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 오데르의 반려 (99/151)


99. 오데르의 반려
2022.12.14.



 


“사랑해요. 일레온.”

엘리시아가 답하자 구애하던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도.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이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나.

일레온을 사랑하는 것.

그건 엘리시아에게는 금단의 선을 넘는 일이었다.

자리를 빼앗긴 그의 짝으로 무의식에는 남아 있는 끌림과 감정.

목숨이 걸려 있기에 저어하고 피하고 싶은 금기.

하지만 일레온이 손을 잡아주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그에게도 제가 느끼는 만큼의 기쁨을 돌려주고 싶었다.


“사랑해.”

한번 입 밖으로 내자 흘러나온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엘리시아는 눈물을 흘리며 계속 그에게 제 마음을 고했다.


“언제까지나 당신의 곁에 함께할 거예요.”

옷 소매로 눈물을 훔치자 어이없게도 웃음이 났다.

엘리시아가 웃는 얼굴을 보고 일레온이 놀란 투로 물었다.


“엘리시아. 지금 웃고 있…….”

그때였다.

한줄기 스산한 바람이 불고 하늘이 어두워졌다.

여태 온화하게 마주 보며 행복을 그리던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깨졌다.


“엘리시아!”

순식간에 날아든 검은 불꽃이 일레온이 그녀에게 건네준 꽃송이들을 순식간에 잡아먹고는 엘리시아의 팔목을 휘감아 파고들었다.


“일레온. 아!”

겁먹은 눈으로 제 팔을, 점점 몸을 휘감아 오는 검은 불꽃을 보던 엘리시아의 눈동자에서 조금 전까지 충만하던 행복과 희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감하게 초점이 사라진 보랏빛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사라지자 검은 불꽃은 그녀를 집어삼킬 듯 화르륵 커졌다.


 


“안 돼!”

일레온은 온몸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강제력은 주인공인, 오데르인 그에게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전에도 엘리시아의 머리 리본을 태운 불꽃을 손을 휘둘러 끈 적이 있었으니까.

이러면 될 거야. 아니, 그래야만 해.

엘리시아를 끌어안자 그녀를 태우며 날름거리던 검은 불꽃이 사라졌다.


“……엘리시아.”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

늦은 밤. 클레벤트 대공저에는 고요한 소란이 일었다.

신관으로 변장하고 하듄샤에 들어갔던 일레온이 의식을 잃은 엘리시아를 안고 돌아온 것이다.

급한 전언을 받고 야심한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유테르 공작부인은 한달음에 달려왔다.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딸을 두고 마리엘라는 눈물을 쏟았다.


“아. 어떻게. 흐흑. 엘리시아.”

희고 고운 피부에는 파고든 듯 검은 불꽃이 날름거리며 살을 태운 흔적이 선명했다.

살아 있는, 존재 자체를 그대로 태운다고?

일레온은 분노했다.

이제까지 엘리시아를 이해하려 했고, 또 오늘 하듄샤의 예언서를 보고나니 어느 때보다도 더 그녀를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까지 누르며 살게 하는지 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셈이었다.

예언서가 부르는 죽음은, 일레온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자리로 수정된 그녀의 운명은 이렇게 어느 때라도 엘리시아의 존재를 태워서 지워버릴 수도 있는 거였다.

제게 마음이 있으면서도 표현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서도 자꾸만 멀어지려는 여자는 일레온을 미칠 듯이 애태웠다.

그래서 확실하게 마음을 얻고자 했다.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고백을 그녀도 제게 돌려줄 수 있길 바랐다.

그랬는데. 누구든 마음을 주고 사랑하는 연인에게 바라는 고백 한마디를 원한 것뿐인데.

엘리시아가 죽을 뻔했어.

그것도 내 눈앞에서 산 채로 불태워져서.

일레온은 끔찍한 기분에 휩싸여 어쩔 줄 몰랐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상황을 살펴본 레브가 침음했다.


“엘리시아는 계속 의식이 없는 건가?”

레브의 말에 일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도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자꾸만 그 순간 엘리시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게 사랑을 말하며 감정에 흔들리던 아름다운 눈동자가 선명한 공포에 저며진 듯 초점과 빛을 잃고 흐릿해지던 것이.

기뻐서 홍조를 띠던 뺨이, 고백을 쏟으며 어쩔 줄 모르던 붉은 입술이 색을 잃고 창백해지며 스러지던 것이.

이 모든 게 제가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엘리시아는 분명 그를 떠나려 했다. 아니, 그를 버려두고 떠났다.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모른 척하는 건 기만이라 생각했다.

날 좋아하잖아? 너도 내 곁에 있고 싶잖아?

엘리시아가 항상 코앞에서 주춤하며 멈칫하는 게 목을 조르는 것처럼 답답했다.

어린아이 앞에 달콤한 사탕을 흔들며 꾀듯.

조금만 제게 넘어오면 평생 아껴줄 텐데.

그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허락해주지 않는 걸까.

답답해서.

끝끝내 제 감정을 쏟아부어 그 여자가 선을 넘어오게 만들었다.

그랬더니 엘리시아가 죽을 뻔했어.

숨을 쉬고 있는 건지 알기 힘들 정도로 생명력이 꺼져가는 듯한 엘리시아를 보고 마리엘라는 기절할 것처럼 헉헉 대며 침대에 반쯤 쓰러졌다가 일어나면 울기를 반복했다.


“오데르의 존재는 강제력이 건드릴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레브의 말에 울먹이던 마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대공 전하께서 몸으로 불을 끄려고 할 때 사라졌을 거예요. 오데르를 태울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오데르의 반려로 삼는 건 어떤가?”

“오데르의…… 반려라고요?”

마리엘라가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 묻자 레브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대가 예언서를 썼다면서 모르나?”

“그렇게까지 설정을 구체적으로 하지는 않았어요. 처음 듣는 말인데.”

“오데르는 오래 살지. 게다가 젊음이 오래 유지되고.”

실로 죽을 때 까지 거의 늙지 않았다. 선황제가 숨을 거둘 때 아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임에도 겉모습은 사십 대 중,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짝을 이룬 인간이 일찍 늙고 죽어버린다면 남은 평생 외롭지 않겠나. 오데르는 자신이 선택한 짝을 반려로 만들 수 있어. 가지고 있는 오데르의 힘을 공유해주는 거지.”

빠르게 회복하는 재생과 치유의 힘도, 긴 수명도, 오래 젊음을 유지하는 특성도 나누어 갖게 된다고 레브는 덧붙였다.

그러자 딸을 살릴 희망을 엿보고 겨우 정신을 찾은 마리엘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데자르 경께서는 병사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레브의 말대로라면 그녀의 곁에서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 있어야 했을 전 대공, 데자르 경은 병을 앓다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사십 대의 이른 나이에 말이다.


“그는 나의 짝이었지만, 내 반려가 되지 않았어.”

“네? 어째서요?”

뜻밖의 말에 마리엘라가 놀라자 레브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오데르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했어. 태어난 대로, 사람으로 살다가 때가 되면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을 거라고 말이지.”

그건 그것대로 현명한 말이었다.

이제까지의 나와 다른 존재가 된다.

보통은 욕망할만한 힘을 추구하는 대신 거부한다.

하지만 이제까지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그대로 살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존재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어. 그의 삶이 허락하는 만큼만 내 옆에 머물기를 원했지. 나도 동의했고.”

레브가 쓸쓸하게 어두운 창가에 섰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그가 정말로 떠났을 때는 견디기 힘들었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래서 클레벤트 대공비의 칭호를 버려두고 황녀로 불러달라고 했다고, 제국을 떠나 유랑하듯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엘리시아는…… 그녀도 바라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일레온의 말에 레브가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밖에는 엘리시아를 강제력에서 구해낼 방법이 딱히 보이지 않는걸.”

레브가 덧붙였다.


“본인에게 물어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지만 엘리시아는 이틀이 더 지나도록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검은 불꽃이 태운 자리가 이상했다. 보통 그렇게 깊고 큰 화상이라면 피가 배어나오거나 진물이 흐르거나 하며 아물거나 염증이라도 일어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엘리시아를 베어먹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것을 상처라고, 흉터라고 불러도 되는지 괴리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일은 불시에 터졌다.

내내 엘리시아의 곁을 지키던 일레온이 잠깐 집무실에 다녀오는 사이, 혼비백산한 베르나르가 그를 부르며 달려왔다.


“전하. 대공 전하. 엘리시아 님께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다급한 집사의 태도에 일레온은 날 듯이 침실로 돌아갔다.

여전히 미동하지 않는 작고 하얀 몸을 검은 불꽃이 통째로 집어삼키며 타올랐다.

화르륵.

그가 들어서자 팔 다리를 휘감다 보란 듯이 더욱 기세를 키우는 불꽃을 보며 일레온은 성난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아. 아아.”

집사가 기운 빠진 소리를 내며 침실 문 앞에 주저앉았다.

엘리시아를 태우려던 불꽃은 이번에도 일레온이 닿자 한순간에 사라졌다.


“안 돼. 엘리시아.”

일레온은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자그마한 몸을 제 품 안에 숨길 듯이 꼭꼭 눌러안았다.

한참을 그렇게 웅크리고 있던 일레온이 엘리시아를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대공비의 침실로 가겠다.”

“전하.”

“아무도. 아무도 2층에 올라오지 않게 해라.”

일레온이 엘리시아와 대공비의 침실로 향하자 베르나르는 부리나케 1층으로 향하며 사용인들을 단속했다.

멀리서 소란이 일다 곧 조용해졌다.

일레온은 침대에 엘리시아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내내 안은 채 대공비의 방 커튼을 쳤다.

방 안이 깜깜하게 어두워지자, 일레온은 침대 옆에 초 하나를 밝혔다.

안온한 붉은 불빛이 사위를 밝히자 곧 부서질 석회상처럼 희고 생기 없는 엘리시아에게 혈색이 돌아온 듯한 착각이 일었다.


“엘리시아. 난 너 이렇게 못 보내.”

처음 품어본 감정이었다.

보통 말하는 사랑이 아름답고 고결하며 따스한 애정이라고 생각했었다.

일레온은 제가 엘리시아에게 가진 마음이 그것을 포함해서 그보다는 과하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오데르의 반려로 만들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일레온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아니면 의미가 없겠지.

그렇지만 다른 짝을 찾고 싶지 않을 정도로 온전히 마음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바라는 만큼만, 원하는 방법으로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사랑에 빠지면 약자가 되어버려.

아무리 지위와 신분이 높고 오데르라는 신의 핏줄이라 하더라도 싫은 사람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 테니까.


“이런 내게 실망하려나.”

엘리시아 역시 제 아버지와 다르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일레온 그를 사랑하지만, 오데르의 힘을 나누어 받는 건 다른 이야기일텐데.


“그렇지만 나는 그대를 살게 하고 싶은 것을 어째야 할까.”

그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옷을 벗었다.

오데르의 반려.

원하는 상대를 평생 함께할 반려로 만드는 건 보통 결혼 첫날 밤의 행사였다.

깊고 은밀한 결합을 나눌 때 함께 하는 일이었다.


“엘리시아. 네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을테니까.”

그녀에게 감정적으로 매달리자 착하고 순진한 여자는 그에게 무엇이든 다 내어주었다.

그렇지만 그게 정말로 그에게 자신을 허락한 게 아니라는 걸 일레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밤을 보내지 않고 엘리시아를 제 반려로 만들 셈이었다.

엘리시아가 바라지 않는 건 일레온 역시 원하지 않았다.

둘이 진정으로 하나의 꿈을 꾸는 밤은 그녀가 그를 원할 때, 기쁘게 받아들일 때 나눌 것이니.


“그러니까 떠나지 말고 여기 있어. 엘리시아.”

이 세상에 머물러주기만 해도 다른 건 더 바라지 않을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