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밤의 엘리시아와 낮의 엘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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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밤의 엘리시아와 낮의 엘리시아
2023.01.07.
「……노트인가?」
꽤 두꺼운 노트를 슬쩍 펴보니 빽빽한 손글씨가 가득했다. 그러나 얼핏 보니 일기로 보이지는 않았다.
「희한하군.」
이런 비밀 공간에 숨겨둔 걸 보면 대단히 중요한 물건이어야 할 텐데 아무리 봐도 그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사하며 굳이 두고 간 걸 보면 대단치 않은 물건일 수도 있다는 아니러니가 동시에 느껴졌다.
그때였다.
펄럭.
노트의 갈피에서 종잇조각 하나가 떨어져 내려 일레온은 몸을 굽혀 그것을 주웠다.
어린애가 크레용으로 그린 것 같은 그림이었다.
삐뚤빼뚤 번진 선을 보자 갑자기 이 그림이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엘리시아 유테르라 했던가.
죽은 딸 물건을 소중하게 감추어 두었던 건가.
그거라면 이 집에 그대로 두고 떠난 것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괜한 물건에 손을 댄 것 같아 껄끄러운 기분을 느낀 채 일레온이 원래 있던 자리에 노트를 되돌려 놓으려 할 때였다.
사락.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본 일레온은 조금 놀랐다. 기감이 예민한 그가 느끼지 못한게 이상할 정도로 꽤 가까운 곳에 중년의 여인이 서 있었다.
금발이었던 머리의 반은 흰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였다.
그런데 살아 있는 것 같은 생기가 없어서 마치 유령을 본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녀를 보자 그가 왜 기척을 빨리 느끼지 못했는지 이해했다. 산 사람이 낼 것 같은 온기도 숨소리도 대단히 미약했기 때문이다.
「누구십니까?」
그가 침착하게 묻자 말할 기운은 있을까 싶은 여자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이 방의 주인입니다.」
「이런. 공작부인이시군요. 실례했습니다.」
일레온이 어깨를 펴고 태도를 바르게 했다.
「공작부인께서 베르베에서 지내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인께서 자리를 비우셨다는 생각에 너무 멋대로 둘러보았군요.」
「아니에요. 아닙니다. 대공 전하.」
유테르 공작부인은 한때는 대단한 미인이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위도 명예도 버리고 타국으로 떠날 정도로 극심한 마음고생을 한 탓인지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오늘 대공 전하께서 저택을 보러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답니다.」
「그러셨군요.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가주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저택 지하의 비밀 통로라던지.
일레온이 그녀의 말을 기다릴 때였다.
「아뇨. 그저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일레온은 머쓱한 기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반강제적으로 습득한 사교계 매너가 필요한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그렇지만 오래 전쟁터에서 머문 탓에 귀부인을 상대해야 하는 이런 때가 오면 그는 화술이 부족했다.
영애들은 거절하면 그만이지만, 부인들을 상대하는 건 정말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노트는…….」
공작부인의 말에 일레온은 얼른 손에 든 노트를 내밀었다.
「돌려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자 공작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대공 전하께 드리고 싶군요.」
「이걸 제게요?」
이 사이에 오래 간직했던 것 같은 따님의 어린 시절 손 그림이 있습니다. 부인.
그렇지만 그 말이 당장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 약해 보이는 공작부인의 마음에 상처가 될까봐 그리 말하기가 저어되었다.
「부탁입니다. 전하. 그 책을 읽어주세요.」
공작부인이 노트를 쥔 그의 손을 떨리는 두 손으로 감쌌다.
「꼭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
냐아.
냐아옹.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일레온은 잠에서 깨었다.
제 품 안에 흐트러진 짙은 금색 머리카락을 보며 흐뭇하게 입술 꼬리를 올리다가 손을 올려 이마를 쓸었다.
“또 이상한 꿈을 꾸었군.”
어쩐지 이마가 뜨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로의 몸을 꼭 끌어안고 잔 탓인지 엘리시아에게 오데르의 힘을 나눠주기 시작한 후로 무겁던 몸이 가뿐해진 기분이었다. 애정 행각에 따라 힘이 공유되다니.
“신의 취향을 알만한데.”
오데르의 힘에 대해 왜 쉬쉬했는지, 예언서를 썼다는 마리엘라 본인조차 모르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냐옹.”
흰 고양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트를 덮은 그들 위로 걸어왔다.
“할퀴면 안 돼.”
일레온은 이불을 끌어 엘리시아의 맨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우리 엘리시아는 소중하니까.
“냐아. 냐아아.”
쇼라고 했던가. 어쩐지 이 고양이는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했다.
“배가 고픈 건가?”
“냐아.”
대답하는 투에 일레온이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자 쇼가 눈을 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응. 일레온.”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결국 엘리시아도 깨고 말았다.
일레온은 아쉬웠다. 가끔 엘리시아를 보면 제 몸에 붙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는데 이렇게 그에게 안겨 잠들어 있을 때가 그 망상을 간접 체험할 기회였다.
좀 더 나른한 아침을 즐겼어도 좋았으련만, 엘리시아가 깨버리다니.
“잘 잤어요?”
밤에만 대범하다던 여자가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아침 인사를 건네자 아쉬움이 싹 날아갔다.
“그대는 잘 잤나?”
“응. 그런데 기분이 너무 좋아서 더 자고 싶어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제 품을 파고드는 엘리시아가 어찌나 귀여운지 일레온은 심장에 충격이 일었다.
문득 눈을 깜빡거리다 잠이 깬 얼굴로 엘리시아가 물었다.
“그런데 당신. 여기서 잔 거예요?”
“그게 어때서?”
“당신 침실로 갔어야죠.”
엘리시아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콩콩 때렸다.
“레브 전하랑 어머니께서 다 여기서 주무셨잖아요.”
“그분들은 손주를 기다리고 계셔.”
“…….”
말문이 막힌 엘리시아가 얼굴을 붉히자 일레온이 제 가슴을 때리던 그녀의 주먹을 곱게 펴주었다.
단풍잎처럼 편 손을 탄탄한 제 가슴에 손도장이라도 찍을 것처럼 가져다 대어주며 일레온이 은근하게 말했다.
“화풀이용으로 때리기엔 너무 아깝지 않아?”
“뭐, 뭐예요. 아침부터.”
낮밤에 민감한 엘리시아는 해가 뜨자 다시 소심해졌다.
밤의 엘리시아와 낮의 엘리시아 둘 다 좋은데 어떡하지.
어젯밤만 해도 온종일 밤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을 일레온은 잊었다.
“얼른 식당으로 내려가야죠.”
레브가 이 집에서 지낼 때 아침마다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그분들은 우릴 부르시지도 않았어.”
“진짜요?”
“지금쯤 손주 이름을 짓고 계시겠지.”
가운데에 유테르 가의 미들 네임을 넣어서. 일레온이 중얼거리자 엘리시아는 침대 바닥으로 손을 뻗어 원피스를 주워 입었다.
“얼른 일어나요.”
“안 그래도 이 녀석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그럴 참이었어.”
“냐아.”
제 존재감을 알아주어 고맙다는 듯 쇼가 깜찍한 표정으로 엘리시아에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까 당신 영주 성에도 고양이가 있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음. 그랬지.”
“어떻게 생겼어요?”
“흠. 이 녀석이 낯이 익다 했는데 그 고양이랑 좀 닮은 것 같기도 해.”
“그래요?”
“그 녀석은 털이 회색이고 눈동자가 노란빛이야. 털이 짧은 놈들은 다 비슷한가 싶기도 하군.”
“언젠가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쇼. 사이좋게 지내야 해.”
“냐아.”
절묘하게 대답하는 흰 고양이를 보며 일레온과 엘리시아는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쇼는 내가 키운 지 팔 년쯤 된 것 같아요. 당신 고양이는 몇 살이에요?”
“잘 모르겠는데.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성에 있었어.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도 있었거든.”
“정말요? 그러면 거의 스무 살쯤 된 거 아니에요?”
“그런가?”
“그렇게 오래 살기가 힘들 텐데.”
“그래?”
일레온이 묻자 엘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열 살쯤만 되어도 할머니 고양이라고 한다고요.”
“그 사이에 전장을 떠돌고 눈을 다쳐서 신경 쓰지 못했군. 베르나르가 대신 영지에 다녀오긴 했는데 고양이 안부를 묻진 않아서.”
“냐아.”
쇼가 울자 엘리시아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당신 고양이는 이름이 뭐예요?”
“호프만. 희망이라는 뜻이야.”
내가 지은 이름은 아니지만. 일레온의 말에 엘리시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뭐예요. 사람 이름 같아.”
그런 그녀를 보며 일레온이 미소지었다.
로나처럼 웃는 그녀의 모습이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
아침 식사를 마치고 그대로 둘러앉은 테이블의 분위기가 사뭇 무거웠다.
“실은 소나텍이 제게 협박을 했어요.”
마리엘라의 말에 이른 아침 대공저로 넘어온 질리언이 벌떡 일어섰다.
“부인.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질리언.”
“해를 가하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엘리시아를 그레로사로 보내라고 말했답니다.”
하듄샤의 신관들이 의아한 눈빛을 교환했다.
“알레한드로 대신관님께서 무너진 성소를 대신해 그레로사를 임시 거처로 삼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로벤이 말했다.
“어제 하듄샤에 일이 터지고 고위 신관들과 먼저 그레로사로 출발하셨지요.”
“그런데 그건 좀 이상하긴 했어요.”
이리스가 말을 받았다.
“그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 대신관님께서 끝까지 여기에 계셔야 하는게 아닌가 하고요.”
“맞아. 황제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대신관님을 모셔오라 했는데 그게 이미 알레한드로 님이 떠난 후였어.”
“그건. 그건 지금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요.”
마리엘라가 일레온을 보았다.
“대공 전하 생각은 어떤가요? 소나텍이 엘리시아를 그레로사로 보내라는데 그 말에 따라야 할지.”
그녀는 자신 없어 보였다. 무언가 함정이 있을 줄 알면서 딸을 보내려니 내키지는 않고, 그렇다고 보내지 않고 일을 해결할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을 달리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일레온이 입을 열었다.
“공작부인께서 처음 세웠던 계획은 예언서를 없애자는 거였습니다.”
엘리시아의 생명을 갉아먹고 계속된 수정으로 변수를 만드는 예언서를 없애서 더 이상 원작이 바뀌는 걸 막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수장고가 붕괴한 건 예언서를 훔쳐 간 것과 관련이 있겠지요. 소나텍이 그레로사로 오라고 대놓고 말했다면 예언서 역시 그레로사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요?”
모두 일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레로사로 가겠습니다.”
그가 동의를 구하듯 신관들을 보자 이리스와 로벤, 에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알레한드로 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하듄샤의 탈 것이 그리 넉넉한 건 아니지요. 며칠 이동에 필요한 것들을 수소문해서 순차적으로 수도를 떠나려고 할 것 같아요.”
로벤과 이리스가 한마디씩 보태자 일레온이 탐탁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을 달리해 보는 겁니다.”
“어떻게요?”
엘리시아가 묻자 일레온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제까지 그에게 우리의 수를 읽히고 있었지요.”
소나텍은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원작을 수정할 수 있는 능력도, 예언서도 그의 손아귀에 있는 셈이었다.
“그는 우리를 자신이 짠 판에 몰아넣으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판도 뒤집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술. 그건 일레온이 아주 잘 알고 잘하는 일이었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대공 전하.”
마리엘라가 묻자 일레온이 빙그레 입술을 휘었다.
“사냥을 할 겁니다.”
소나텍은 그 판 안에 자신도 포함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