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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나랑 결혼하자 (100/151)


100. 나랑 결혼하자
2022.12.17.



 


“으응.”

눈을 처음 떴을 때, 엘리시아는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하듄샤에 돌아갔었는데 눈을 뜬 곳은 너무나도 익숙한 대공저, 일레온의 침실이었다.


“검은 불꽃이 꽃을 태웠고.”

손목을 뱀처럼 타고 올랐던 것이 떠올랐다.

오싹.

몸서리를 치며 제 팔목을 내려다보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얀 피부는 깨끗하기만 했다.

달칵.

문이 열리더니 마리엘라가 안으로 들어오다 그녀를 보고 새된 소리를 내었다.


“엘리시아!”

엄마가 덥석 자신을 끌어안고 흐느끼자 엘리시아는 뻘쭘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

“엘리시아. 깨어났구나. 흐흑. 다행이야. 정말……. 흑. 으흑.”

“깨어났다니. 무슨 일이에요? 여기에 제가 왜 와 있는 거죠?”

마리엘라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하듄샤에서 강제력이 널 태우려고 했어.”

“네?”

역시 그건 꿈이 아니었다. 다행히 아프거나 고통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꽃을 태운 불꽃이 제 몸을 타고 오르던 광경은 선명했다.


“넌 닷새나 누워 있었단다.”

“그렇게 오래요?”

“그래.”

닷새나 누워 있었다니. 그렇다면 응당 기운이 없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뭔가 있어야 할 텐데.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몸에 활기가 돌았다. 당장 일어나서 달리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에 수정궁에서 사비엘의 수면향에 당해 해독을 할 때 몇날며칠 내내 잠만 자고 기운이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괜찮니?”

“네.”

“아픈 데는 없고?”

“전혀요.”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몸에 피로한 느낌조차 없었다.


‘일레온의 침대에서 자서 그런가.’

아무래도 하듄샤의 딱딱하고 좁은 침대보다는 비교도 안 되게 편하고 푹신했다.

엘리시아가 얼떨떨해할 때, 열려있던 문으로 레브와 일레온이 들어왔다.


“엘리시아. 깨어나서 다행이구나.”

레브가 그녀의 손을 주무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들 걱정할 정도로 제가 상태가 안 좋았나요?”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아서 걱정했지. 지금은 괜찮아 보이는구나.”

그러면서 레브가 그녀의 팔목을 훑었다.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내외할 것 없단다. 이제 우리는 가족이나 마찬가지…….”

“어머니.”

일레온이 레브의 말을 끊었다.


“잠깐 자리 좀 비켜주세요. 엘리시아와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마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어요.”

어머니들이 자리를 비켜주자 일레온이 침대에 걸터앉아 엘리시아를 살폈다.


“몸은 좀 어때?”

“좋아요. 아픈데도 하나도 없고.”

엘리시아가 살살 팔을 휘둘렀다.


“자고 나서 이렇게 개운한 기분이 들었던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저번에는 아무리 오래 자도 눈을 뜨고 일어나면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해독하느라고 힘들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번엔 온몸이 상쾌하기만 했다.


“검은 불꽃이 널 태우려 했어. 기억나?”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우려고 했다고 말하기 그렇군. 실제로 널 태웠지. 넌 검은 불꽃에 휘감긴 대로 몸에 탄 자국을 내고 의식을 잃었어.”

“내가요?”

“이틀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았는데, 더 큰 불꽃이 널 통째로 삼키더군.”

엘리시아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은 상한 데가 없었다. 불꽃에 감긴 대로 탄 자리가 있었다는데, 기억나는 대로 살펴보아도 아무 흔적이 없었다.


“어머니와 공작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원작을 이탈해도 강제력이 건드릴 수 없는 건 오데르 뿐이라고 했어. 주인공이라 대체할 수가 없다면서.”

그 이야기는 엘리시아도 함께 들은 거였다.


“그래서 널 오데르의 반려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어.”

“오데르의 반려요?”

“내가 가진 특성을 나누어 갖는 거야. 오래 젊음을 유지하고, 수명이 길고, 다쳐도 빨리 낫는.”

“그런…….”

일레온은 담담히 말했지만 점점 그의 얼굴이 슬픈 빛을 띠었다.


“네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나는 널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어.”

그가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미안해. 멋대로 너를 내 반려로 삼았어.”

엘리시아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일레온. 뭘 미안해 하는 거예요. 당신은 나를 구해주었잖아요.”

“네게 억지로 뭘 시키고 싶지 않았어.”

일레온은 자괴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예언서를 보고 알았어. 네게 로나처럼 웃어달라고 말했던 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말이었을지.”

항상 자신의 의사대로 살 수 없던 삶이었다.

그런데 진심으로 마음을 나눈 사람 앞에서조차 의도를 가지고 웃어야 하다니.

일레온은 자신이 엘리시아에게 무심했다고 여겼다.


“그랬는데 내가 제일 나빠. 너를. 너를 잃고 싶지 않았어.”

“난 괜찮아요.”

엘리시아는 일레온을 꼭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마음이 놓이며 살 것 같았다. 기절하기 전 하듄샤에 머물면서 가졌던 긴장이 이제야 풀렸다.


“나도 당신을 선택했잖아요. 우리가 후회할 일은 없어요.”

엘리시아는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러면 예언서를 없애지 않아도 강제력이 나를 해칠 일은 없는 건가요?”

“그래. 그럴 것 같아. 내가 네 옆에서 조금만 떨어져 있으면 다시 불꽃이 나타나곤 했는데 그 후로 그러지 않았으니까.”

“후훗. 일레온. 사랑해요.”

불시에 들려온 말에 그가 숨을 멈추었다.


“사랑해.”

엘리시아는 그의 가슴에 뺨을 비볐다.


“좋은데요?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심장을 옭아매고 있던 쇠사슬이 사라졌다.

최대한 예언서에 적힌 것을 거스르지 않고 행동하려고 했던 금제가 풀려버린 것이다.


“엘리시아.”

“네?”

“좀 떨어져.”

“싫어요.”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몸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싫어. 안아줘요.”

“하. 너 정말. 지금 밖에 어머니들께서 기다리고 계신데.”

“아…….”

엘리시아는 민망해서 얼른 팔을 풀었다.


“몸이 괜찮다니 다행이군. 이 다음은 어머니와 공작부인이 가시면 마저 하지. 같이 식사 정도는 하고 싶으실테니.”

엘리시아는 밥을 빨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날이 좋아 정원에 차려진 테이블은 가벼운 식사였다.

묵직한 고기 대신 소화가 잘 되고 부드러운 농어가 메인이었고 부드러운 빵과 푸딩처럼 익혀 만든 디저트가 놓였다.


“그래도 이렇게 깨어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레브가 엘리시아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바로 식사를 해도 될 정도라니.”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대공 전하 혼자 제게 닷새나 의식이 없었다고 하셨으면 장난치시는 거로 생각했을 거예요.”

엘리시아의 말에 레브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데르의 힘이 뜻대로 도움이 되어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전하.”

마리엘라의 말에 레브가 손사레를 쳤다.


“그럴 것 없어. 이제 곧 사돈지간이 될 사이에.”

“풋.”

엘리시아는 물을 마시다 살짝 사례가 들렷다. 그런 그녀에게 일레온이 조용히 냅킨을 접어 내밀었다.

자식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레브와 마리엘라는 이미 행복의 나라로 떠나버렸다.


“날은 최대한 빠른 게 좋겠지요?”

“그렇지. 어디 젊은 애들이 우리 마음 같을까. 호호호.”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면 한 달 안에 식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대공비의 품위에 맞는 드레스를 구해야 할텐데. 그게 그렇게 빨리 제작할 수는 없지 않나.”

“예전에 엘리시아의 결혼식 드레스를 제작하기로 써 둔 계약서가 있어요.”

“호오. 그런 게 있단 말인가? 누가 우리 예쁜 며느리의 드레스를 맞출 행운을 가졌지?”

“르발레인이라고 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이랍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군. 내 취향은 아니지만 엘리시아에게는 무척 잘 어울리겠어.”

엘리시아가 당황해서 외쳤다.


“결혼이라고요?”

“그래. 뭘 새삼스레 놀라니? 애초에 대공가에서 지내기로 했을 때도 혼사를 논하고 있었잖아.”

그땐 이렇게 본격적이지 않았잖아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다 이해하니까.”

레브의 말에 엘리시아는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뭐, 뭘 이해하신다는.”

“우리는 그렇게 꽉 막힌 어른들이 아니야. 어쨌든 일레온과 그렇고 그런 흠흠. 밤의 의식을 치렀으니 당장 손주가 생겨도 환영할 거란다.”

“……네?”

엘리시아가 이미 머릿속으로 손주 생일 파티 정도는 벌이고 있는 듯한 레브를 따라가지 못하고 버벅대자 일레온이 그녀를 일으켰다.


“엘리시아에게 해가 너무 따가운 것 같군요.”

“그래? 그럼 얼른 안으로 들어가렴. 나는 공작부인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구나. 유테르 공작께서는 혼사에 동의하셨지만 이런 걸 준비하는 건 부인들이니.”

“예. 어머니. 공작부인. 감사합니다.”

일레온이 깍듯하게 인사하자 마리엘라의 눈에도 흐뭇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것이 늘 일레온을 볼 때 마다 내 딸을 죽음에 몰아넣을 남주 녀석! 이라는 부정적 감정이 깡그리 사라진 정감있는 눈빛이어서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방 문이 닫히자마자 물었다.


“그게. 후.”

일레온이 갑자기 난색을 표했다.


“황녀 전하와 엄마가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거예요?”

결혼식이라니? 손주라니?


“그러니까 아까 내가 널 내 반려로 삼았다고 했잖아.”

“네.”

그래서 검은 불꽃의 강제력에서 벗어났다고 말이다.


“그런데 원래 그걸…… 하는 방법이…….”

일레온이 말 끝을 흐리자 엘리시아는 답답했다.


“방법이 어쨌길래요?”

“보통은 결혼한 부부가 첫날 밤에 하는 그것과 같아서.”

“뭐, 뭐라고요?”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펄쩍 뛰며 그에게서 몇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럼 당신이 나를…….”

“아니야!”

“……아니라고요?”

엘리시아의 눈빛에 일레온이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난 그대를 안고만 있었어.”

틈만 나면 기회를 노리는 짐승이요.


“안고만 있었다고요? 반려로 만드는 의식이 그것만으로 된다고요?”

엘리시아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일레온은 시선을 피했다.


“……옷은 벗고.”

엘리시아는 차마 그를 더는 나무랄 수 없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머니들께서는 왜 저러시는 거예요? 우리 아무 일도 없는 셈인데.”

“내가 딱히 그대를 존중하며 반려로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아서.”

“오해라고 말씀드리면 되잖아요.”

“어째서?”

일레온의 말에 엘리시아가 멈칫했다.


“어차피 나랑 결혼 할 거잖아.”

“그래도.”

“결혼한 부부들은 다 해. 우리는 아직 안 했지만.”

“부끄럽게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그걸 변명하거나 설명하는 나는 부끄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건 그랬다. 도저히 손주 운운하며 텐션이 올라간 어머니들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설명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엘리시아. 나랑 결혼하자.”

일레온이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행복하게 해줄게.”

 

 
엘리시아가 두 손으로 일레온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왜 이렇게 순서가 엉망이지.”

“그래도 좋으면서.”

“정말. 당신은 못 당해요.”

엘리시아가 막 웃음을 터트릴 때였다.


“그거 알아? 너 엄청 자연스럽게 웃어.”

“그래요?”

“예뻐서 미치겠네.”

일레온이 가만히 뺨을 감싸는 손길에 살며시 눈이 감길 때였다.

창 밖에서 훈훈하게 대화하던 마리엘라에게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뭘까요. 하듄샤에서 온 걸 텐데.”

“그러게.”

비둘기가 테이블에 내려앉는 걸 보며 엘리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전서구를 확인 한 마리엘라와 레브가 굳은 얼굴로 황급히 저택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일까요?”

의문은 곧 풀렸다.


“큰일났어. 하듄샤가…… 수장고가 무너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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