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독점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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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독점하고 싶어
2022.12.31.
타박타박.
나란히 걷는 발소리가 제법 싸늘해진 밤공기에 싸인 후원에 퍼졌다.
엘리시아가 한참 말이 없자 일레온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카리나 말이에요.”
“카리나 영애가?”
“생각했던 것보다 멋진 사람이었어요.”
좀체 흥분하지 않는 엘리시아가 뺨에 홍조를 띠었다.
“나는 내 존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스스로 결정한 일은 없었다. 태어나길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고, 또 철이 들기도 전에 어머니가 판단한 대로 살았다.
휘둘리는 삶.
그리고 또 한 명 저처럼 예언서에 적힌 운명에 휘둘리고 있을 사람.
엘리시아에게는 카리나가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비틀린 운명 때문에 서로 반대의 입장이 되어버렸지만, 그 또한 카리나가 원한 일은 아닐 터였다.
「제가 예언서대로 살지 않으려고요.」
그런 말을 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차원적인 죽고 싶지 않다든지, 예언서에 적힌 운명의 상대인 일레온을 빼앗겨서 분하다든지 그러지 않을까 했다.
어느 쪽이든 카리나라면 엘리시아 자신을 원망하거나 탓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손에 죽지도, 대공께 마음을 드리지도 않을 거예요. 저는 저대로. 제힘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당당하게 자신이 나아가고 싶은 방향을 말하는 카리나에게서 빛이 났다.
엘리시아는 그런 카리나를 보자 여태 자신이 얼마나 수동적이고 의욕 없이 살았는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카리나의 입장이었다면 내가 밉거나 원망스러웠을 거예요. 나 때문에 자기가 죽을 뻔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일레온과 이어지게 도와달라고 할 때만 해도 평범한 귀족가 아가씨로만 여겨졌는데 대범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카리나가 달라 보였다.
“어쩐지 묘한데?”
“왜요?”
“그대가 카리나 영애를 칭찬하는 걸 듣고 있자니 왠지 거슬려.”
일레온이 눈썹을 찡그렸다.
“나를 그렇게까지 칭찬해준 적은 아직 없지 않나?”
“뭐예요. 당신은 자주 칭찬해줬잖아요.”
대뜸 반박하고 나서 엘리시아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예전 일을 더듬어보았다.
칭찬을 일레온이 눈이 보이지 않을 때는 자동 반사 기능인 양 자주 해주었다.
「잘하셨어요. 일레온 님.」
「어머. 혼자서 다 하신 거예요? 대단해요.」
「연습 열심히 하시더니 해내셨어요. 훌륭하세요.」
그건 로나가 하던 주요 업무였다. 일레온을 보살피며 그가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말벗이 되어주는 일. 그렇지만 왠지 일레온이 눈이 다시 보이게 된 후로는 딱히 그를 칭찬할 일은 없었다.
데이트할 때 옷차림이 근사하다고 했던 것 같기도?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지 않나?”
“네?”
“지금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를 칭찬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거로 보이는데.”
“아니에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잖아. 하. 조금 전에는 그냥 농담으로 해 본 말이었는데 카리나 영애를 질투라도 해야 할 것 같군.”
엘리시아는 당황스러웠다. 지금 갑자기 일레온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칭찬을 하기라도 하면 정말 그에 대해서는 ‘칭찬할 게 여태 없었다’는 걸 인정하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기분이 상한 듯한 그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미안해요. 일레온.”
결국 소심하게 그의 팔에 가볍게 매달리며 말했다.
“이런 얘길 카리나에게 직접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나 혼자 너무 흥분했나봐요. 내내 마음에 짐처럼 여겨졌던 일이었거든요.”
엘리시아는 모로 돌아가 있는 일레온의 고개를 제 쪽으로 돌리려 애썼다.
“그리고 당신은 너무 근사해서 그런 걸 멋지다고 말한다면 온종일 그 얘기만 해야 할 텐데…….”
그녀가 그의 뺨에 손을 대고 자신을 보게 하려 할 때였다.
쪽.
기습적으로 고개를 내린 일레온에게 엘리시아는 입술을 빼앗겨버렸다.
엘리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쳐다보자 일레온이 가느다란 목 뒤를 한 손으로 잡아 그에게 끌어당겼다.
“으흡.”
갑작스러운 키스에 숨이 모자란 엘리시아가 고개를 돌리며 가슴을 밀자 일레온이 살짝 입술을 떼었다.
“코로 숨을 쉬어야지.”
그러고는 방금까지 머물렀던 축축하고 뜨끈해진 자리로 돌아갔다.
“하아.”
일레온과 한참 붙어 있다 떨어졌더니 더는 은은하게 바람에 실려 오던 늦여름밤 꽃향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제 몸에서 그의 체향이 옮은 듯 옅은 샌달우드 냄새가 풍기자 엘리시아는 수줍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엘리시아.”
일레온이 조금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진지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 짙었다.
“장난이었어.”
“……네?”
엘리시아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내가 그대에게 기분이 상할 리 없잖아. 내 기분을 풀어줄 것처럼 당황해 하니까 귀여워서 놀린 것뿐이야.”
“아…….”
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지 않……나……?
겨우 이런 말을 하려고 그렇게 분위기를 잡았단 말인가?
아니잖아. 아니잖아요? 일레온. 그런 눈빛으로 ‘장난이었어’ 같은 말 할 때가 아니잖아!
엘리시아는 일레온에게 무언가 따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멋쩍게 고개를 떨어트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 하하. 요즘 당신에게 좋은 말을 해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반성 중이었어요.”
“반성해. 내게 너무 인색하다고.”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평소보다 잠긴 것처럼 낮게 느껴져서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만 들어갈까?”
일레온의 말에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왜 그런 거야? 도대체 알 수가 없네.’
고즈넉한 밤 산책을 마무리하는 잔잔한 분위기와 달리 말없이 저택을 향해 걷던 엘리시아의 머릿속은 조금 전 일로 혼란했다.
이제 자신이 오데르의 반려, 일레온의 짝이었다.
그리고 양가 어른들께서도 정식으로 인정한 사이였다.
그런데 일레온이 뭔가 제게 다가오려다가 물러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일레온.”
그를 부르자 일레온이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숙여 그녀를 보았다.
“조금 전에요.”
“응.”
“왜 하다 말았죠?”
천천히 걷던 일레온이 뚝 멈춰 섰다.
“하다…… 말다니?”
“평소에는 그러지 않았잖아요.”
“내가?”
“네.”
“내가 뭘 어쨌길래?”
대답은 하고 있으나 일레온은 심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걸 굳이 설명하기는 좀 그렇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던 건 확실해요.”
“무슨 소리야? 여긴 밖이잖아.”
“저번에 밤이라 깜깜해서 아무도 못 본다고 하면서 당신이 여기서……. 읍.”
일레온은 여유 있는 무표정이 조금 깨어진 얼굴로 엘리시아의 입을 막았다.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자 일레온은 천천히 막았던 입에서 손을 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조금 변했어요.”
“어디가?”
“몰라요. 뭔가 달라졌어.”
엘리시아는 눈꼬리를 내리며 뺨을 제 손으로 감쌌다.
“혹시 반려가 되면 매력이 떨어지나요?”
“뭐?”
못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일레온의 눈이 커졌다.
“그래서 키스를 하다가 말았어요?”
평소와 달리 손도 얌전하고 – 라고 덧붙이려다 엘리시아는 참았다.
“그런 적 없어.”
“아닌데. 다른 때 10 정도 좋아했다면 오늘은 4 정도였다고요.”
뭐든 선선히 시원스레 대답해주던 일레온이 그답지 않게 피하는 모습에 엘리시아는 더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왜 그래요?”
그가 애타게 자신을 원하는 느낌이 좋았는데.
“나는 당신이 예전보다, 어제보다 오늘 훨씬 더 좋은데.”
입을 틀어막고 심장을 죄던 강제가 사라지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감정이 널을 뛰었다.
일레온을 사랑해.
너무 사랑해.
그래서 그 말을 선뜻 입 밖으로 내기가 두렵다.
그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이제야 허락된 말을 너무 자주 해버리기까지 하면 무슨 벌이라도 받을 것만 같다.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양을 잰 듯 같을 수는 없으니까.
좋아하게 되는 때가 동시에 완전히 일치할 수가 없으니까.
일레온이 제게 미친 듯이 골몰할 때랑 지금에 와서야 그를 원한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된 자신의 타이밍이 다를지 몰랐다.
그래도.
아니면 좋겠는데.
그런 엘리시아를 보는 일레온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나를 도발하는 거네.”
일레온이 기세 좋게 그녀에게 제 감정을 들이댈 때면 항상 움츠러들며 도망가기 급급했던 엘리시아였다.
살기 위해서, 그녀의 생을 위협하는 그를 피하려는 본능적인 방어.
“맞아요.”
오늘 엘리시아는 달랐다.
너무 달라서 일레온은 금지된 어떤 사술에라도 손을 댄 기분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대로 마주 보고 서서 그가 바라는 대로 그에게 호응해주는 엘리시아는 처음이었다.
어째서 처음이라는 건 이렇게 금단의 열매처럼 느껴지는 걸까.
딸지 말지, 맛을 볼지 말지 떠올리기만 해도 아슬한 인내의 끝에 다다르게 할까.
일레온은 아랫입술을 입 안쪽에서 살짝 씹었다.
“아까 했던 얘기 기억이 안 나는 건가? 분명히 어머니들께서 우리 혼사를 얘기할 때도 부끄럽다고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어차피 해명해야 하는 거 부끄러워서 오해하시게 두겠다면서요?”
“엘리시아.”
이미 편안한 차림으로 단추가 두 개나 풀려있는 셔츠의 목이 조여드는 것처럼 답답했다.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한 것 같은데.”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밤에 물들어 어둑했다.
“그땐 낮이고 지금은 밤이잖아요.”
“밤에는 이렇게 겁을 상실하나?”
“앞으로 그런 거로 해요.”
언제는 자신은 로나가 아니라더니.
로나처럼 당돌한 성격은 본래 제 성격도 모습도 아니라더니.
이럴 수가 있나?
일레온은 머릿속이 얼얼해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낮에는 밝을 때는 안 되고요.”
덧붙이는 말에 정말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마다할 이유 없지.”
“흣.”
일레온이 엘리시아를 끌어안고 조각달처럼 희고 자그마한 그녀의 코끝에 입을 맞추었다.
“엘리시아.”
기분 좋게 귓가에 닿은 부름에 폭풍이 몰아쳤다.
밤이 내린 어둠의 축복이, 주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베르나르의 충심이 어둑하게 소등해놓은 저택의 현관, 홀, 그리고 층계참을 지나는 동안에도 둘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하아.”
엘리시아는 침대에 누워 일레온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단추를 풀고 셔츠를 벗는 동안에도 그는 제게서 잠시라도 눈을 떼지 않았다.
가슴 가득하게 뭉클한 만족감이 밀려왔다.
‘그를 독점하고 싶어.’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카리나가 그를 만나러 왔다고 했을 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일레온을 두고 등을 돌리는 일은 이제는 다신 있을 수 없다는 걸.
그를 누구와도 나눌 수도, 공유할 수도 없다는 걸 말이다.
“그대는 날 맞아주지 않을 건가?”
일레온의 말에 엘리시아는 헐렁한 신관복을 벗었다.
그러고 보면 일레온은 날 참 좋아해.
그의 마음을 흔드는 데는 옷차림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얇은 슬립만 걸린 채 그를 보자 일레온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웃었다.
“온종일 밤이었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