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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사냥 준비 (107/151)


107. 사냥 준비
2023.01.11.



 


“사냥을 할 겁니다.”

일레온의 말에 마리엘라가 되물었다.


“그게 가능할까요?”

“그가 만든 판이지만 그 역시 그레로사에 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까지 소나텍이 어디에 머무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었지만.”

일레온의 눈이 한쪽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카리나를 보았다.


“그가 병원에 출몰하는 거로 봐선 다른 빙의자들처럼 생활을 하는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군요.”

실체가 없지 않다면 작정한 칼끝을 계속 피하기 힘들 것이다.

사냥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사냥감으로 낙인찍힌 것을 끝까지 쫓아가 잡고야 만다.

이제까지 소나텍이 엘리시아를 그렇게 이래도 저래도 좋을 사냥감 취급을 했다면, 이제부터 일레온이 소나텍을 그리 생각해줄 참이었다.

그러면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시야가 열리고 새로운 방법이 떠오르는 법.

그쪽에서 엘리시아를 노린다면, 일레온도 소나텍을 노리면 된다.


“그는 더 이상 예언서를 수정하기 힘듭니다. 엘리시아를 신관으로 만드는 데 그쳤지요.”

얼마간의 힘이 남아 있을 수도 있지만, 여주인공의 자리를 바꾸는 데까지는 무리였고 마리엘라가 가늠한 대로였다.


“그러니 그런 이능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면 그레로사에서는 반드시 엘리시아의 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 말은 우리 엘리시아를 미끼로 쓰자는 말인가요?”

마리엘라가 흥분하자 질리언이 그녀를 막았다.


“소나텍이 엘리시아를 그레로사로 보내라고 협박했다고 하지 않았소.”

“……네.”

“그 말을 따르지 않을 방법은 없소. 그렇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할 때 이미 엘리시아는 미끼 역이 될 수밖에 없는 거요.”

“그렇네요.”

엘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저는 그레로사로 가겠어요.”

“엘리시아는 제가 지킬 겁니다.”

일레온이 불안해하는 마리엘라를 안심시켰다.


“저와 함께라면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오데르가 원하는 짝을 반려로 만들어 힘을 나눌 수 있다는 건, 대대로 오데르 본인과 그의 짝이 되는 이 둘만의 비밀이었다.

이 힘을 일레온이 엘리시아에게 사용했다는 사실 또한 레브, 마리엘라 외엔 아무도 몰랐다. 엘리시아의 아버지인 질리언조차도 말이다.

일레온이 자신과 함께라면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한 말을 알아들은 마리엘라가 결국 수긍했다.


“대공 전하를 믿겠어요. 엘리시아를 잘 부탁해요.”

한참 나누던 이야기가 다음 목표를 정해 일단락되자 경직되어 있던 식당 안 분위기가 나아졌다.

그때였다.


“저도 그레로사로 함께 가고 싶어요.”

“카리나 양. 자네가?”

내내 듣는 쪽이었던 레브가 눈을 치켜떴다.


“소나텍은 저를 회유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원작을 마음대로 고친 건 그라고 여러분이 알려주셨지요.”

카리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나텍은 제가 그에게 속고 있다고 여기고 있으니 제가 도움이 될 때가 있을 거예요.”

“일레온은 진작에 하듄샤에 잠입을 했지. 카리나 양은 함께 가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우선 신분을 감추기도 어렵고 말이지.”

“……그런가요?”

카리나가 시무룩해지자 엘리시아가 이리스를 보았다.


“지금 하듄샤가 수장고 붕괴 때문에 소란해서 새로 누군가가 수련 신관이 되어도 알기 어렵지 않을까?”

“그렇긴 해요. 대신관 님도 계시지 않으니까. 함께 그레로사로 간다고 하면.”

카리나는 자신의 거지 같은 운명에 순종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가 짐덩어리 취급을 받는 걸 엘리시아는 보기가 힘들었다.


“카리나도 함께 가도록 해요.”

“정말요?”

“딱히 여기서라고 더 안전하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레브와 마리엘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도울게요.”

“고마워요. 카리나.”

다짐하는 그녀를 보며 엘리시아가 함께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럼 그레로사로 떠날 준비를 해야겠네. 노에리 형제 자리도 잘 마련해 놓을 테니 걱정 말라고.”

에쇼가 시건방진 말투로 떠들자 이번에도 로벤이 그를 데리고 퇴장했다.


“걱정하지 마.”

일레온이 엘리시아의 손을 꼭 쥐었다.


“내가 지켜줄 거니까.”

“믿어요.”

그녀가 힘주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음이 통하는 것만 같아.

두려운 일을 앞두고 있는데도 이렇게 한가로운 생각이나 해도 되는 걸까?

엘리시아는 자신의 변화가 스스로도 놀라웠다.


“주인님.”

베르나르가 일레온을 찾았다.


“무슨 일이지?”

“세드릭이 돌아왔습니다.”

“집무실에서 기다리라고 해.”

일레온이 아쉬운 투로 엘리시아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가봐야겠군.”

“얼른 가요.”

밤새 함께 잠들고도 미적대는 일레온의 등을 떠밀자 그가 식당 밖으로 사라졌다.


“이제 그만 준비하러 갈까요?”

일레온을 보내고 나자 여태 등 뒤에 손을 댄 채 벽에 기대있던 카리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요. 저는 준비할 게 많지 않지만요.”

“그렇겠네요. 신관복은 제 것을 빌려줄게요.”

“고마워요.”

엘리시아와 카리나는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리나가 서 있던 자리 뒤쪽에 놓인 화병의 꽃이 엉망으로 뜯겨 있는 걸 엘리시아는 보지 못했다.


 

***

일레온이 집무실에 들어서자 세드릭이 단정하게 고개를 숙였다.

칼같이 각이 잡힌 태도는 전장을 벗어나도 기사의 태를 벗지 못했다. 그런 세드릭의 모습이 흡족한 일레온은 의자에 앉으며 세드릭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세드릭은 고개를 젓고는 날 선 듯 뻣뻣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를 앉히는 데 실패한 일레온이 팔짱을 끼고 물었다.


“알아보라 한 일은 어찌 되었나.”

“말씀하신 병원에 대한 일입니다.”

세드릭이 품에서 서류가 든 봉투를 하나 꺼내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카리나 양의 말대로 소나텍이 그 병원에 드나드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게 쉽게 찾아냈다고?”

“그렇습니다. 카리나 양이 때때로 소나텍이 의사처럼 치료와 약을 처방해주었다고 했는데 그 병원 의사 이름이 소나텍이 맞습니다.”

일레온이 서류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갈색 머리카락에 연한 갈색 눈동자라. 그런데 나이가 이십 대 후반이라고?”

“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의사 공부도 베르베에 있는 의학원에서 했다더군요. 지금 배가 뜨는 시기가 아니라 베르베로 전보를 보낼 수는 없었지만 면허가 조작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말이 안 되는데.”

베르나르에 이어 세드릭까지 이 세계의 잡신 소나텍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일레온의 일이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세드릭은 엘리시아 때문에 그녀 곁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서 온갖 정보를 물어오는 중이었다.


“소나텍은 공작부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소나텍이 진짜로 있다면 공작부인과 또래거나 그보다는 나이가 많아야 할 텐데.”

“그러니 이상하더군요. 나이가 가짜가 아닌 건 신분 증명으로 확인했습니다. 베르베에서 태어나 출생 증명도 가지고 있더군요.”

“빙의 자체는 이 세계에 태어난 자의 몸에 어느 날 불현듯 의식이 든다니 그럴 수는 있어.”

단순히 조력자일까?

그렇게 생각하기에 카리나에게 전한 말들이 심상치 않다.

마리엘라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의 사람에게 예언서의 존재와 내용을 밝히는 건 금기라 하지 않던가.

제국이 붕괴할 정도로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 그게 소나텍이 바라는 바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병원의 소나텍이 카리나에게 했던 말들, 그리고 그녀를 하듄샤에까지 데려가서 예언서를 보여주었다며 썼던 그림자 이동에 대한 것들이 너무 그가 소나텍이 맞다고 가리키는 것 같아 찝찝했다.


“소나텍이 둘이라거나.”

“그 힘을 나눌 수가 있겠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그렇겠지?”

일레온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자의 소재는 파악하고 있나?”

“그게 수장고가 무너진 후로 병원에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보통 의사들처럼 진료도 하고 개인 용무로 외출하고 드나들며 그곳을 집 삼아 지내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래. 그레로사로 오라더니 그 후로 자취를 감추었다?”

일레온은 턱을 쓸었다.


“그레로사에 대한 조사는?”

“여기 있습니다.”

세드릭이 지도를 한 장 펼쳐 보였다.

점과 실선으로만 이루어진 지도는 군사용 전술지도를 암호화하려고 일레온이 고안해 낸 것이었다.

지형 지물의 높낮이를 숫자와 기호로만 표시하고 주요 지점과 연결되는 길을 선으로만 그어놓으면 규칙을 알지 못하는 이가 보게 되어도 한눈에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웠다.


“하듄샤는 빙의자들의 모임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이천 년이나 제국민들을 이끌어온 종교 역할도 겸하고 있습니다. 하듄샤 내부의 것도 그렇지만 그레로사 또한 정보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듄샤는 수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레로사는 먼 곳에 있는데다 훨씬 폐쇄적인 곳이었다.

빙의자들이 수련 신관의 지위를 얻으러 오는 성소와 정식 신관들만 갈 수 있는 그레로사의 입지가 달랐다.

그래서 하듄샤에는 이리스와 로벤, 에쇼의 조력을 받아 여러 번 예언서를 보기 위해 드나들었다던 마리엘라조차 그레로사에는 단 한번도 발걸음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신관들의 쉼터.

엘리시아 역시 안식년을 맞아 그레로사로 가던 길에 습격을 당한 터라 그에 대해 대외적으로 전해지는 것 외에 알지 못했다.


“수고했군.”

일레온이 탐탁한 얼굴로 칭찬하자 날이 서있던 세드릭이 눈가에서 힘을 조금 빼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전하.”

주군이 건네는 칭찬의 말에 겸양하면서도 일레온의 오른팔은 기쁜 듯 했다.


“뭘 얼마나 더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군.”

일레온이 한숨을 쉬자 세드릭이 물었다.


“전하께서도 그런 고민을 하시는군요?”

“그래.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지.”

엘리시아를 지키는 일에 매진하며 일레온은 지나온 전장을 곱씹었다.


“그동안 나는 목적 없이 검을 휘둘렀던 거였어.”

황제로부터 명을 받았고, 시키는 대로 눈앞의 적을 베었다.

제국의 검.

그리 불리는 존재에 인격은 필요하지 않았다. 승리를 가져오면 그걸로 족할 뿐.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 하나를 지키는 데는 아무리 준비를 해도 계속 모자라기만 했다.

엘리시아가 잘못되면 일레온은 자신도 살지 못할 걸 알았다.

그녀가 없을 때도 숨 쉬고 멀쩡히 살았는데, 새삼 그녀가 없으면 살지 못할 거라 여겨지는 건 뭘까?

그렇지만 반박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목줄이 그녀에게 매인 게 확실했다.


“그레로사로 함께 가주겠나.”

“그저 명하시면 따르겠습니다. 대공 전하.”

세드릭이 물러간 후 일레온은 대공비의 방으로 향했다.


“왔어요?”

무언가 부지런히 보퉁이에 정리하고 있던 엘리시아가 뒤를 돌아보며 그를 반겼다.


“응. 다녀왔어.”

일레온이 팔을 벌리자 엘리시아가 잰걸음으로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곧 달큼한 체리블라썸 향기가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고운 님이 주는 감동을 잠시 만끽한 일레온이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낮인데 오늘따라 후하군.”

“커튼 치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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