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 상처들이 아물고 난 후에 (112/151)


112. 상처들이 아물고 난 후에
2023.01.28.



“나 못 믿어요?”

“믿어.”

“그런데 왜 그렇게 소극적이에요?”

일레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첫째는 물에 빠져서 죽을 뻔한 사람은 다들 그렇게 변하는 건가 의아했고 두 번째는 나도 믿을 수 있는지 고민 중이었어.”

“그렇군요. 죽다 살아서 안 하던 짓 하는 거로 해요. 그게 좋겠네요.”

엘리시아의 말에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일레온이 드디어 젖은 신관복을 벗었다.

애초에 위에 두르는 후드형 망토와 자루처럼 헐렁하게 발목까지 내려오는 옷이다.

일레온은 바지만 입은 채 젖은 옷을 한쪽으로 가져가 물을 짰다.


“엉망이군.”

그가 침착하게 할 일을 하는 걸 보며 엘리시아는 애가 탔다.

결국 참지 못하고 등 뒤로 가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하아.”

근육으로 촘촘히 채워진 등에 이마를 대자 반려의 의식을 치르는 동안 안고만 있었다는 그의 말이 바로 이해가 됐다.


 
옷을 벗은 신의 후손을 안고있는 것만으로도 천천히 흐려지던 아픔이 일시에 사라져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푸훗.”

엘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왜?”

“당신 내가 한숨 쉴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움직여요.”

일레온이 눈을 찡그리며 몸을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이제 다 나았나 보지?”

“음. 으음. 네. 그런 것 같아요.”

엘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일레온은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럼 이제 봐주지 않아도 되겠군.”

“…….”

뭘 봐주고 있었냐고 따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저를 조심조심 다루던 손길에 익숙한 과감함이 돌아왔다.


“춥지 않아요?”

일레온의 다리 위에 올라앉은 자신은 괜찮지만, 냉한 동굴의 바위에 걸터앉은 그는 추울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전혀.”

선선한 대답에 엘리시아는 미소 지었다.


“그럼 조금만 더.”

몸의 상처들이 아물고 난 후에는 쓰라린 마음의 상처도 낫게 해달라고 우길 셈이었다.

***

엘리시아가 급류에 휩쓸려 간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죠?”

“하필 엘리시아가 또 이런 일을 당하다니.”

안식년을 맞아 그레로사로 향하던 길에 실종되었다가 기억을 잃은 채 하듄샤로 돌아왔던 그녀가 또다시 같은 곳에서 사고를 당하다니.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실로 하듄샤의 신관들이 빙의자라 한들 모두 <눈먼 짐승의 꽃>을 완독했을 리 없다. 실수로 회차를 잘못 열고 읽지 않은 사람도 여럿이었다.

오히려 끝까지 읽지 않은 빙의자일수록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신성에 대해 더 깊이 골몰했다.

그들은 신의 뜻이 운명을 인도한 게 아니라면 예언서를 다른 세상에서 마저 보지도 않은 자신이 이렇게 다른 세상에서 숨을 쉴 리 없다고 여겼다.

이 세계에서 신과 세상의 비밀을 지키는 신관의 역할에 진지하게 매진하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이건 이변이 아닙니까.”

“주신들이 뭐라 하십니까? 신탁을 받아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로벤과 에쇼는 그들을 둘러싸고 신들의 말씀을 들어보라고 아우성치는 다른 신관들 때문에 곤욕이었다.

늘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도움은 주지 않는 신들은 신탁을 열고 기다려도 아무런 말 한마디 없이 조용했다.


“하듄샤가 무너진 것도 그렇고. 엘리시아가 또 사라진 것도 모두 불길해요.”

“이러다 엔딩을 볼 수 없게 되는 거 아니에요? 엔딩을 봐야 돌아갈 수 있는데.”

이리스는 불안에 떠는 이들을 보며 속으로 콧웃음을 쳤다.


‘이 와중에도 엔딩 타령이라니. 엘리시아를 구하러 협곡에 뛰어든 게 일레온이라는 사실을 알면 다들 기절이라도 하겠네.’

일레온이 하듄샤에 잠입했던 건 극비였다.

아닌 게 아니라 엘리시아가 물에 빠져서 수련 신관 한 명이 구하러 뛰어들었다 – 정도로 알려졌지만, 함께 실종된 그가 실은 그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귀환 티켓의 행방을 좌우할 남주라는 사실을 입 밖에 낼 수 없어 이리스는 안타까웠다.

이 사태의 심각성을 저만 알아야 하다니.

아니, 로벤과 에쇼 그리고 일레온의 수하 세드릭도 아니 그나마 다행인가.


“잠깐. 잠깐 이거 풀고 얘기 좀 해요.”

그 와중에 세드릭이 줄로 꽁꽁 묶어 임시로 마차에 매달아 둔 카리나가 애달픈 모습으로 외쳤다.


“오해예요. 엘리시아가 물에 빠진 건 사고라고요. 제 탓이 아니에요.”

억울하다며 한참 울었던 탓인지 고운 얼굴이 꾀죄죄했다.

그러나 아무도 들은 척을 하지 않자 카리나가 분한 듯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이, 이거 풀어!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아? 미천한 것들이. 아악!”

발작하듯 성질을 부리는 카리나의 앞으로 세드릭이 다가갔다. 제 말에 반응하는 이를 보고는 카리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눈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제발 풀어줘요. 제가 뭘 했다고 이러시는 거예요? 증거도 없이 사람을 죄인 취급을 하다니.”

카리나가 애달프게 하소연하는 모습을 고요한 눈으로 보던 세드릭이 수하에게 일갈했다.


“시끄러우니 입을 막도록 해.”

“예. 대장.”

그 말에 카리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뭐라고? 야! 네가 그러고도 기사야? 기사도는 개뿔! 읍. 으읍.”

카리나의 입이 틀어막히는 걸 보며 이리스가 세드릭에게 물었다.


“이제 어째야 하죠?”

더 이상 추적이나 수색의 의미가 없었다.

성난 들소떼처럼 가파르고 험한 절벽 사이를 거칠게 쓸고 내려오는 협곡의 물살은 모든 것을 휩쓸어버린다.

사람 둘을 집어삼키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흘러내릴 뿐.

이리스의 말에 세드릭은 장갑을 벗고 손목께에 허공을 손끝으로 짚었다.

툭, 툭.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더듬어 보더니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와 공녀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정말요?”

이리스가 펄쩍 뛰려다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걸 어떻게 아실 수가 있어요? 확실한 건가요?”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만 그레로사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전하와 엘리시아님을 찾아보지 않고요?”

“전하께서 명령하신 대로 따를 뿐입니다. 우리는 그레로사로 가면 됩니다.”

“일레온님의 명령이라니요? 아, 저기 이보세요!”

세드릭은 불친절한 말을 남기고는 마차 행렬을 이끌기 위해 말을 타고 선두로 사라졌다. 답답한 마음에 무어라도 더 묻고 싶었던 이리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든 무사하다니.”

엘리시아를 잃어버린 건 한 번으로 족했다.

그레로사로 향한 길에 습격을 당해 그녀는 실종, 나머지 형제들은 죽어서 돌아오던 날을 생각하면 너무 끔찍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어야 한다고 백번, 천번 생각하지 않았던가.


“다행이지 뭐.”

게다가 일레온이 엘리시아와 함께 있다니 더더욱.


“다친 데가 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라르칸 산맥은 산세가 험한 곳이었다. 그곳의 가파른 경사와 비탈 사이를 깎으며 내려오는 급류는 물살이 거친데 이유가 있었다. 그 아래 물이 흐르는 아래가 온통 뾰족뾰족한 바윗덩이라 그곳에 부딪힌 물살이 더 심하게 튀어 올랐다.

그래서 사람이고 짐승이고 여기서 살아남지 못하는 거로 유명했다. 하류에 떠내려온 것을 보면 통째로 어딘가에 대고 갈아버린 것처럼 너덜거렸다.


“약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이리스는 챙겨온 약초들을 떠올리며 부지런히 마차로 향했다. 엘리시아가 돌아오기 전에 약이라도 미리 만들어둘 셈이었다.

***



“약 같은 거 필요가 없겠어요.”

일레온의 품에 안겨 있을 때면 따뜻한 물에 잠긴 것처럼 온몸이 쳐졌다.

이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닌데.

어디선가 동굴 안을 지나는 실바람에 실린 냉기가 달아오른 뺨을 식혀주어 기분 좋게 느껴질 정도로 다친 몸이 가뿐해졌다.

그런데도 몸을 떼려니 아쉬워서 조금만 더 – 하면서 기대어 있자 일레온이 그런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부드럽게 등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약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애초에 다칠 만한 일이 없어야지.”

“그만해요. 협곡에 빠지고 싶어서 빠진 것도 아니잖아요.”

엘리시아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일레온은 얄밉다는 듯이 내밀어진 것을 살짝 깨물었다. 엘리시아가 아프다며 엄살을 피자 자그마한 몸을 더 꼭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한숨을 쏟았다.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그의 목소리가 한순간 냉정해졌다.


“그 여자. 널 밀었어.”

“……알아요.”

엘리시아를 물에 빠지게 한 것 자체는 실수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녀가 도움을 요청하며 뻗은 손을 무시하고 조소했다.


「넌 언제 물어보고 내 것을 뺏었어?」

 
게다가 그 말이 무어란 말인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카리나를 떠올리자 엘리시아는 몸서리가 쳐졌다.


“돌아가면 그 여자부터 처리해야겠지.”

카리나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엘리시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가 예언서대로 살지 않으려고요.」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카리나에게서 빛이 난다고 느꼈었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손에 죽지도, 대공께 마음을 드리지도 않을 거예요. 저는 저대로. 제힘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원작에 적힌 것에 저항하겠다는 말에 동지애를 느꼈다. 차마 카리나에게 당신 너무 대단하다고 말하기는 쑥쓰러워서 일레온을 붙잡고 카리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멋진 사람이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가 괜한 질투를 사지 않았던가.

그녀가 했던 모든 말들이 전부 거짓이었던 걸까?

자신의 것을 빼앗았다고 말한 걸 보면 대공저에 찾아왔을 때 소나텍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 것과 달리 지금 예언서에 적힌 게 원작이라고 여기는 거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건 심리전이야. 소나텍은 그레로사로 오라고 당신 어머니를 협박했지. 분명히 엘리시아를 그레로사로 보내라고 말했으니 말이야.”

일레온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하듄샤가 무너지고 이리스와 로벤이 수장고의 예언서가 없어졌다고 했을 때 자연스럽게 소나텍이 그것을 그레로사로 가져갔을 거라고 생각해버렸어.”

“맞아요.”

“하지만 이건 함정이었나 보군. 애초에 목적은 그대를 해치는 데 있었던 것 같아.”

엘리시아는 순식간에 팔에 소름이 돋았지만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레로사에는 예언서가 없을 수도 있겠어요.”

“아니. 예언서는 지금 그레로사에 있을 거야.”

“어째서요?”

일레온이 잘 안다는 전술이란 이렇게 복잡한 거였을까? 엘리시아는 어리둥절한 마음에 되물었다.


“나를 없앨 생각으로 판 함정이라면 굳이 하듄샤에서 예언서를 빼내지 않았어도 됐잖아요.”

“아니지. 수장고가 비어있는 걸 확인했잖아. 그쯤 되지 않으면 우리가 움직이게 할 수 없었겠지. 그러면 어쨌든 빼낸 예언서를 어딘가로 가져가야 할 테고.”

“그레로사에 있는 게 아니면 어쩌죠?”

일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 성격을 보면 불안해서 밤마다 품에 안고 자야 할걸. 그리고 그는 모든 상황에 자신이 직접적으로 끼어 있어. 일을 벌여놓았으니 그레로사에 와있을 거고, 소나텍이 그레로사에 있다면 예언서도 그레로사에 있을 수밖에 없어.”

“그렇군요.”

엘리시아는 대충 이해했다.


“그런데 이제 어떡해요? 우리는 조난을 당했는데.”

이름 모를 동굴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목적지에 맞게 도착했어.”

“네?”

일레온이 힘주어 말했다.


“여기가 그레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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