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몇을 보태어도 티가 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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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몇을 보태어도 티가 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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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몇을 보태어도 티가 나지 않을 테니
2023.01.18.
“울고 싶으면 울어. 엘리시아.”
“……일레온.”
엘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울면 안 돼요.”
위로를 싣고 등에 닿는 그의 손길조차 받을 자격이 없다.
“나 때문에 형제들이 목숨을 잃었어요.”
처음부터 하듄샤를 제 목숨 구명할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 스스로 결정한 것은 없으나 엘리시아는 운명의 무게에 늘 짓눌렸다.
‘일레온이 이런 날 보면 실망하겠지?’
그러고 보면 그에게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건 엘리시아 자신이 아니라 ‘로나’라고 생각했던 날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일레온은 그를 피해서 도망치듯 하듄사로 돌아가버린 자신을 찾아와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너야. 엘리시아.」
말 한마디에 조금씩 마음속에 세운 벽들이 갉혀나갔다.
강제력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그에게 사랑한다는 진심을 입 밖으로 낼 정도로 말이다.
거기가 자신의 밑바닥이라고 생각했다.
이보다 더 일레온에게 내보이기 부끄러운 감추고 싶은 모습은 없을 거라고.
하지만 바닥의 바닥, 그 아래에 또 아래가 있었다.
불행을 몰고 다니는 재수 없는 삶.
제가 겪고 있는 끔찍한 수렁의 한복판으로 일레온을 결국 끌고 왔다는 뒤늦은 자책감이 들었다.
“어쩌면 당신도 위험할지 몰라. 안 되는데…….”
눈가가 시큰했지만 엘리시아는 울지 않았다.
“나 때문에 당신이 다치면 안 되는데.”
온통 붉은 혈흔으로 뒤덮였던 이 자리에 쓰러진 게 그여서는 안 될 텐데.
“콜록. 콜록.”
엘리시아는 잘게 기침했다.
목이 아프도록 메어오는데 억지로 눈물을 참았더니 목구멍을 안쪽을 무언가가 긁어대는 것만 같았다.
한번 이 자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일레온을 상상하니 막연한 두려움이 더욱 거세어졌다. 엘리시아는 주체할 수 없이 온몸이 벌벌 떨렸다.
그때 내내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던 일레온이 품에서 엘리시아를 놓았다. 엘리시아는 얼결에 고개를 들어 일레온을 보았다.
그러자 제게 온화하게 닿아 있는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죽음의 무게는 가볍지 않아. 그대는 버거워하고 있군.”
아니, 꼭 그렇게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는 건 아닌데.
엘리시아가 도리질 치는 걸 본 일레온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나는 사신인가? 내 명령 하나에 적진에 뛰어들었다 목숨을 잃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거늘.”
“이, 일레온. 그런 말은…….”
갑작스레 비약된 그의 말에 엘리시아가 어쩔 줄 몰라하자 일레온은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떠난 이들을 감당하기 힘든 것 같으니 내가 대신하지.”
그는 별일 아닌 듯한 말투였다.
“어차피 거둔 목숨이 많아 몇을 보태어도 티가 나지 않을 테니.”
마치 그녀가 남긴 차나 간식을 대신 먹어주겠다는 듯한 말투로.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는 꽃을 대신 가져가기라도 하겠다는 투로.
여상하게 말한 남자의 손이 그녀의 머리 위에 가볍게 얹혔다.
“그러니까 참지 말고 울어. 그래도 돼.”
“흐윽.”
엘리시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의 허락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일레온이 울어도 된다고 말하자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봇물 터지듯 했다.
“으흑……!”
흐느끼던 엘리시아는 이내 소리를 참지 못하고 절규했다.
차마 저 때문에 개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애도할 자격조차 없는 것 같아 되도록 떠올리지 않으려고만 했다.
바론. 아헬.
경황없이 눈을 감을 너희의 영혼은 어디쯤에 있을까.
지금쯤 델마가 너희를 만났을까.
그래서 엘리시아는 자신으로부터 도망쳤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줄줄 외울 정도로 제 무덤 자리인 사비엘 때문에 기억을 외면한 게 아니었다.
낳아준 부모님보다도 함께 자란 정이 깊은 이들이 엘리시아의 동기들이었다.
그녀를 길러준 하듄샤가 진짜 집이었다.
한순간에 그것이 엉망이 되고 그 재앙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걸 겪어보니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생생하게 되새김질 되는 그날의 고통을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가슴에 기대어 울며 견뎠다.
한참을 울다 격렬하게 흐느끼던 울음이 잦아들었다.
“차라리 내가 죽어야 했다고 생각했어요.”
끝내 가장 음습한 곳에 숨겨둔 진심을 내뱉자 속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더 귀하고 덜 귀한 목숨이 없는데. 나 때문에 누군가 죽다니.”
엄마가 그러라고 하는 대로 따를 때는 저로 인해 다른 사람이 죽음을 맞을 거라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해보지 않았다.
“네가 죽음을 맞았다면 이 세계는 멸망했을 거야.”
일레온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네가 없다면 나 역시 온전히 살 수 없었을 테니까.”
“……나랑 만나기 전이잖아요.”
“그대가 내 운명의 짝이지 않나.”
그가 하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엘리시아는 어째서 카리나가 그와 마주치지 않는 건지, 이러다 그의 눈을 고칠 기회가 날아가면 어쩌나 전전긍긍했지만 실은 자신이 그를 보살피는 하녀가 되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비틀렸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녀가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카리나와 자연스레 만나 눈을 떴을 수도 있다고.
“엘리시아. 나는 널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는 말이 싫을 리 없었다.
“그대는 웃으며 살아. 고통스럽게 하는 짐스러운 것들은 모두 내가 가져갈 테니.”
그렇게 넘겨줄 수 있는게 아닐 텐데도 그가 그렇게 말하니 가슴이 조금 후련하고 가벼워졌다.
“당신은 이상해요. 가끔은 나를 조종하는 거 같아.”
코를 훌쩍이며 중얼거리자 일레온이 검지로 코끝을 튕겼다.
“반대가 아닐까?”
“당신이 괜찮다고 하면 진짜 그런 것 같거든요.”
“나는 늘 진심이야. 내겐 그대에 관련된 게 아니면 중요한 게 없거든.”
엘리시아가 허술하게 웃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누가 들으면 정말인 줄 알아요.”
“남들은 몰라도 그대는 알아주길 바라.”
“일레온. 고마워요.”
미안하다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었지만 엘리시아는 고맙다는 말로 대체했다.
“별말씀을. 하지만 내가 그대를 조종할 수 있었다면 다른 말을 하게 했겠지.”
제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자 분한 없이 애정표현을 하려드는 그를 보며 엘리시아는 눈을 감았다.
‘마차 타고 오는 동안 잘 못 봤으니까.’
핑계도 손수 붙여주었다.
***
카리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마차를 노려보았다.
원래 엘리시아와 카리나, 이리스는 한 마차를 타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시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이리스의 말에 마차에 탄 이들이 다른 마차로 자리를 옮기고 일레온이 안으로 들어간 지 한참이었다.
“도대체 뭘 하길래 나오지를 않는 거야?”
엘리시아와 이리스 셋만 타고 갈 때는 좀 더 편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자리를 조정해서 이리스와 함께 다른 여자 신관들이 탄 마차로 자리를 옮기자 카리나는 정말 낯을 가리고 부끄러워서 말을 못 하는 척 가장하며 입을 딱 닫고 가야 했다.
신관들과 함께 그레로사에 가기 위해 막 이 세계에 오게 된 빙의자를 가장하고 있으나 가짜라는 걸 들킬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둘이 뭘 하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카리나는 주저하면서도 마차로 다가갔다.
계획한 일을 실행하기도 전에 의심을 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사비엘 때문에 아프고 충격받았을 때 절절하게 위로해주던 일레온이 그리웠다.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지만, 늘 냉정하게 선을 긋던 카리나 그녀에게 자신이 한 적 없는 말과 행동을 추억인 양 빗댈 때 무언가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있구나, 지금 저 남자 정신이 온전하지 않구나 싶으면서도 손을 잡아주고 기댈 수 있게 어깨를 빌려주는 친절에 빠져들었다.
그래서일까.
예언서의 존재를 알게 되었노라 말한 제 앞에서 모든 일이 깔끔하게 해결된 것처럼 안도하며 시선을 교환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지금 카리나는 사뭇 정부와 바람난 남편을 단속하러 온 아내와 같은 심정이었다.
일레온은 내 남자인데.
저 애정도 관심도 모두 원래 내 것인데.
제국사의 전설이자 비밀이 담겨 있는 예언서의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났고 적혀 있는 내용이 진실이었다.
그런데 우습지 않은가?
일레온이 저와 인연이 닿아 사랑에 빠지게 될 거라는 그 부분만 거짓이라는 게 말이다.
내내 바깥에서 알아들을 만한 소리가 들리지 않던 마차 밖으로 감출 수 없는 통곡 소리가 들렸다. 엘리시아의 울음이었다.
“뭐야. 울고 싶은 건 나라고.”
카리나는 조소하며 팔짱을 낀 채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일레온이 빨리 저기서 나왔으면 좋겠는데.
우는 소리가 그친 후로도 마차 안에서는 일레온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엘리시아를 두고 밖으로 나온 걸 확인하지 않고서는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밖에 서서 기다리다 멀리서 새벽 동이 터오자 카리나는 분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
“카리나. 거기서 뭐 해요?”
이리스가 잠이 깨었는지 마차에서 나오다 밖에 서 있는 그녀를 보았다.
카리나는 뒤를 돌며 무구한 얼굴로 웃었다.
“이리스. 잘 잤나요? 엘리시아가 걱정이 되어서요. 따뜻하게 끓인 물이라도 가져다줄까 싶어서 보러 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렇군요.”
이리스가 부은 눈으로 푸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여자.
이리스의 약점은 엘리시아였다. 엘리시아에게 해가 될법한 일에는 줄이 풀린 미친개처럼 달려든다. 반면 엘리시아에게 우호적이라면 뭐든 좋다고 헤헤거렸다.
‘자기가 엘리시아를 낳기라도 했어?’
분명 마리엘라가 노예시장에서 구해왔다고 들었는데. 피 한 방울 섞였을 리 없는데 이리스가 엘리시아를 위하는 걸 볼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해링턴 백작부부는 먼 친척으로, 분명 한 방울 이상 피가 섞였을 터인데도 사비엘에게서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으니까.
일레온도, 이리스도, 또 다른 신관들도.
엘리시아를 어찌나 위하려 드는지 그사이에 껴 있자니 역겨웠다.
이리스가 마차에 살금살금 다가가서 조용히 문을 열자 아침햇살이 더듬은 문 틈새로 모포로 감싼 엘리시아를 품에 안고 잠든 일레온이 보였다.
큰 체격의 남자는 분명 불편한 자세일 텐데, 그가 팔과 다리로 기댈 수 있게 안아준 여자는 요람에 누운 갓난아기처럼 새근새근 달게 자고 있었다.
“더 자게 두는 게 좋겠어요.”
엘리시아의 병증이 나아진 걸 확인한 이리스가 사람 좋게 웃자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하지만 가면을 쓰기가 힘들어서 표정을 제대로 숨길 수가 없었다.
“아뇨. 엘리시아가 뭘 제대로 먹지 못한지 너무 오래 지나서요. 지금 나아진 것 같으면 깨워서 설탕물이나 죽이라도 먹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싶고 걱정돼서.”
투기하느라 떨떠름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것을 염려로 포장하자 이리스가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예요.”
그 말마따나 얼마 후 깨어서 마차 밖으로 나온 엘리시아는 산뜻한 얼굴이었다.
“다른 마차로 옮겨서 불편했죠?”
“괜찮아요. 엘리시아. 몸이 나아져서 다행이에요.”
카리나가 커다란 물주머니를 들고 협곡 쪽으로 발을 옮기자 엘리시아가 물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물 뜨러 가요.”
“저도 갈게요.”
엘리시아가 덩달아 놓여있던 빈 물주머니를 들자 카리나가 손을 저었다.
“내내 아프던 사람이 무슨. 저 혼자 다녀올게요.”
“미끄러워서 위험하다고 들었어요. 저랑 같이 가요.”
그레로사까지는 이제 반나절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식수를 뜰 수 있는 협곡은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 있기에 먼 길을 오가는 이들을 위해 한나절 거리를 두고 두 곳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고생스레 돌을 깎아 만들었을 좁고 가파른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자 거칠게 흐르는 협류 옆으로 역시 절벽을 조각해서 샘을 만들어놓은 게 보였다.
콰가가가가.
절벽 틈새를 울리는 물소리에 괜히 내려왔나 잠시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엘리시아는 내색하지 않고 물주머니에 물을 담기 위해 몸을 숙였다.
탁!
두 손을 샘으로 뻗던 몸이 옆으로 세게 밀리자 순식간에 몸이 협곡 쪽으로 기울었다.
“앗!”
풍덩.
협곡의 물살은 보기에도 거칠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 상상할 수 없게 억센 격류였다.
순식간에 물에 휩쓸린 엘리시아가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가까스로 절벽에 매달리려 했지만 오래 닳고 닳은 자리들이 미끄러웠다.
“도, 도와줘요.”
카리나는 감정이 결여된 사람처럼 그저 엘리시아를 쳐다만 보았다.
“카리나. 어째서…….”
엘리시아가 버티며 묻자 카리나가 조소했다.
“넌 언제 물어보고 내 것을 뺏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