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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마지막에 웃으며 행복해질 사람 (103/151)


103. 마지막에 웃으며 행복해질 사람
2022.12.28.



 


“대공 전하를 만나게 해주세요.”

문이 열리자마자 일레온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던 카리나가 베르나르의 뒤에 선 엘리시아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엘리시아.”

“카리나.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엘리시아가 묻자 카리나가 더듬더듬 되물었다.


“이제 나를 기억해요? 저번에는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해서.”

“아…….”

일레온이 암시에 걸려 카리나를 ‘리나’라며 로나로 착각한 것처럼 행동할 때가 그녀와 카리나가 마주한 마지막이었다.

그 후엔 그가 암시를 풀려고 애를 썼고, 엘리시아는 마리엘라에 의해 끌려가듯이 대공저를 떠나야 했으니까.


“그리고 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거죠? 베르베로 떠난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카리나. 당신은 어떻게 된 거예요?”

본래 순하고 고운 외모였던 카리나가 크게 앓기라도 한 사람처럼 보였다.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면 안 될까요?”

여태 문 앞에 서 있었는데 그것조차 기력이 모자란 듯 카리나는 힘겨워 보였다.


“그래요. 얼른 들어와요.”

제집처럼 ‘들어오라’는 엘리시아의 말에 카리나가 잠시 멈칫했다.

괜찮다는 듯 손을 잡자 엉거주춤 카리나가 그녀를 따라 발을 떼었다.

***

응접실에 앉아 뜨거운 차를 한참 마시고도 카리나는 입을 다물고 눈치만 보았다.


“대공 전하를 뵈러 온 것인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계실 줄은.”

일레온이 무감한 눈빛으로 카리나를 보았다.


“불편하다면 자리를 물려주지.”

카리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암시에 걸렸을 때와 확연히 달라서 엘리시아는 조마조마했다. 카리나가 여기서 일레온에게 울면서 매달리기라도 하면 내 남자라며 치정극이라도 벌어지게 되는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리나 영애와 나 사이에 남들 앞에서 말 못 할 정도의 비밀은 없을 거라 생각하네.”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자기 저택에서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는가.”

일레온의 말에 카리나가 어깨를 움츠리자 레브가 나섰다.


“몸이 많이 상한 것 같은데. 그동안 어디서 지냈지?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서 해링턴 백작가에 사람을 보냈는데 카리나 양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염려하고 있었어.”

레브가 묻자 카리나의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죽이려고 하셨어요.”

“뭐라고?”

“정원을 산책할까 하고 나갔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말을 타고 들어오시다 저를 보고는 칼을 빼 들며 소리를 지르시길래.”

“그럼 그날 사라졌던 게?”

레브가 놀라자 다들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문가에서 엿듣는 이가 없게 복도를 단속하던 베르나르가 짧게 말했다.


“전하께서 아직 병중이실 때 엘리시아 님이 떠나셨죠. 그날 오후에 황태자 전하께서 말을 탄 채 검까지 빼어 드시고 후원까지 그대로 달리셔서 모두들 놀랐답니다.”

“내가 검기를 날려서 기절시켰어. 그런데 사비엘의 부관은 그 애가 내 귀국소식을 듣고 만나기 위해 왔다고 하던데. 아직 황제 폐하도 뵙지 않았던 터라 그 소문이 어디서 났을까 생각했었지.”

베르나르가 잽싸게 덧붙였다.


“그때 황녀 전하께서 카리나 아가씨가 보이지 않는다고 찾으셨습니다.”

“맞아. 그랬지.”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검을 들고 오시기에 두려워서 후원으로 도망쳤어요. 언덕을 올라 도망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서 떨어지는 바람에 기절했답니다.”

“그럼 그동안에는 어디 있었지?”

“우연히 도와준 이가 있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요.”

카리나가 얻어 입고 온 듯 후줄근하고 초라한 원피스의 자락을 들자 아직 붕대가 감겨 있는 발목이 보였다.


“고생이 많았군.”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사비엘이 카리나를 죽이려고 한 건 그가 걸려있는 암시 탓일 가능성이 높았다. 객관적으로 이보다 더 이상한 일이 있기 힘든데 카리나가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말하니 묘하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실은 병원에 있을 때 저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누구지? 해링턴 가에서도 수색을 했지만 카리나 양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고 했는데.”

“소나텍.”

뜻밖의 이름이 카리나의 입에서 나오자 모두 순간 얼어붙었다.


“소나텍이라는 이름의 남자였어요.”

“뭐라고요?”

마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소나텍이. 소나텍을 어디서 봤다고요?”

“병원으로 찾아왔어요.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제 이름도, 제가 어디서 왔는지 자신은 모두 알고 있다고 했어요.”

“그가 뭐라고 했나요?”

마리엘라가 다급히 물었다. 카리나는 망설여지는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제가 대공 전하와 이어질 운명의 상대라고 했어요.”

카리나의 눈이 엘리시아를 향했다.


“황태자 전하에게 죽음을 당할 운명은 엘리시아 영애의 몫이라고 말이에요.”

“아. 아아.”

마리엘라가 쓰러지듯 자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이 들었지만 소나텍은 하듄샤의 예언서에 그리 적혀 있다고 했어요. 저를 하듄샤로 데려가 직접 그 책을 보여주기까지 했고요.”

“하듄샤에 갔다고요?”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책을 보았답니다. 성소의 예언서가 실은 <눈먼 짐승의 꽃>이라는 책의 필사본이라는 걸요.”

내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이리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래서요? 대공 전하의 옆자리는 카리나 님이 머물 곳이니 엘리시아 님이 비켜주기라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리스. 그러지 말아요.”

엘리시아는 조금 희게 질린 얼굴로 이리스를 만류했다.


“아니요. 제가 그럴 이유가 있겠어요?”

카리나는 이리스를 보며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저는 황태자 전하께 납치를 당할 뻔 했어요. 대공 전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벌써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요. 대공저에서 지낼 때 전하께서 저를 대하시는 태도가 너무 친밀해서 당황스러웠는데 좋기보다는 두려웠어요.”

카리나의 에메랄드처럼 환한 녹색 눈동자에 그늘이 졌다.


“보통 상식에 맞지 않잖아요. 저와 대공 전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저를 그렇게 대하시는 걸 보고 어디 아프신 걸까 생각했거든요.”

침착하게 말하는 카리나를 보고 레브가 턱을 쓸었다.


“그럼 오늘 일레온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소나텍은 엘리시아가 제 자리를 뺏었다고 했어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예언서에 쓰인 대로라면 소나텍의 말이 맞기도 하지요.”

카리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원작을 바뀌었다는 걸 안다. 이미 바뀌어 적혀 있는 것을 원래 그렇다고 여긴다면, 책에 적혀 있는 것과 반대로 카리나가 사비엘과, 엘리시아가 일레온과 엮인 상태이니 말이다.


“어쨌든 제 생각에 저와 엘리시아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느꼈어요.”

초록빛 눈동자가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지 간에요. 엘리시아 님은 베르베로 떠난 거로 알았기 때문에 일단 대공 전하를 찾아뵙고 싶었던 거예요.”

“그랬군. 그럼 어찌하면 좋겠나?”

카리나는 선선히 일레온과 나란히 앉아있는 엘리시아를 보았다.


“제가 예언서대로 살지 않으려고요.”

의외의 말에 모두 카리나를 보았다.


“그런 책에 제가 좌지우지된다니 그런 걸 믿어야 하나요? 그리고 그 책에는 대공 전하께서 마주하실 운명의 여인은 저라고 나와 있었지만 저는 전하를 아주 나중에 만났고 전하의 눈을 낫게 해드리지도 않았어요.”

카리나는 힘을 주어 말했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손에 죽지도, 대공께 마음을 드리지도 않을 거예요. 저는 저대로. 제힘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그러나 곧 기가 죽었다.


“하지만 당장 머물 곳이 없어요. 황태자 전하는 해링턴 가를 감시하고 있어요. 해링턴 가로 돌아가면 저는 또 강제로 붙잡히고 말 거예요.”

“그래. 그대의 뜻을 이제 이해하겠군.”

레브가 수긍했다.


“당신도 예언서의 운명을 벗어나고 싶다는 거군요.”

내 딸처럼 살기 위해.

마리엘라가 온정을 담은 눈으로 카리나를 보았다.


“네.”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의외의 말에 날이 서 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엘리시아의 일이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는 이리스만 혼자 언성을 높였던 탓에 어색해했다.


“나중에 사과해.”

“네. 아가씨.”

엘리시아가 작게 속삭이자 이리스는 혀끝을 깨물며 애꿎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카리나 아가씨.”

집사가 깍듯한 태도로 손님방으로 카리나를 안내했다.


“전에 머물던 때에 사용하시던 옷들을 옮겨두었으니 크게 불편하시진 않을 겁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무엇이든 편히 청하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카리나가 상냥하게 미소 짓자 집사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태도가 다르네?”

집사가 물러가자 카리나가 그를 비웃듯 피식 웃었다.

전에 카리나가 엘리시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만 해도 저를 감시하듯 의심의 눈초리로 살피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더니 집사가 보기엔 카리나의 위치가 손님은 건 탐탁한 모양이었다.


“흐음.”

대공저의 손님방도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무거운 가구들과 두툼한 이중직으로 무늬가 짜여진 이불과 도톰한 커튼에서 기품이 흘렀다. 하지만 카리나의 눈에는 전에 머물렀던 대공비의 방보다는 못했다.

창가로 다가가자 어둑한 후원에서 꼭 달라붙은 채 걷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보였다.


“일레온. 엘리시아.”

조금 전까지 카리나도 저들과 함께 후원에 머물렀지만 피곤하다고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


「카리나 영애에게는 할 말이 없군.」

 
일레온이 조심스레 사과의 말을 건네었다.


「암시에 걸리는 건 소나텍이 부리는 잔재주라 하더군. 한번 깨어진 암시는 다시 걸리는 일이 없다고 하니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야.」

「그렇군요. 그러면 그때는 역시 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셨나요?」

 
일레온의 눈이 저절로 엘리시아를 향했다.


「그래. 카리나 영애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였어.」

 
카리나는 인형처럼 어색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리는 엘리시아를 보고 등을 툭 쳤다.


「뭘 그렇게 봐요. 우리는 서로 친구 하기로 했잖아요? 두 분께서 마음을 나눌 수 있어서 잘 됐어요.」

「……미안해요. 카리나. 내가 당신을 도와주겠다고 했었는데.」

 


“미안하다고? 참나. 내 운명의 길을 따르라느니 이리저리 좋을 대로 말할 때는 언제고.”

소나텍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도둑맞았다. 엘리시아라는 앙큼한 도둑에게 말이다.

카리나는 서로 끌어안고 있기라도 하는지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를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뺏는다고 뺏기게.”

일레온 클레벤트.

처음부터 카리나 그녀의 남자였다. 이 천년 제국의 역사와 다섯 주신과 오데르가 지명한 예언서에 적힌, 자신의 운명이었다.


“되찾고 말 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필요하다면 엘리시아를 사비엘의 칼 아래 끌어다 놓더라도.

마지막에 웃으며 행복해질 사람은 카리나 자신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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