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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일레온 효과 (108/151)


108. 일레온 효과
2023.01.14.



“커튼 치면 되니까요.”

엘리시아가 받아치는 말에 일레온이 기꺼워했다.


“좋아. 이 방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어.”

“후훗. 농담 그만 해요. 당신 부관이랑 무슨 얘기 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그런 게 궁금해?”

“그냥 조금.”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긴 소파에 데려가 앉혔다.


“그레로사에 세드릭이 함께 가기로 했어.”

“정말요? 괜찮을까요?”

“그는 최고의 기사야. 그대를 지킬 사람이 하나 보단 둘인 게 낫겠지.”

일레온이 작정한 듯 엘리시아의 다리를 베고 드러누웠다.


“한동안 이런 생활이 그립겠군.”

엘리시아와의 이런 일상이 모래 위에 쌓아 올린 성과 같다는 걸 안다.

그래도 눈앞에 놓인 행복이 아무리 허상이라도 좋기만 해서 늘 아쉬웠다.


“이런 날이 매일이 되게 하려는 거잖아요.”

투정 부리듯 내뱉은 말에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그렇지.”

“일레온. 나도 당신을 지켜줄 거예요.”

깜찍한 말에 일레온은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어여쁜 손이 가만히 그의 흐트러진 머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작고 희미해서 더 소중한 한 때가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

다음 날, 그레로사로 향하는 일행은 빈말로도 단출하다 하기 어려웠다.

우선 하듄샤의 신관 이리스와 로벤, 에쇼. 그리고 엘리시아.

일레온과 세드릭.

거기에 카리나.

그들을 마차 두 대에 나누어 태우고 마차를 몰 마부 두 사람과 마차당 말을 탄 호위 둘씩 넷을 추가하니 무려 열셋이나 되는 대인원이었다.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요?”

“소나텍이 그런 거 신경 쓰겠어? 누나가 그레로사에 오는지 안 오는지만 중요할걸.”

호위를 맡은 기사들은 누가 봐도 거한이었기에 에쇼의 말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조심하도록 해요.”

마리엘라가 근심 어린 눈으로 당부했다.


“예언서를 없애든 소나텍을 없애든 둘 중 하나는 꼭 하고 돌아올 겁니다.”

“믿음직하네요. 다치지 말고 엘리시아를 잘 부탁해요.”

대공저를 출발한 마차는 콘스탄스 에비뇽 성 밖에 잠시 멈추었다.

그러자 얼마 후, 흰 후드를 눌러쓴 신관들을 태운 비슷한 마차가 속속 옆에 멈추었다. 그 마차에도 마부와 호위가 둘씩 달려 있었다.

긴 마차행렬의 장관을 보고 엘리시아가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일이예요?”

“다이아몬드는 모래 속에 숨기라는 말 들어본 적 없나?”

엘리시아와 일행을 알아본 다른 신관들이 마차 창문 너머에서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레로사로 갈 이동수단을 구하지 못한 신관들을 위해 마차를 빌렸지.”

“이런 건 생각도 못 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호위들이 너무 눈에 띈다고 걱정하던 엘리시아는 금방 시름을 던 얼굴이었다.


“나중에 봐요. 일레온.”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세계 평화를 위해 남자끼리, 여자끼리 한 마차를 타기로 해서 그레로사까지 가는 동안 일레온과 내내 따로 다녀야 한다는 점이었다.


“우와. 나 정말 대단하다.”

그레로사에서 벌어질 일들이 눈곱만큼도 걱정되지 않는 걸 보면 일레온 효과가 대단했다.

엘리시아는 마차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장관을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마크시스 황제는 혼란했다.


“대신관이 아직도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이냐.”

“예. 황제 폐하.”

하듄샤의 지하가 무너져내렸다.

이틀이 지난 아직도 쿠르릉 하며 땅이 울리는 진동이 황궁을 흔들고 있는데 이 사태에 대해 무어라 알려주어야 할 이가 부재했다.


“그레로사로 떠나시면 몇 달 동안도 연락이 잘 닿지 않는 분 아닙니까.”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저 혼자 그레로사로 피하다니. 위험한 상황이라면 황궁 안에 있는 이들 또한 피해야 옳은 게 아니냐.”

“황제 폐하. 너그러우시고 현명한 판단에 그저 감탄할 뿐이옵니다.”

옆에서 꿀을 바른 듯 아첨하는 시종장의 말조차 오늘은 거슬릴 뿐이었다.

하듄샤가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주저앉은 후로 마크시스 황제는 제대로 국정을 돌볼 수가 없었다.

황궁 안의 어마어마한 인원을 대피시키는 일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가 쉬이 수도의 궁을 버리고 피한다는 게 국민들 보기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경쟁이 없어 황권 유지가 수월한 제국이라도 국민들의 존경을 얻고 온건하게 통치해나갈 수 있는 건 다른 문제였다.

스트레스 탓에 일거리가 산재한 국정을 제대로 돌볼 수도 없었다.


“신탁이라도 받아와야 할 게 아닌가.”

그의 타박에 시종장이 쩔쩔매었다.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위 신관 역시 행방이 묘연하다 하옵니다.”

“그레로사로 사람을 보내든지 뭐라도 해서 주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신관이라도 하나 모셔오도록 해라.”

“네. 황제 폐하.”

신의 대리인은 그렇게 아무 때나 나타나서 왜, 무엇 때문에 해야 하는지조차 모를 일을 좋을 대로 시키더니 이럴 중요할 때 입을 닫고 있는가.

마크시스 황제는 속으로 의문했다.

황실 비밀 서고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신의 대리인이 이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왜 하필 자신의 대에 이르러 이런 일이 생기느냔 말이다.

마크시스 황제는 몹시 억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릴 곳이 다섯 주신과 오데르. 그가 섬기는 신뿐이었다.

오늘도 잊지 않고 황제의 침실 안에 무릎을 꿇고 통고의 기도를 올릴 때였다.

훅.

바람이 불더니 방 안을 밝히던 초가 일시에 꺼졌다.


“오오. 신의 대리인이시여.”

마크시스 황제는 저도 모르게 감격했다. 며칠 동안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다섯 주신의 심부름꾼이 나타난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말씀을 내려주소서.”

하듄샤를 어찌해야 할지.

성소는 신전의 건물이지만 황궁의 부속건물이기도 했다.

하듄샤를 짓고 관리하는데 드는 돈은 황실 예산에 책정되었다.

그런 것이 땅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자 신의 심부름꾼이 입을 열었다.


“황제 마크시스는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뜻을 받들라.”

“예. 말씀하십시오.”

“엘리시아 유테르를 황태자비 후보로 만들 필요는 없다. 사비엘의 혼사는 본인이 좋도록 하도록 해라.”

“예. 신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또. 얼른 하듄샤의 일을 해결해주십사 머리를 조아릴 때였다.

신의 말씀이 더는 없어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그가 사라진 후였다.


“아아. 이럴 수가.”

마크시스 황제는 낙심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 사비엘의 혼사 따위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무너진 돌더미에 깔려 죽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신이시여. 어찌 제게 이러십니까.”

마크시스 황제는 분심이 치밀어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시각 분노한 황제의 심경 변화를 뒤로하고 소나텍은 수정궁에 들어서며 가면을 벗었다.


“소나텍. 자네가 와주었군.”

“예. 황태자 전하.”

온화한 갈색 눈동자를 지닌 청년을 보며 사비엘이 손을 흔들었다. 사비엘은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내 친구. 한 잔 받게.”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사비엘은 소나텍에게 잔이 흘러넘치도록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안 그래도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 어디 한번 읊어보게.”

소나텍이 사비엘에게 다가가 가까이 앉아 목소리를 낮추었다.


“카리나가 아이를 잃었답니다.”

“뭐라고?”

사비엘이 눈을 부릅떴다.


“전하의 허락도 없이 아이를 배어 노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니. 자네가 손을 쓴 건가.”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 하하하. 내 이제 편히 잘 수 있겠군.”

카리나가 아이를 가졌다며 울며 매달린 후로 사비엘은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실현되지 못하는 암시는 끌 수 없는 명령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며 그의 정신을 갉아댔다.

아이가 사라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아이 가진 여자에 대한 살의가 마음속에서 사그라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 그 여인을 수정궁에 다시 불러준다 약조한 적이 있었지. 조만간 얼굴을 한번 보아야겠군.”

사비엘이 비열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이제 황태자 전하께서 무엇이든 바라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래. 그래야지. 하하. 엘리시아. 엘리시아와 결혼하는데 방해물이 전부 사라진 셈이니.”

그러나 엘리시아에 대한 삐뚤어진 집착은 여전했다.

그런 사비엘을 보며 소나텍은 술로 입을 축였다.

오늘따라 술이 달았다.

***

그레로사로 향하는 길은 순조로웠다.

워낙 대인원이 열을 지어 이동하는 데다 솜씨 좋은 호위들의 기세 탓인지 늑대나 곰 같은 산짐승의 습격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넓은 평야와 구릉 지대를 벗어나 협곡이 있는 라르칸 산맥의 초입에 다다르자 점점 힘들었다.

그레로사로 가는 길에 사비엘의 습격을 받고 형제들이 목숨을 잃은 건 벌써 여덟 달 전의 일이었다.

그 사이 반년은 기억을 잃고 일레온의 곁에서 지냈고, 그다음 두 달은 그를 밀어내고 외면하고 도망치려다 돌아와 끝내 곁에 머물기로 한 시간들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인지 신전에서 지난 십칠 년의 세월보다 지난 두 달 동안 더 많은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어느새 습격을 당한 날의 참상이, 제 발 아래를 붉게 물들이며 빙의자이면서도 이 세계 교리에 따른 기도를 해달라며 죽어가던 단상들이 꿈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잊혔었는데.

눈에 익은 협곡 근처의 지형에 접어들면서는 머리와는 달리 몸이 혼자 미쳐 날뛰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실제로 아픔이 있었다.

자꾸만 손이 차가워지고 심장의 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때때로 위가 죄어드는 것처럼 아프고 장을 토막토막 끊는 것처럼 날카로운 복통이 엄습했다.


“엘리시아 아가씨. 괜찮으세요?”

이리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엘리시아는 희게 질린 얼굴로 이마에 송글송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괜찮아.”

“어디가 안 좋으세요? 말씀을 해주셔야 약을 드리죠.”

약초를 이용하여 약을 만드는 건 이리스의 특기였다.


“그냥 멀미인 것 같아.”

그러나 증상을 속 시원히 말하지 않는 탓에 멀미약을 주어도 호전되지 않으니 걱정하는 사람만 애가 탔다.

결국 참다못한 이리스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쉬어가는 시간에도 끙끙 앓으며 마차에서 내리지도 못한 엘리시아의 이마에 서늘한 손길이 닿았다.


“……일레온.”

가늘게 눈을 떠보니 마차 안에는 자신과 일레온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마차에 여유 자리가 있어. 걱정 마.”

일레온이 한숨을 쉬며 엘리시아를 끌어안았다.


“어디가 아픈 거야? 이리스 말로는 도통 말을 하지 않고 계속 앓는다는데.”

마음이 아파요.

엘리시아는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들이야말로 저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엘리시아를 낚아채려는 사비엘에게 거슬린다는 이유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얼마 전 신전에 복귀하던 날 임종을 지켜보았던 델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겠지?」

「아니야. 우리 모두 함께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래? 엔딩이 이루어졌을 때 나처럼 영혼만 남은 자들도 챙겨서 돌려보내줄까?」

 
그들은 간절한 바람을 가슴에 담고 묵묵히 이 세계에서 버티려 했을 뿐인데.

델마가 떠난 후 엘리시아는 매일 기도했다.

그레로사로 가는 길에 잃은 형제들의 영혼도 언젠가 본래 세계, 어머니가 떠나온 세계로 돌아갈 수 있기를 말이다.

가만히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던 일레온이 작게 말했다.


“울고싶으면 울어. 엘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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