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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없었는데 생겼어 (96/151)


96. 없었는데 생겼어
2022.12.03.



 


“나 좀 안아줘요.”

엘리시아는 뒤늦게 불안한 감정에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 자신을 일레온은 모른 척 순순히 안아주었다.

세상의 시련을 모두 막아줄 것 같은 단단한 품 안에서 어느샌가 익숙해진 체향을 맡다 보니 점점 마음이 진정되었다.


“일레온. 나 너무 무서웠어요.”

“응.”

그가 조심스레 달래듯 등을 쓸어주자 엘리시아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정말 무서웠어…….”

칭얼거리듯 중얼거린 말에 일레온은 의외의 말로 대답했다.


“나도.”

나도라고?

그가 무서운 게 있단 말인가.

엘리시아는 내내 파고들 듯 얼굴을 대고 있던 그의 가슴에서 고개를 들었다.


“당신도 무서운 게 있어요?”

얼떨떨한 말투로 묻자 일레온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없었는데 생겼어.”

엘리시아가 눈을 깜빡이자 일레온이 조금 분한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사비엘을 보고도 기도실엘 왜 들어간 거야? 전쟁터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질 때보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왔을 때보다 더 놀랐다고.”

엘리시아가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망설이자 그가 어서 말해보란 듯 눈을 내리깔며 턱을 들었다.


“어, 음. 화살이 비처럼 쏟아질 때는 어떻게 피했어요?”

뜬금없는 호기심이었다.

엉뚱한 엘리시아의 말에 일레온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런 게 궁금해?”

“당신이 말을 먼저 꺼냈잖아요.”

“위험하니까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여기는 하듄샤 안이잖아요. 내가 신관으로 복귀한 게 오늘인데 그런 게 알려질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랬다. 그래서 방심했던 것도 있었다.

일레온이 또 저를 보러 온 줄 알고.


“당신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날 찾아올 사람은 일레온 당신밖에 없을 거라고.”

속도 없이 좋아서, 죄송하지만 부모님도 이렇게까지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가끔 마리엘라와 질리언이 다녀가도, 어릴 때는 하듄샤가 싫고 실감 나지 않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아 집에 가고 싶었다.

커서는 이미 성소의 생활에 익숙해져서 무뎌졌다. 공작저로 돌아간들 17년을 살았던 하듄샤만큼 마음이 편하진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엘리시아가 시무룩한 기색을 보이자 일레온이 한숨을 쉬었다.


“탓하는 것처럼 들렸나.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 그대가 너무 걱정이 되니까.”

“고마워요. 일레온.”

엘리시아가 제 기분을 풀어주려는 그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정신이 없어서 고맙다고 말도 못 했네요. 당신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또 그를 찌르고 손에 피를 묻혔겠죠.”

“또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되묻는 그의 말에 엘리시아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예요. 전에도 사비엘을 찌른 적이 있었다는 뜻이죠.”

“언제?”

일레온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정열적이고 맥동할 것처럼 빨간 눈동자도 차갑게 보일 수가 있었다.


“로렐 호수에서. 나는 그를 찌르고 도망쳤던 거예요.”

일레온에게 겪었던 일들을 세세하게 말한 적은 없었다.


“어쨌든 나도 그렇게 당하고만 있을 성격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어쩐지 변명하는 투여서 엘리시아는 괜히 찔끔했다.


“정말 여기서는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어.”

일레온은 차갑게 엘리시아의 말을 잘랐다.


“오늘 내가 거기 없었다면.”

굳은살이 박힌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그녀의 뺨을 문질렀다.

그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이유를 엘리시아는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잘못되었을지 모를 미래를 일레온은 차마 입에 담기조차 싫을 것이다.


“……고마워요.”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손에 뺨을 비볐다.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었어.”

그 순간 일레온이 자신을 순식간에 낚아채듯 끌었다.


“아.”

시야가 뒤집히듯 휙 날아가더니 어느새 엘리시아는 침대에 눕혀졌다.

그녀를 팔 아래 가둔 일레온이 타오르듯 붉은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말로만?”

“…….”

엘리시아는 기회만 생기면 이러는 일레온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 틈을 노렸다.

아담하고 비좁은 침대가 그의 존재감으로 꽉 찼다.

그와 숨을 얽고 나눌 때마다 엘리시아는 자신에 대한 일레온의 집요한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맞닿은 건 입술뿐인데 고장 난 것처럼 쿵쿵대는 심장을 통해 온몸으로 환희의 예고가 혈관을 타고 도는 느낌이었다. 키스 한 번에 아직 밤의 즐거움을 모르는 몸은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손끝 발끝까지 자르르 저렸다.

한참 맞붙던 입술을 떼어내며 일레온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새 예뻐졌네.”

홍조가 도는 뺨과 입술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건드리던 그가 물었다.


“이제 말 해봐.”

“네?”

“뭐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상했는지.”

나른한 설렘에 반쯤 감겨있던 엘리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엘리시아.”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그만큼 확연한 애정을 담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속에 든 걸 꺼내서 보여줄 수는 없잖아. 말하지 않은 걸 어떻게 알지?”

“나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멀어질 것처럼 구는 걸 그냥 지켜봐야 하나? 그대가 바라는 일이 그런 건가?”

“아니에요.”

엘리시아는 바로 부정했다. 혼자 끙끙 앓으면서 속앓이를 한 것에 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튀어 나가서 그녀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일레온이 가시밭길을 가는 건 자신에 대한 애정을 담보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걸 확인하는 건 두렵고, 혹시 서로 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일레온이 도와주지 않게 되는 것 자체로 그녀가 살지 못할 가능성이 올라가니 더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급히 구해온 탓인지 질이 나쁜 밀색 가발 때문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에 누런 가모를 한 올 붙인 일레온은 추궁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잠시라도 엘리시아에게서 떨어지기 싫은 것처럼 몸을 비스듬히 옆으로 누인 채 단단한 허벅지로 그녀의 한쪽 다리를 누르고 팔베개를 해주는 건 그의 습관이었다.

하듄샤로 돌아온 지 겨우 사흘.

몇 번 일레온의 침실에서 잠든 날 꼭 안아주던 체온이 안 그래도 허전하지 않았던가.

분명히 오래 써왔던 단출한 제 방인데 온전히 그의 영역이 된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얼마든지 자신을 감싸줄 것 같은 남자의 품에서 엘리시아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라 로나인 것 같아서.”

입 밖에 뱉은 말이 감정을 쭈욱 끌어당겼다.


“나는 로나가 아니에요. 당신이 좋아하는 여자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어요.”

“그랬군.”

점점 기가 죽은 듯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목이 메었다.


“차라리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엘리시아 그대가 아니라 로나를 좋아한다고?”

엘리시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아 코를 훌쩍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나를 좋아하고 지금 그대를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 건가?”

“자꾸 로나처럼 해보라면서 얘길 하니까.”

눈꼬리에 작은 눈물방울이 맺히는 걸 보며 일레온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군.”

“오해라고요?”

“내가 좀 들떠 있었어. 공작 부부의 허락하에 그대가 내 집에 와 있는 게 좋아서.”

일레온이 토닥여주는 손길에 눈물이 천천히 말랐다.


“추억처럼 새삼 떠올라서 말해본 것뿐이었는데. 그대가 이렇게 마음 상할 줄 모르고.”

“웃는 거 못 해요.”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옷을 손으로 꼭 쥐었다.


“평생 그런 식으로 웃어본 적이 없어서.”

모든 것을 잊은 로나는 밝았다. 아무런 걱정 없이 크게 소리 내어 웃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겠지.


“나도 로나처럼 웃고 싶은데. 당신이 보고 싶다는 거 해주고 싶은데…….”

눈가가 화끈거렸다.


“엘리시아.”

곧 눈물을 쏟을 것처럼 뜨끈해진 자리에 서늘한 손끝이 조심스레 닿았다.


“그대는 눈이 먼 나를 좋아하고 앞이 보이는 나는 좋아하지 않는 건가?”

“네?”

“대공일 때의 나를 좋아하고 이렇게 신관인 척하는 나는 싫어?”

“아니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기억을 잃었을 때의 너도 너야.”

일레온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그대가 눈이 멀어 있던 남자만 가엽고 애달파 하는 건가 했던 적이 있었지.”

엘리시아는 깜짝 놀랐다.


“말도 안 돼요.”

“그게 아니라면 내 구혼장을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게다가 눈이 멀었다고 소문을 내니까 바로 내게 와줬잖아.”

“그건…….”

“그대가 하는 말이 뭐가 달라?”

엘리시아가 입을 다물자 그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너야. 엘리시아.”

“……일레온.”

“모든 게 해결되고 나면 매일 웃으면서 살게 해줄게.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일레온이 하는 말이 이마를, 뺨을 타고 몸에 스며들었다.


“꼭 그렇게 해줄 테니까. 나를 믿어.”

폭풍이 부는 것 같던 마음속이 잔잔해졌다.

그에게 몇 마디 말했을 뿐인데 부글부글 끓던 속이 아무렇지 않아졌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희망과 바람.

그리고 일레온의 말대로 잘 될 것만 같은 예감.


“믿을게요.”

그제야 일레온이 그녀의 귓가에 푸스스 웃는 소리를 흘려보냈다.

***

수정궁 안은 어두웠다.

화려하게 꾸며진 황태자의 침실 안에 통증을 낮춰주는 향내가 진동을 했다.


“으으.”

그런데도 고통스러운 듯 신음하는 사비엘을 보며 세라피나 황후가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랐다.


“황태자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이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하듄샤에 갔던 사비엘은 기절한 채 수련 신관에게 발견되었고 들것에 실려 황궁으로 돌아왔다.


“호위도 데려가지 않고 혼자 다니시다니요?”

세라피나 황후의 질책에 사비엘이 겨우 대꾸했다.


“하듄샤는 궁 안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사비엘이 충동적으로 하듄샤로 향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역시 유테르 공작이 정식으로 황실의 혼인 제안을 거절한 걸 알고 있었다.


‘다른 놈이랑 혼인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일레온 그 자식인가?

엘리시아는 내 여자인데.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엘리시아가 기억을 잃은 채 떠돌다 대공저에서 일하게 된 건 그가 그레로사로 향하던 그녀를 습격해서 납치했기 때문이었으나, 사비엘의 머릿속에서는 눈이 맞은 일레온과 엘리시아가 그를 기만하기 위해 벌인 일처럼 왜곡된 지 오래였다.


“엘리시아가 하듄샤에 돌아왔다니. 말도 안 됩니다.”

하듄샤는 황궁 북문에 붙어있는 사실상 궁 내 시설이었다.

사비엘이 황궁 안에 있는 작은 신전을 관리하러 오가던 신관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게 된 건 우연이었다.


 


「엘리시아 님께서 돌아오시다니 다행이지.」

「대신관 님께서 복귀를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던데.」

「다음 대신관으로 엘리시아 님만큼 신탁을 받을 수 있던 사람이 없는데. 말이 되나. 일이 매끄럽지 않다고 여기셨겠지.」

 
그 말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황제가 청한 혼약을 에둘러 거절한 여자가 성소에 와있다니.

애초에 다른 혼처를 염두에 둔다는 말이 거짓이었다면 황태자인 그를 우습게 여기고 기만한 게 아닌가.

격분한 사비엘은 거칠 것 없이 하듄샤로 향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엘리시아가 그곳에 있을 줄이야.


“어머니. 흐윽. 저는 어찌해야 좋습니까.”

사비엘은 엘리시아를 생각할 때마다 치미는 분을 이기지 못해 고통스러웠다.

제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질척하고 끈질긴 어떤 욕망을 스스로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엘리시아. 엘리시아는 제 것입니다.”

오랫동안 심겨 있던 암시가 사비엘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뒤바뀐 원작으로 인해 카리나의 임신이 자극해버린 엘리시아의 죽을 자리와 근본적인 그녀에 대한 집착이 뒤섞여 사비엘은 반쯤 미쳐 있었다.

그 감정들을 하나로 끌어모은 건 집착.


“도와주십시오. 황후 폐하. 제가 그 여자를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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