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그런 게 있을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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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그런 게 있을 리가
2022.12.07.
“도와주십시오. 황후 폐하. 제가 그 여자를 가져야 합니다.”
사비엘의 집착은 폭력이었고, 선을 넘은 지 오래였다.
그가 엘리시아를 세이렌 호로 잡아 왔다가 놓친 것을 세라피나는 모르지 않았다. 레브를 감금하기 위한 그 배는 그녀의 것이었으니.
그럼에도 세라피나의 눈에는 사비엘이 그저 마음을 거절당해 자존심이 상하고 상처받은 사내로만 보였다.
애초에 감히 황태자의 고귀한 시선을 거절하고 고고하게 굴던 계집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러러보고 감읍하지 못할망정 무표정한 얼굴로 속세를 떠나 신들 발아래, 하늘 끝자락에라도 머무는 것처럼 곁을 내주지 않으니 사비엘이 애가 타서 더 저러는 게 아니냔 말이다.
신관 엘리시아의 세상에서 유리된 듯한 시선에 감화되어 그녀를 흠모하던 때도 있었으나, 그런 때를 잊은 것처럼 세라피나는 완전히 사비엘의 편이 되어 분개했다.
사비엘을 뒤로하고 황후궁으로 돌아온 세라피나는 작은 잔에 독한 술을 따라 들이켰다.
혈관을 타고 뜨거운 기운이 퍼지자 들끓던 속과 머리가 차갑게 냉정을 되찾았다.
세라피나 황후는 사비엘이 황태자 지위에 오른 후로 어미와 자식 사이임에도 깍듯하게 존칭을 써왔다.
무릇 집안에서 존귀하게 대접을 받아야 밖에서도 우러러보는 법이었다.
“사비엘. 내 아들을 그것들이 망치고 있어.”
일레온과 엘리시아.
해링턴 백작가가 속한 신흥귀족들은 사비엘을 지지한다. 그들은 굳이 혼사를 통해 잡아둘 필요가 없었다. 세라피나가 은근히 혼인을 바란다는 뜻을 내비친 해링턴 백작 부처의 청을 무시한 이유였다.
사비엘을 폐위시키고 오데르인 일레온을 차기 황제로 올려야 한다는 구귀족들이 문제였다.
유테르 공작가뿐 아니라 몇 개의 구 귀족의 구심점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몇 명의 구귀족가 출신 영애들이 있었고, 그중 엘리시아 유테르가 유독 세라피나 황후의 맘에 든 것뿐이다. 워낙 특별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엘리시아가 아니더라도 구귀족이기만 하면 되었을 것을.
괜히 시간을 끌다가 복병을 만난 기분이라 세라피나 황후는 어쩔 줄 몰랐다.
“이대로 사비엘이 황제가 되더라도 일레온은 부담이 될 텐데.”
대체재처럼 들이밀 오데르가 강건할수록 감히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평하려 들 것이다. 흠을 잡고 헐뜯고 폐위해야 한다고 말이다.
세라피나 황후가 벽 속에 숨겨 둔 유리병을 꺼냈다.
레브의 피.
오데르의 피는 확실히 이상했다.
신의 권능의 상징인 그 피는 보통 사람의 피처럼 검게 변하며 굳어지지 않았다.
진줏빛처럼 붉은 광택을 내며 여전히 유리병 안에서 찰랑거렸다.
“여봐라. 누구 없느냐.”
세라피나 황후의 말에 시녀가 재빨리 들어서다 서늘한 윗전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랐다.
“가서 사람을 하나 찾아오너라.”
“예? 누구를 말씀이십니까.”
세라피나 황후는 작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를 꺼내어 시녀에게 건네주었다.
“대장간 일을 하는 자다. 위치는 거기 적힌 대로이니라.”
“예. 황후 폐하.”
오데르를 제압할 수 있는 건, 오데르의 피뿐이었다.
사비엘을 위해 세라피나 황후는 오데르를 사냥할 무기를 만들 셈이었다.
엘리시아가 파문당해 공작저로 돌아간 후 일레온이 유테르 공작가에 드나들며 구혼 중이라는 소문을 그녀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완전 다른 두 사람이 세라피나에게는 한 가지 목표로 묶여버렸다.
사비엘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레온은 제거하고, 사비엘이 원하는 엘리시아는 잡아다 아들의 품에 안겨주리라.
“사비엘. 나는 네게 최고가 아니면 주지 않을 거란다.”
집요한 세라피나의 눈빛이 흔들리는 촛불을 따라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
평소라면 새벽에 일어나 명상을 마치고 느긋하게 맞이했을 아침.
엘리시아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것 좀 감아줘.”
침대에 앉아 제게 붕대 뭉치를 내미는 일레온의 얼굴이 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보다 눈 부셨기 때문이다.
평생 하듄샤에서 자란 탓일까?
어째서 흰 신관복을 입은 일레온은 다른 제복이나 정장과 달리 헐렁한 차림인데도 금욕적인 느낌을 주는 걸까.
보통 사람보다 흰 편인 피부에 새카만 머리카락 때문에 그가 입은 하얀 옷을 입으면 외모가 더 부각되는 것 같았다.
엘리시아는 한숨을 쉬며 붕대를 건네받았다.
‘아깝다.’
일레온의 이런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데 붉은 눈동자와 튀는 외모 탓에 붕대와 가발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왜?”
“뭐가요?”
“우물쭈물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군.”
“말하기는 그렇고.”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양쪽 볼에 손을 대고 그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이러면 알겠죠?”
엘리시아로서는 대단히 용기를 낸 참이었다.
어제 일레온이 그랬으니까.
그는 ‘로나’를 좇는 게 아니라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엘리시아 자신이라고 말이다.
일레온의 말에는 힘이 있어서 그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여태 무의식에 숨어 있는 이상 자아라고 분리해서 생각했던 로나도 내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스스로 아니라고 다르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에 힘든 거라고.
그래서 엘리시아는 조금씩 더 편하게 행동해보려고 결심한 참이었다. 그를, 또 자신을 위해서.
“앗!”
붕대를 감아달라며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남자가 불시에 그녀의 허리를 감싸 침대에 눕혔다.
“일레온?”
“왜 이렇게 예쁘게 굴지? 이러다 아침 식사도 건너뛰어야 할지 모르겠군.”
그렇지만 엘리시아는 제 행동이 일레온을 어디까지 움직이는지 여태 잘 몰랐다.
조금 전까지 붕대로 감아 가리기에 아깝다고 생각했던 미남자가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배고파요. 아침은 먹고 싶은데.”
“그러면 내 뺨에 입을 맞춰주지 말았어야지.”
“그건……. 흡.”
뒷목을 채어 올리며 그가 엘리시아의 말을 막았다.
“당신 이상해요.”
“뭐가?”
“이상해.”
엘리시아가 생각하기에 그는 너무 뻔뻔했다.
“맡겨놓은 것 내놓으라는 사람 같아요.”
“하하.”
일레온이 그답지 않게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왜 그렇게 웃어요?”
쪽 소리가 날 정도로 그녀의 입술을 세게 머금었던 남자가 눈꼬리를 휘었다.
“귀여워서.”
“아닌데.”
“그대 취향이 이상하군. 그대는 무척 귀여워.”
엘리시아는 뺨이 화끈거렸다.
“그런데 당신 방이 어디예요?”
“없는데.”
“뭐라고요?”
“몰래 들어왔는데 그런 게 있을 리가.”
엘리시아는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공작부인께 특별히 교육을 받고 왔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일레온은 벌떡 일어나 앉더니 엘리시아를 일으켜주었다.
“오늘 할 일이 많으니. 서두르지.”
잠시 후, 엘리시아는 얼굴에 붕대를 감고 거친 밀색 가발을 쓴 일레온과 함께 하듄사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입구에서 엘리시아가 미적거리자 일레온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음. 당신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듄샤에서는 고기도 먹고 과일도 먹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제국민들에게 신관을 양성하는 성소로 알려진, 종교 시설이다 보니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풍성하게 제공되지는 않는 편이었다.
“별걱정을 다 하는군. 슈발리에가 요리를 잘하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전쟁터에서 몇 년이나 구르던 건 잊은 모양이야.”
일레온이 어서 들어가자며 손을 끌자 엘리시아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얇은 붕대로 앞을 가린 그는 시야가 잘 보인다고 했다. 그렇지만 남들 보기엔 화상 환자로 앞이 보이지 않는 그가 엘리시아를 이끌며 가면 이상할 테니.
엘리시아는 일레온을 한쪽에 데려다 앉혀주었다. 잠시 후 아침이라 갓 구운 빵과 야채가 큼직한 덩어리로 든 걸쭉한 스튜를 가져다 일레온의 앞에 놓아주고 그의 손에 수저를 쥐여주었다.
“빵은 내가 잘라줄게요.”
엘리시아가 잽싸게 칼로 커다란 빵을 썰어 부드러운 속을 그의 앞 접시에 올려주었다.
“늘 이렇게 식사를 했겠군.”
“네. 맞아요.”
일레온이 천천히 흰 신관복을 입은 이들로 들어찬 식당 안을 보았다.
“맛있게 먹어요.”
“그대도 그러하길.”
잠시 둘은 조용히 아침 식사에 집중했다.
일레온이 천천히 수저로 음식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누가 의심하거나 하진 않을 거야.’
안심이 되자 엘리시아는 부지런히 스튜와 빵을 먹었다.
공작저나 대공저의 요리사는 솜씨로는 수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들이었다.
분명 고급스럽고 맛있는 요리들인데 하듄샤에서 꽤 담백하게 만드는 공동 식사를 오래 해온 엘리시아는 이 식사야말로 그리웠나 보다. 하듄샤에 복귀한 후로 오히려 식사량이 늘었다.
게다가 이걸 일레온과 함께 먹고 있다니!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는 꽤 빠르게 접시를 비워나갔으므로 엘리시아도 수저를 부지런히 놀렸다.
식사를 마치고 엘리시아는 일레온과 정원을 거닐었다.
“신기해요.”
엘리시아는 기분이 들뜨는 걸 느꼈다.
“뭐가?”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게.”
어제 일레온이 하듄샤에 잠입한 걸 처음 알았을 때는 이제 어째야 하나 전전긍긍했는데. 이제는 제가 지내던 공간에 그가 함께 있고, 그녀의 추억이 담긴 곳을 일레온에게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삼삼했다.
“이제 내 심정이 이해가 가나?”
“뭘요?”
“대공저에 그대가 왔을 때 자꾸 로나 얘길 꺼냈던 거.”
엘리시아는 양 갈래로 후드 아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이제 그 얘긴 하지 말기로 해요.”
말해봤자 제게 불리한 건 슬그머니 없던 것처럼 덮으려는 그녀를 보며 일레온이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그때 로벤과 에쇼, 이리스가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축복이 함께하길.”
일레온이 선선히 인사를 건네자 그들은 가슴에 두 손을 십자로 포개고 고개를 숙이며 마주 인사했다.
엘리시아 혼자 좌불안석 그가 누구냐고 묻기라도 할까 봐 긴장했다.
“이분은 새로 오신 형제님이십니다.”
대뜸 일레온을 ‘새로 온 형제’로 포장하자 로벤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에쇼가 장난스레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분이 누구신지 우린 다 알고 있었어.”
“공작부인께서 연락을 주셔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리스의 부연에 엘리시아는 일레온을 살짝 가자미눈으로 보았다.
“그런데 원래 어제 오시기로 하셨었는데 늦었군요.”
“아, 그건…….”
으아아! 안 돼!
하듄샤 안에서도 한 침대를 썼다는 정보를 전서구에 달아 날릴 수는 없었다.
“그랬군요. 뭐 이렇게 왔고 만났으니 됐잖아요? 어머니께서 뭐라 하셨나요.”
엘리시아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노에리 형제님. 지금부터 함께 ‘수장고’에 가실 겁니다.”
“수장고 말입니까?”
“보통 하듄샤에 노에리 형제님처럼 늦게 찾아오는 일이 없답니다.”
“……그렇습니까.”
“빙의하자마자 왔다가, 신관이 되거나 아니면 이 세계에서 살만한 형편의 신분에 빙의했다면 곧 가이드만 받고 하듄샤를 벗어난답니다.”
그들은 일레온을 ‘노에리’라 부르며 자연스레 수련 신관 취급을 했다. 처음 하듄샤에 온 이들이 수장고를 견학하는 건 보통 있는 일이었다. 일레온은 자연스레 늦게 하듄샤에 온 신입 수련 신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좁고 어두운 돌계단을 몇 개의 문을 열며 지하로 내려가야 수장고에 다다를 수 있었다.
수장고에 도착하자 원형의 방 가운데 제단을 중심으로 형형하게 빛이 흐르는 투명한 막이 쳐져 있었다.
“나는 이곳이 <눈먼 짐승의 꽃> 책 속의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암구호를 외우자 사르르 녹듯이 막이 사라졌다.
“허…….”
그것만은 대단히 신기했는지 그가 웬일로 놀란 소리를 냈다.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가자 금방 막이 다시 쳐졌고, 다섯이 차례로 암구호를 외우고 안으로 들어가자 지하의 서늘한 공기가 그들을 감쌌다.
안은 따로 불을 밝히지 않아도 제단 주변은 환했다. 모종의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 책이 바로 예언서예요. 지금 문제는 공작부인께서는 이걸 밖으로 가지고 나오거나 없애 달라고 했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이리스가 천천히 설명을 할 때였다.
제단에 다가선 일레온이 두꺼운 책을 두 손으로 잡자 아무런 문제 없이 책이 들렸다.
“들 수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