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반쪽짜리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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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반쪽짜리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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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반쪽짜리 계약
2022.12.21.
“큰일 났어. 하듄샤가…… 수장고가 무너졌어.”
마리엘라의 말은 현실감이 없었다.
엘리시아는 믿을 수 없는 말에 겨우 입을 떼었다.
“수장고가 무너지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도 모르겠어.”
마리엘라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손에 꼭 구겨 쥔 쪽지를 엘리시아에게 건넸다.
꼬깃꼬깃한 작은 종이를 겨우 펴자 낯익은 이리스의 필체가 보였다.
[수장고 붕괴. 하듄샤 일부 무너짐.]
적혀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하듄샤가 무너지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걸까?
엘리시아는 다리가 후들거려 비틀거렸지만, 옆에 선 일레온이 단단히 그녀의 몸을 받쳐주었다. 일레온이 마리엘라에게 물었다.
“짐작 가는 일이 있으십니까?”
“그게.”
선뜻 말하지 못하는 마리엘라 대신 레브가 대답했다.
“예언서를 없애려고 하는 계획 때문이 아닌가?”
“전하.”
“우리가 전적으로 마리엘라 그대의 의견을 따르고 있지만, 상대도 바보는 아닐 테지.”
“하아.”
레브가 탓하는 투로 말한 건 아니었으나 마리엘라가 길게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책을 훼손할 수도, 수장고 밖으로 옮길 수도 없다고 시간이 끌리는 사이에 소나텍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을 리 없어.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말이야.”
소나텍이 힘을 쓸 수 있는 접점을 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손 놓고 당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도 없진 않았으나 그가 수장고를 건드릴 줄은 몰랐다.
“우리가 하는 일을 그도 지켜보고 있었을 겁니다.”
일레온이 레브와 마리엘라를 보았다.
“제가 책을 들 수 있다고, 하지만 수장고 밖으로 가져 나오지 못해 파훼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니 말입니다.”
“그래. 엘리시아가 쓰러지던 그 날의 일이었지.”
레브가 맞장구를 치며 마리엘라를 보았다.
“이제 어째야 하지?”
망연한 눈빛을 하던 마리엘라가 고개를 들어 일레온에게 반쯤 기대어 안겨있는 딸을 보고는 기운을 찾았다.
“일단 엘리시아와 대공께서는 하듄샤로 다시 돌아가주세요.”
“그게 좋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상황이 좋지 않다면 우리 사람을 빼내야 할 테니 판단을 내려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러면 저희는 물러가 준비를 하겠습니다.”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왔다.
“준비를 서둘러야겠군.”
그는 엘리시아를 대공비의 방에 데려다 앉히고는 정리해 둔 그녀의 신관복 따위를 손수 꺼내어 침대 위에 놓아주었다.
“……수장고가 무너지다니.”
엘리시아가 작게 되뇌자 일레온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앉았다.
“괜찮나?”
일레온은 그녀의 손에서 구겨진 전서구의 쪽지를 가져갔다.
“아뇨. 안 괜찮은가봐요. 하듄샤는 나한테는 공작저보다 더 집 같은 곳이라.”
엘리시아는 힘없이 말했다.
“도피처로 선택된 곳이었지만 내내 불행했던 건 아니었어요.”
그곳의 사람들과 생활, 일상이 모두 지긋지긋하기만 할 리 없었다. 엘리시아는 자신의 불행을 그렇게까지 수렁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듄샤가 무너졌다는 말이 너무 끔찍해서.”
그 말이 의미하고 있는 파괴의 현장을 떠올리기만 해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어쩌면 오늘이라 다행이군.”
“네?”
“내가 그대에게 결혼해달라고 청한 날이잖아.”
엘리시아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일레온이 부연했다.
“나는 무너지지 않아.”
심지어 원작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네가 돌아올 수 있는 집이 되어줄게.”
“뭐예요 갑자기.”
엘리시아가 내내 심각하던 얼굴을 펴고 픽 웃어버렸다.
“엘리시아. 어쩌면 이보다 더 놀랄 일이 많을지도 몰라. 항상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겠지.”
하듄샤가 무너진 건 일레온이 보기에는 시발점이었다.
엘리시아를 곁에 두기 위해 이 세계의 신을 자처하는 소나텍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고, 비로소 제대로 힘을 겨룰 전장이 펼쳐지게 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난 널 지킬 거고, 넌 내 옆에 있게 될 거야.”
“고마워요. 일레온.”
엘리시아가 그를 마주 안았다.
“그러고 보니까 나도 당신처럼 강해진 거 아니에요?”
“뭐?”
“내가 오데르의 반려라면서요. 당신의 힘을 나누어 받게 되었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엘리시아가 그의 품을 벗어나 양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어쩐지 아까 일어나자마자부터 몸에 힘이 도는 느낌이 달랐어요.”
그녀는 일레온을 보며 생긋 미소지었다.
“나도 당신을 지켜줄게요.”
“없던 근력이 올라가는 건 아니야.”
“그래도.”
일레온이 장난스레 물었다.
“그나저나 할 말은 고맙다는 거로 끝인가?”
일레온이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사랑해라든지’라고 하자 엘리시아가 눈매를 살짝 찌푸리며 축객령을 내었다.
“네. 저 옷 갈아입게 나가줘요.”
“야박하네.”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놓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나도 준비를 할 테니. 하듄샤의 일은 너무 걱정 말아.”
“그럴게요.”
제 집무실로 돌아온 일레온은 책상에 걸터앉아 한숨을 쉬었다.
“뭐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군.”
그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초에 불을 당겼다.
하도 구겨져서 꼬깃꼬깃해진 쪽지가 한쪽부터 불꽃을 머금고 타들어갔다. 미약하게 타들어가는 붉은 실선을 보는 잠깐 사이에 일레온의 머릿속에 복잡한 상념이 뒤엉킨 채 지나갔다.
“아.”
태운 종잇조각을 허공으로 던질 타이밍을 한 박자 놓친 일레온의 손끝이 붉게 부어올랐다.
“이런.”
데인 자리를 유심히 보던 일레온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회복이 바로 되진 않네.”
오데르의 반려.
신의 후손이 제 짝을 맞이하는 반려 의식은 둘이 온전히 맺어지는 계약이었다. 하지만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살리기 위해 제대로 의식을 치르지 못한 셈이었다.
몸도 영혼도 닿지 못했다.
의식이 없었던 엘리시아가 그가 부르는 대로 화답할 리 없었으니.
“반쪽짜리 계약이군.”
그의 긴 생명을 함께 나누고 회복력을 공유받는 엘리시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온전히 통하지 않으면서 그녀를 놓지 않기 위해 힘을 나눈 일레온에게 영향이 있었다.
숨을 쉬는 것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될 것에 기운을 뺏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이 무겁고, 기운이 없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확연히 회복 속도가 느려질 줄이야.”
그렇다고 엘리시아를 구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이 정도는 그가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일레온은 통증을 가시게 하려는 듯 손을 몇 번 털고 몸을 일으켰다.
***
덜컹덜컹.
달리는 마차 안에서 마리엘라는 창밖의 거리를 내다보았다.
멀리 황궁 뒤쪽에서 흐릿하게 먼지가 오르고 평소와 달리 거리의 사람들도 웅성거리는 게 보였다.
“다친 사람은 없어야 할 텐데.”
마리엘라는 또 죄 없는 사람들이 이 일에 말려들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수장고를 보호하고 있는 고대의 힘에 예언서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 책은 이 세계를 움직이는 지침이나 마찬가지였다. 뭔가 책의 훼손을 방해하는 힘을 거둬낼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결론이 났지만 엘리시아가 강제력으로 쓰러진 탓에 며칠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런데 그사이에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다니.
“수를 읽히고 있어. 이대로는 안 돼.”
마리엘라가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였다.
마차 좌석 아래의 검은 그림자가 꿀럭 움직이더니 의자 위로 튀어나왔다.
“……!”
시커먼 형체에서 튀어나온 손이 비명을 지르려던 그녀의 입을 막았다.
“잘 있었나? 안색을 보아하니 그렇지 못한 것 같군.”
어느새 까만 그림자가 또렷하게 후드를 입고 흰 가면을 쓴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맞은편 좌석에 여유롭게 앉아 후드를 터는 남자를 보며 마리엘라는 치를 떨었다.
“소나텍.”
마리엘라가 그를 노려보았다.
“울면서 쓰러지길래 엘리시아가 그 배에 탔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연기가 많이 늘었더라? 딸을 잘도 빼돌렸어.”
“쓰레기 같은 자식.”
가면 아래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예언서를 없애려고 했나?”
마리엘라의 눈이 커졌다.
“그걸 없앨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니. 우습기 짝이 없네.”
마차 안은 좁았다. 지척에 앉은 소나텍을 보며 이를 갈던 마리엘라는 조심스레 소매에 숨긴 짧은 칼을 손에 쥐었다.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
“엘리시아의 목숨을 구걸하며 내게 빌게 될 거야.”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그럴까? 네 심복. 엘리시아의 호위를 맡길 정도로 믿던 데릭이 어떻게 되었게?”
침몰 예정인 배에서 뛰어내린 건 제 딸 하나였다.
딸의 호송을 맡겼던 데릭은 본래 베르베 출신이었다. 그의 부모가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다 나쁜 소식을 듣고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마리엘라가 보내 준 의사와 약으로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살아갈 의욕이 사라졌다.
“꼭 그래야 했어?”
“그러는 너야말로 그래야 했어? 엘리시아만 진작 사라졌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네 욕심이 애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지.”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리엘라는 흔들렸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는 소나텍의 말이 아픈 곳을 거칠게 후볐다.
“개소리하지 마. 넌 미쳤어.”
삐뚤어진 도덕 개념으로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를 강요한다. 마리엘라의 힐난에 소나텍이 또 작게 웃었다.
“여긴 다른 세상이야. 우리는 기적을 타고 이 세계에 빙의했는데 여기에는 있지도 않은 교과서적인 윤리를 들먹이는 네가 비정상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마리엘라는 불시에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마차 안이라 비좁았던 탓에 움직임의 반경이 작아 쉽게 소나텍에게 팔이 잡혔다.
“이런 위험한 물건을 잘도 가지고 다니네.”
소나텍이 마리엘라의 손에서 칼을 비틀어 빼앗았다.
“그레로사에서 기다리지. 그 애를 보내.”
“뭐?”
“엘리시아가 날 찾아오길 기대할 테니.”
그 말을 끝으로 소나텍은 다시 흐릿해지다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탁.
뺏겼던 칼이 허공으로부터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 떨어져 꽂혔다.
“으윽.”
마리엘라는 속이 비틀린 것처럼 아파서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그레로사…….”
딸의 운명 앞에 또 하나의 함정이 파였다.
***
늘 적막할 정도로 고요하던 하듄샤가 소란스러웠다.
“으. 콜록.”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돌가루 먼지 때문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괜찮나?”
엘리시아는 얼른 일레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선 하듄샤의 정문은 의외로 멀쩡했다. 하지만 하듄샤의 가장 깊은 곳, 내원의 지하에 있는 수장고가 무너졌다니. 땅 밑에서 구릉구릉 하는 울림이 느껴지며 돌먼지가 계속 올라오는 걸 보면 아직 소강 상태도 아닌 것 같았다.
“네. 그보다 이리스를 찾아야 해요.”
전서구를 날린 것을 보면 분명 괜찮을 텐데, 그녀가 멀쩡하다는 걸 한시라도 빨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엘리시아 님!”
“이리스!”
어수선하게 어쩔 줄 몰라 서성이는 흰 신관복의 무리 속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한 여자가 달려나와 엘리시아를 끌어안았다.
“아아. 정말 다행이에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아가씨. 아가씨가 쓰러지셔서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세요?”
서로를 걱정하던 그들은 눈이 마주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돌아오셨군요.”
로벤과 에쇼가 일레온에게 가볍게 목인사를 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의 말에 로벤의 낯이 침통한 기색을 띠었다.
“예언서가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