열고 다섯 주신에게 뭔가 고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엘리시아.”
저도 모르게 일레온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네?”
“눈 감아.”
“왜요?”
불쑥 뻗어온 그의 손이 엘리시아의 턱을 감쌌다.
촉.
입술에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일레온을 보며 엘리시아가 멍한 얼굴을 했다.
“왜냐니? 붕대를 감은 채로 하기는 좀 그래서 참고 있었는데.”
일레온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여기 들어오려고 애 많이 썼는데. 별로 반겨주지 않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이야. 눈도 감아주지 않고. 기도실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잘만 했는데.”
일레온이 키스할 때 눈을 감아주는 건 매너라고 중얼거리는 걸 듣자 엘리시아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놀라서요. 당황스럽고요. 기도실에는 올 줄 알았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어제 그를 기도실에서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오기 전까지 고민했던 것도, 마음에 걸리는 일들도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눈앞에서 제게 미소지어주는 일레온을 보는 것에 홀려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간사하다.
일레온과 대공저에서 매일 하루 종일 붙어 있을 때는 그가 좋아하고 원하는 게 이대로의 내가 아닌 로나일까봐 전전긍긍하며 지냈는데.
그를 마음껏 볼 수 없는 하듄샤로 돌아오자 그런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되어버리다니.
엘리시아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러고 보니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하듄샤에 매일 가겠다고 했더니 집사가 난리더군.”
일레온은 매일 거액의 금화를 챙겨 하듄샤에 간들 뭐 어떠랴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눈이 먼 동안 공작가의 살림을 도맡았던 베르나르가 펄펄 뛰었다.
「그런 거금을 매일 신전에 기부하시다니요.」
「기부를 하지 않으면 엘리시아를 볼 수가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일레온은 진심으로 돈이 아깝지 않았다.
전쟁터의 한복판에서도 이렇게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무엇이 두려울까.
전쟁터의 후방에서 지휘하든, 선봉에 서든 ‘적’이 누군지 모른 채 싸우는 일은 없었다. 예견 된 승리를 위해 정보를 모으고 지리에 맞게 전략을 짜고 적진에 간자를 심는다.
우연한 승리라는 건, 수백, 수천 병사의 목숨이 걸린 전쟁터에서 그런 요행 같은 승리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일레온은 소나텍을 모른다.
형체 없는 적과 안개에 싸여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일레온을 불안하게 했다.
단 하루라도.
엘리시아를 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데.
직접 끌어안고 그녀가 살아있다고,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다친 곳 없이 잘 있다고 확인하지 않으면 돌 것 같았다.
「대공가의 눈먼 짐승이 기어코 미쳤다고 수도에 소문이 퍼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이러다 엘리시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번에야말로 정신을 놓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듄샤 따위 기둥의 석재 하나까지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버릴 거라고 말이다.
그러느니 돈을 좀 쓰는 게 모두를 위해서 좋은 게 아니냐고 일레온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사가 보기엔 상식적이지 않았나보다.
「이게 얼마나 큰 돈인 줄 아십니까? 전하께서 한 달만 하듄샤에 매일 가시면 기도회가 열리는 회당이라도 새로 한 채 지을 수 있을 텐데요.」
일레온의 눈초리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금화 주머니를 집무실 책상 위에 내려놓던 베르나르가 끝내 한 마디 중얼거렸다.
「차라리 하듄샤에 살림을 차리지 그러십니까.」
「……그럴까?」
「……네? 전하?」
명석한 집사 베르나르의 덕분에 일레온은 하듄샤에 잠입하겠다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게 왜 그런 결론이 되는데요?”
엘리시아의 말에 일레온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결론적으로 반가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엘리시아는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도실에 일레온이 자신을 보러 왔을 때는 대공의 모습으로 찾아왔던 거니까.
그건 그녀가 아는 일레온이었다.
지금 신관복을 입고 자신을 보는 그는 어쩐지 낯설게 느껴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신관복 때문인가봐요.”
엘리시아는 주섬주섬 변명했다.
“당신이 그런 차림을 하고 있으니까 좀 낯설어서.”
“그래?”
일레온이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를 맨 끈에 손을 댔다.
왜? 뭘 하려고?
엘리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 차림이 불편하면 벗을게.”
아악!
엘리시아는 벌떡 일어나서 그를 만류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에요. 너무…… 반가운데 이렇게 볼 줄 몰라서.”
빨갛게 변한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엘리시아는 일레온을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렇게 안 어울리나?”
“아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눈 좀 감아 줘. 사람 하나 살린다 치고.”
지속적으로 키스를 요구하는 뻔뻔한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엘리시아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일레온의 체온이 말랑한 입술 위로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졌다.
“이제 왔네. 내 애인.”
그는 잠시 엘리시아를 이리저리 살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네. 당신이 구해줬잖아요.”
일레온이 없었다면 아까 사비엘에게 무슨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차마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번은 그녀를 납치하기 위해 신관들을 몰살했고, 또 한번은 대공저 후원에 사람을 보내 그녀를 납치했다.
얼마든지 이다음에도 또 그런 짓을 벌일 것 같아 엘리시아는 몸서리가 쳐졌다.
‘두 번의 행운은 없을 거야.’
엘리시아가 저도 모르게 스산한 느낌에 어깨를 움츠릴 때였다.
“앉아봐.”
일레온이 침대에 자신을 앉히더니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악!”
그가 손으로 손목을 건드리자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아프잖아요!”
“거짓말을 하니까 그렇지.”
“거짓말이라니. 아깐 괜찮았는데.”
“그 새끼가 네 손목을 비트는 걸 봤는데.”
“아…….”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이 엄청나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일레온이 조심스레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자 조금 부어오른 손목이 보였다.
“찜질을 해야 할 것 같군. 그 전에.”
일레온의 입술이 조심스레 손목에 닿았다.
“흣.”
잘게 손목 주위를 맴돌던 일레온이 고개를 들었다.
“더러운 게 닿았던 자릴 그냥 둘 수는 없으니.”
그러면 당신 입술이 뭐가 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엘리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차가운 수건을 가져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자신이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장난기가 사라진 얼굴로 심각하게 제 손목을 들여다보는 일레온을 보자 엘리시아는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일레온.”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조금 메었다.
“나 좀 안아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