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 나한테 물리고 싶어요? (102/151)


102. 나한테 물리고 싶어요?
2022.12.24.



 


“예언서가 사라졌습니다.”

일레온이 쓰러진 엘리시아를 데리고 대공저로 돌아간 사이, 이리스와 로벤, 에쇼는 여러 번 수장고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책을 없애야 해요.」

 
이리스는 몹시 벼르고 있었다.

강제력이라는 그 힘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만 알았다. 그녀가 나고 자란 세상을 움직이는 이면의 힘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것을 실제로 본 적은 당연히 없었다. 죽음이 예정된 엘리시아가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려 할 때 나타날 힘이었으니까. 이번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엘리시아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잘 해내고 있었다.

강제력은 실로 두려운 힘이었다. 원작을 거스르는 존재를 지운다는 게 정말로 그런 식으로 태워 없애는 것일 줄이야.

이미 <눈먼 짐승의 꽃>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

그레로사로 향하던 길에 엘리시아를 납치하는 데 연루된 사비엘의 심복들, 그녀를 구해주게 된 숲지기 부부. 가까이에는 기억을 잃은 엘리시아를 고용해준 대공가의 집사 베르나르라던지. 예언서대로 엘리시아가 살았다면 마주치지 않았을 이들을 만났다.

영향을 받은 이 세계의 누군가의 삶도 변했겠지만, 모든 것이 예언서에 쓰여 있지는 않다. 서술 비중이 큰 일레온 주변에 있으면, 그러면서 책의 내용대로 따르지 않으면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소나텍 보다도 예언서가 더 위험해.」

 
그들은 이전과 달리 수장고 자체를 꼼꼼하게 살폈다. 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드나들었던 곳이지만 예언서를 가지고 나갈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러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성과가 있었다. 원형의 방에 돔 모양의 천장을 하고 있는 수장고의 기둥이 다섯 개, 그 아래에서 각각 모양이 다른 다섯 개의 문자가 발견된 것이다.

오각형은 다섯 주신을 상징했다.

마리엘라의 말 대로 방 자체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단서를 찾은 느낌에 일행이 고무되어 있을 때였다.

오늘 기도회를 마치고 수장고에 들어서려다가 그들은 위화감을 느꼈다.


「보호막이 사라졌어.」

 
늘 은은한 빛을 내며 입구를 막고 있던 얇은 막이 사라진 수장고는 평소와 달리 을씨년스러웠다. 좋지 않은 예감에 안으로 들어서자 제단 위에서 형형하게 빛을 발하고 있어야 할 예언서가 없었다.

퍼뜩 살펴보자 다섯 기둥 아래 보이던 문자가 새겨진 돌이 전부 박살 나 있었다.

쿠르릉.

땅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수장고 위의 천장 구조물이 틈을 벌리며 흙과 돌조각이 떨어져 내리자 그들은 정신없이 밖을 향해 달리며 소리 질렀다.


「다들 피해!」

「수장고가 무너지려고 해요!」

 
무사히 밖으로 빠져나오자 하듄샤의 내원 바닥이 가운데부터 쑤욱 빨려 들어가듯 아래로 꺼지면서 땅속에서 쿵쿵 소리가 났다.


“수장고에 보였던 다섯 개의 돌과 예언서가 보호막이랑 관련이 있었나봐요.”

“내가 책을 움직였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지 않았나.”

일레온의 말에 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돌이 온전했고 책을 금방 제자리에 돌려놓았으니까요.”

“엉망이군.”

일레온이 안쪽을 살피며 한숨을 쉬었다.


“다른 신관들은 어쩌고 있지?”

엘리시아가 묻자 에쇼가 대답했다.


“알레한드로 님께서 그레로사를 임시 거처로 삼겠다고 하셨어.”

“그레로사로?”

그곳은 엘리시아에게 떠올리기만 해도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자 에쇼가 손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수장고가 정원 가운데에 있었나봐. 그래서 예배당이 좀 무너졌고 숙소는 멀쩡해. 다행히 기도회가 열리는 시간이 아니어서 다친 사람은 없었어.”

“다행이다.”

“누나도 방에 가서 얼른 짐 챙겨. 아직은 모르지만 계속 땅속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 거 보면 나중에는 숙소에 들어가지 못할지도 몰라.”

“내가 함께 가지.”

일레온이 엘리시아의 손을 잡자 다들 그러려니 했다.

문득 에쇼가 일레온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노에리 형제. 붕대도 감지 않고 그러고 다니다니.”

“자. 우리도 얼른 방에 다녀오자.”

로벤이 과장된 몸짓으로 이목을 끄는 에쇼를 끌고 사라졌다.


“그러고보니 붕대를 잊었네요.”

“다들 정신이 없으니 다행이지. 서두르자.”

엘리시아는 일레온과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아슬아슬하네요.”

정원을 가로질러 다니던 숙소를 건물 윤곽을 따라 가장자리로 빙 돌아서 와야 했다.


“무너지지 않으면 좋을 텐데.”

요행을 바라기에는 잠깐 사이에도 점점 더 정원이 아래로 꺼지는 게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바깥을 보고 있을 테니까. 얼른 필요한 것들을 챙기도록 해.”

“고마워요.”

신전 생활은 검소하고 단출한 삶이었다. 그래도 작은 물건이나 소지품 하나하나 전부 엘리시아가 그만큼 오래 쓰고 손이 닿았던 것들이다.

엘리시아가 작은 보퉁이 안에 제 물건들을 챙겨 넣을 때였다.


“냐.”

일레온이 서 있던 창으로 흰 고양이 한 마리가 날 듯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쇼!”

엘리시아가 얼른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웬 고양이지? 그대가 키우는 거였나?”

“네.”

엘리시아가 놀란 기색 없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쇼의 턱 아래를 쓰다듬자 고양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애교를 부렸다.


“잘 따르는군.”

“이름이 쇼예요. 귀엽죠?”

“그대가 더 귀엽다고 하면 그 고양이가 하는 것처럼 해줄 건가?”

쇼는 엘리시아가 반가운지 그녀의 손끝을 핥다가 이를 세워 살짝 깨물었다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당신. 나한테 물리고 싶어요?”

그녀가 의구심이 어린 눈빛을 보내자 일레온이 정색했다.


“애교를 말한 건데.”

쇼가 책상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자 엘리시아가 그 앞으로 가 앉았다.


“안 그래도 여기 챙기려고 했어.”

서랍을 빼려던 엘리시아는 멈칫했다.

계속 창밖을 내다보던 일레온이 쇼가 방으로 들어온 후부터는 자신과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깥 분위기 봐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안 봐도 대충 아니까 괜찮아.”

아닌 게 아니라 열린 창으로 ‘흐오오오’ 하는 한탄 같은 소리가 동시에 났다가 안 났다가 하는 걸 보면 땅이 계속 꺼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갑자기 나를 왜 신경 쓰는데?”

일레온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 서랍 속에 뭘 숨겨두기라도 했나?”

“아뇨. 그런 거 없는데요.”

그때 쇼가 뭔가 알아듣기라도 한 듯 앞발로 책상을 탕탕 내려치더니 엘리시아의 무릎 위로 올라가 서랍 손잡이에 매달렸다.


“영특한 고양이로군. 주인의 비밀을 잘 알고 있어.”

“앗. 거기 멈춰요. 오지 말라고요.”

“대체 뭐가 있길래?”

엘리시아는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고민했다.


‘망상 노트 내용을 일레온이 보면 어떡해.’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유치한 상상이나 적어놓은 걸 알고 실망해서 파혼하거나, 아니면 거기 적혀 있는 내용이 낯간지러운 것들이라 놀려서 자신이 수치심에 파혼하거나.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좋게 봐줄 수 없는 내용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쓴 글이라 이제와서 놀림 받기엔 좀 억울한데. 엘리시아가 곁눈으로 일레온을 살필 때였다.

쿠르릉.

바깥에서 풀풀 먼지가 날렸다.

그 광경을 내다 본 일레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서둘러. 엘리시아.”

잠시 망상 노트는 이대로 하듄샤에 묻고 떠날지 고민하던 엘리시아는 급히 서랍을 열어 안의 것들을 보퉁이에 마저 쓸어 넣었다. 잠깐 망설이다 노트도 후다닥 꺼내어 보퉁이 가장 아래에 쑤셔 넣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제 가요.”

“그건 이리 줘.”

일레온에게 짐을 넘기자 그가 엘리시아를 안아 들었다.


“갑자기 왜요?”

“이게 더 빨라.”

일레온은 올 때와는 달리 그녀를 안은 채 그대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꺄아아아!”

예고도 없이 삼층에서 덜컥 뛰어내린 일레온은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착지했다.


“가자.”

내려 줄 것처럼 청유형으로 말해놓고 일레온은 여전히 그녀를 안고 달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하듄샤 입구까지 빠져나와 있었다.


“후우.”

별로 숨이 차는 것 같지 않은 일레온을 보며 엘리시아는 놀란 가슴을 진정했다.

오데르는 역시 다르구나.

딱히 그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걸 느끼거나 실감할 일이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 닥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모든 능력이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저 힘을 나도 나눠 받게 되었다고?’

그렇지만 엘리시아는 몸에 활기가 더 돌고 피로감이 사라진 것 외엔 아직까진 달라진 걸 알기 어려웠다.


“엘리시아 님!”

벌써 서둘러 일부는 그레로사로 떠났는지 엘리시아가 막 도착했을 때 보다는 한적해진 인파 사이로 이리스와 로벤, 에쇼가 나타났다.


“우리는 어쩌죠? 그레로사로 바로 떠나야 할지.”

신전의 짐마차까지 모두 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그래도 며칠이나 걸릴 길을 짐마차에 꼭꼭 붙어 앉아 떠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지 일부 신관들이 미적대고 있었다.


“일단 대공저로 가지. 뒷일은 공작부인께 고하고 상의해야 할 테니.”

일레온의 말에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로벤이 일레온에게 가슴에 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별말씀을. 서두르는 게 좋겠군. 이목을 끌어 좋을 게 없으니.”

그들은 곧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

대공저로 돌아오자 이미 마리엘라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친 데는?”

또 그리 묻는 어머니에게 엘리시아는 작게 웃어 보였다.


“다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대공 전하께서 지켜주셔서 아무 일 없었어요.”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대들이 위험한 일을 당했다면 나는…….”

“저희가 움직이는 건 신탁을 따르는 겁니다. 공작부인께서 그리 생각하실 이유가 없지요.”

로벤이 마리엘라를 위로하려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수장고를 건드리다니.”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 여겼지만 섣불리 하지 못한 게, 수장고가 하듄샤의 지하에 있기 때문이다.

보호막을 파훼할 방법을 찾아서 책을 빼내었을 때 그 공간이 온전히 땅속에서 성소를 받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소나텍이 하듄샤에 생활하는 다른 빙의자들의 안전 같은 걸 염려할 리 없지. 그 자식은 막 나가니까.”

에쇼가 가감 없이 말하자 다들 한숨을 쉬었다.


“냐아.”

쇼가 우는 소리를 내며 엘리시아에게 매달렸다.


“배가 고프구나. 잠깐만.”

다들 진이 빠져서 대화가 소강상태였다. 엘리시아는 쇼를 안고 복도로 나왔다.


“집사님.”

“엘리시아 님. 찾으셨습니까.”

“네. 제가 하듄샤에서 돌보던 고양이인데 배가 고픈가봐요.”

“우유를 데워올까요?”

“그래 주실래요? 아니. 그냥 제가 주방으로 갈게요.”

일레온의 응접실 안 분위기를 떠올린 엘리시아가 말을 정정했다.


‘쇼도 저렇게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우유를 핥고 싶지는 않을 거야.’

베르나르와 엘리시아가 막 계단을 내려와 1층에 다다랐을 때였다.

탕탕.

1층 홀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 시간에 누가 온 거지?”

베르나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느새 해가 저물 때라 하늘이 반쯤 어두워질 때였다.


“누구십니까?”

“문 좀 열어주세요.”

밖에서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베르나르는 문을 잠근 빗장을 풀었다.


“아니, 당신은…….”

은발의 긴 머리를 산발한 아름다운 여자가 핼쑥한 얼굴로 서있었다.


“저예요. 카리나.”

카리나를 보고 엘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대공 전하를 만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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