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 옷 같지 않은 옷 (114/151)


114. 옷 같지 않은 옷
2023.02.04.



 


“이, 이게 뭐죠?”

그레로사는 일레온의 말대로 지하도시였다. 작지 않은 원형의 광장의 옆으로 암반을 파서 만든 듯한 층층의 공간이 보였다.


“말도 안 돼.”

대신관 알레한드로가 그레로사로 이동하라 했을 때, 하듄샤가 무너지는 악재로 신관들이 대거 이주해왔으니 우울한 분위기의 대피소 같은 곳일 거라 상상했다.

엘리시아의 예상과는 달리 안은 활기가 흘러넘쳤다. 많은 인파가 광장과 주변을 둘러싼 마켓 플레이스를 바쁘게 드나들었다.


“저 차림새는 뭐죠?”

“그걸 나한테 묻나?”

흰 신관복을 그대로 입고 있는 이들이 있는 반면 긴 소매와 짧은 소매, 과감하게 팔다리를 드러낸 짧은 바지나 몸매를 드러내는 짧은 치마 등 알록달록한 온갖 해괴한 차림새의 이들이 주변을 지났다.

짧은 초에 반구형 유리를 덮은 작은 불이 이곳 저곳 촘촘히 깔려 땅 아래 별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가게마다 간판을 내걸고 옷이나 먹을 것 등등을 팔고 있는데 그런 상점이 블록을 쌓듯 층으로 이루어진 곳마다 빼곡했다.

높낮이가 제각각인 지하도시의 가장 높은 곳은 7, 8층이나 되었는데 그 꼭대기 까마득한 천장 위로 둥그런 구멍이 뚫려 있고 미미해서 의미 없는 햇빛이 보였다.


“허둥대지 마. 괜히 시선 끌어 좋을 것이 없으니.”

일레온은 건물과 건물 사이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재빠른 손놀림으로 붕대를 감아 눈과 얼굴을 살짝 가렸다.


“그건 또 언제 챙겼어요?”

“아까 저장고에서. 거긴 없는 게 없더군.”

“그냥 후드를 눌러쓰기만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전에 날 속일 때 썼던 렌즈도 있었잖아요?”

붉은 눈동자만 가려도 오데르라고 주목받을 일은 없을 텐데 일레온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이런 식으로 번거롭게 붕대를 감는 게 안쓰러웠다.


“내 미모가 눈 색만으로 감춰질 게 아니어서. 그리고 렌즈는 의외로 번거로워.”

스스로 ‘미모’라 칭하다니. 그렇지만 그건 그것대로 맞는 말이었다. 이 세계의 가장 특별한 존재로 신의 편애를 받는 우월한 인간의 아우라가 단순히 붉은 눈동자 때문만은 아니었으니. 엘리시아가 머쓱해하자 일레온이 앞이 보이게 붕대를 조절하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돈해주었다.


“싸울 때는 그 유리알 때문에 눈을 다칠 수가 있어서 위험하거든.”

“그렇군요.”

예전에 그가 다시 눈이 멀었다고 거짓말할 때 썼던 렌즈가 지금 있다면 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몰랐던 사실이었다. 엘리시아는 일레온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레온. 나 뭔가 알 것 같아요.”

“뭘?”

“당신이 붕대 감는 동안 생각해봤는데. 엄마가 말씀해주셨던 백화점이나 아울렛이란 곳이 여기랑 비슷한 것 같아요.”

하듄샤에서 가짜 빙의자, 가짜 신관 노릇을 하려 할 때 아주 어릴 때에는 그저 말수 없는 아이를 자처했기에 시간을 벌었지만 커갈수록 마리엘라, 아니 원윤지가 떠나온 세계에 대한 공통 화제가 가장 큰 문제였다.


“엄마가 저와 이리스에게 그림도 그려주고 설명을 해주기도 했어요. 물건이나 음식을 파는 상점이 꽉 차 있는 건물이 있었다고요.”

한번 그렇게 생각의 물꼬가 트이자 하나, 둘 낯설기만 한 것들에 대해 정보로만 들었던 게 짝맞추기 퍼즐이라도 하듯 맞아들어갔다.


“저 이상한 옷들도 저쪽 세계의 옷들인 것 같고요.”

그레로사에 머물고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 신관들일 텐데, 흰 신관복을 입은 사람보다 자유롭게 입은 사람이 훨씬 많았다.


“여기는 들쭉날쭉한 층을 이루고 있어.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둘러싼 곳이 시장이야. 그리고 그 뒤로 골목을 지나 뒤로 물러난 곳에 신전이 있고 나머지 공간들은 신관들이 쉴 수 있게 방을 배정하는 것 같더군.”

엘리시아는 멍하니 낯선 차림을 한 채 왁자하게 떠드는 인파를 바라보았다.


“정보를 얻기도 어려웠지만 내부는 복잡하고 까다로워. 아까 우리가 들어온 것 같은 환기구가 수십 개 협곡이 흐르는 절벽 쪽으로 내어져 있어.”

그런 동굴이 수십 개나 존재하다니.


“주거구역 같은 건 부족하면 새로 파서 만들었기 때문에 불규칙성이 커서 여기처럼 깔끔하지 않더군. 파악할 수 없는 곳이 많아. 아마 신전 안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물에 내가 먼저 빠져서 떠내려가고 있었잖아요. 그러고 보니 당신 날 어떻게 구한 거예요?”

새삼스레 묻자 일레온이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가에서 미소를 거두었다.


“물이 흐르는 속도는 일정하니까 같이 떠내려간다면 내가 널 잡을 수는 없겠지. 그 여자가 밀었을 때 나도 거의 바로 뛰어들긴 했지만.”

“난 이미 떠내려갔을 거 아니에요?”

급류의 세찬 물살을 떠올리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신탁을 받을 때 같은 빛무리가 그대를 감싸고 있더군.”

“뭐라고요?”

엘리시아는 어렴풋이 강제로 신탁이 개방되려 할 것처럼 고막이 터질 듯한 압박을 느꼈던 걸 떠올렸다.


“머리 위에 돌던 것 같은 빛이 물 위로 떠 있었어. 내가 가까이 가자 점점 흐려졌고.”

떨어지는 엘리시아를 급류에서 구르면서도 무사히 낚아챈 일레온은 재빨리 환기구를 찾다 가장 낮고 가까운 곳을 노려 물을 벗어났다고 했다.


“지금도 뭐라고 하려는 것 같긴 한데.”

엘리시아는 답답한 듯 귀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탁탁 쳤다.


“신탁을 왜 닫는 거지? 주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전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게 아닌가?”

국교에 대해서 상식적인 선에서밖에 알지 못하는 일레온이 물었다.


“음. 잔소리가 많아요.”

“신들께서?”

신의 후손이 의아한 소리를 냈다.


“신탁이란 게. 후. 사실 그렇게 거룩하고 영험한 얘기만 하는 게 아니어서요.”

마리엘라의 고통을 구원해주지 못하는 쓸데없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원래 세계의 이야기 같은 건 들으면 조금 상상에 도움이 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신의 뜻이라고 신도들에게 전할 수도 없을 만한 내용이 많았다.

그것에 대해 누구에게도 밝혀서는 안 되었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건국 신화가 받치고 있는 콘스탄스 제국이 평온할 수 있는 건, 살아 있는 신의 핏줄 오데르가 존재하고 그로 인해 황권을 노리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콘스탄스 제국은 황제의 권위와 신성이 확고한 나라였다.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와 대적해서 황관을 뺏으려는 자가 감히 어디 있을까? 신벌이 두려워서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 존엄을 해치지 않게 다섯 주신의 주접을 엘리시아는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다. 하듄샤의 빙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교육받는 것이 이 세계의 규율을 준수하고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거였다. 그들의 방심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유일한 방법인 엔딩을 훼손할 수도 있다고.


“다른 신관들은 아예 신탁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많다 하지 않나?”

“네.”

로벤과 에쇼만 해도 한 번에 한 명의 신과 대화를 할 뿐이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신탁을 열면 모든 신들이 하는 말이 한꺼번에 들려서 힘들었다.


“지금은 무어라 하시지?”

“신탁을 열면 너무 눈에 띌 텐데.”

“이쪽으로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어. 저 시장이 열리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듯하니.”

망설이던 엘리시아가 신탁을 열었다. 실은 아까부터 귀를 뜨거운 무언가로 누르는 듯 압박이 느껴서 조금 괴로웠기에 신의 목소리를 듣자니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엘리시아의 머리 위로 다섯 개의 별이 떠오른 걸 보며 일레온이 물었다.


“주신들께서 무어라 하시지?”

“그게…….”

“내게 무엇을 감춰야 할 이유가 없잖아. 이미 가장 큰 비밀도 알아버렸으니.”

그는 엘리시아가 신탁을 전해주지 않을까 봐 조바심이 나는 듯 보였다.


“우리. 너무 촌스럽다고 옷 좀 갈아입으래요.”

“뭐?”

엘리시아의 눈이 으슥하고 좁은 골목 건너편의 옷가게로 향했다.

***

잠시 후, 엘리시아와 일레온은 옷가게에 들어섰다. 가게 안은 광장 쪽에서 보였던 것보다 넓었다. 각양각색 옷들이 나무로 만든 봉에 줄줄이 걸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활짝 웃는 가게 주인은 중년의 남자인데 검은 가죽으로 만든 상의에 희한한 꽃무늬 바지를 입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이질감이 너무 커서 엘리시아는 ‘엄마가 말씀하셨던 외계인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히 입어보고 고르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 듯 주인은 가게 뒤편으로 이어지는 문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진짜 입어봐도 되는 걸까요?”

손바닥만 한 천에 가느다란 끈이 주렁주렁 달린, 어떻게 입어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 무언가를 집어 든 엘리시아가 중얼거렸다.


“탈의실이 있는 걸 보니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광장을 질러 이 가게로 들어오면서 느낀 건데 신관복을 입은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거로 보였다. 아까는 제각각의 복장이라고 여겼지만, 그레로사 국룰이라도 있는 건지 자유복을 입은 사람이 많아서 흰 신관복을 입은 채 둘이 걸으니 오히려 눈에 띄었다.


“그런데 뭘 입어야 하지?”

“으음.”

유심히 가게 밖을 지나는 이들을 살펴보던 엘리시아가 일레온에게 상의와 바지를 골라 건네었다.


“이거. 이거 입어봐요.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이 많은 거 같아요.”

“장사치가 입을 것 같이 고상하지 못한 옷이군.”

“그래도 모양은 당신이 입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넥타이가 경매장의 경매사나 맬 것처럼 요란해.”

“나는 뭘 입을까요?”

엘리시아가 다리를 훤히 드러낼 것 같은 짧은 치마가 걸린 쪽으로 향하자 일레온이 눈을 찌푸렸다.


“이게 좋겠어.”

“진심이에요?”

일레온이 제게 건네는 옷 같지 않은 옷을 보며 엘리시아가 반문했다.


“그래. 나도 그대가 골라준 것을 입을 게 아닌가. 그러니 그대도 내가 골라준 것을 입어야 공평하지.”

듣고 보니 그랬다. 게다가 뭐 가게 주인이 편하게 입어보고 고르라고 말했으니 별로면 다른 걸 입어보면 되겠지.

엘리시아와 일레온은 각자 옷을 들고 탈의실에 들어갔다.


“일레온이 나한테 왜 이런 걸 골라줬지?”

요상한 옷을 몸에 걸치고 겨드랑이 아래 세로로 쭉 늘어선 단추를 채우며 엘리시아는 생각했다.


“이런 걸 입고 밖에 어떻게 다니지? 신관복보다 더 눈에 띌 것 같은데.”

“다 갈아입었나?”

“네.”

탈의실 커튼 밖에서 일레온의 목소리가 들려 대답하자, 그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손님도 우리 말곤 없는데 뭐.”

탈의실 안은 두 사람이 들어가도 충분할 정도로 넓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일레온에게 있었다.


“이, 일레온.”

“왜?”

거추장스러운 붕대를 풀며 일레온이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내렸다.


“당신. 너무 잘 어울려요.”

 

 
어두운 남색에 베이지 톤으로 재킷 카라가 둘러져 있고 요란한 원색의 넥타이를 맨 일레온을 보자 또 엄마가 알려줬던 것이 떠올랐다.


“일레온. 이 옷은 교복이에요.”

“교복?”

“원래 저쪽 세계에서는 아카데미에 갈 때 입는 옷이 있다고 했거든요.”

어째서 지금 밖에 이 차림을 고른 사람이 많은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데 난 왜 이런 걸 골라줬어요?”

엘리시아는 한 통으로 된 전신복을 입었는데 몽글몽글한 감촉의 천으로 손과 발까지 감싸게 되어 있었다. 거울에 비춰보니 엉덩이에는 작은 꼬리까지 달려 있었다.

그 옷의 후드를 머리에 덮어주며 일레온이 웃었다.


“귀엽잖아.”

후드에는 긴 귀가 달려서 한눈에 토끼를 모티브로 만든 옷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움직이기 불편할 거 같은데. 다른 옷 입어볼래요.”

엘리시아가 막 불만을 표할 때였다.


“손님. 손님?”

밖에서 주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일레온과 엘리시아는 탈의실에서 후다닥 빠져나갔다.


“어휴. 두 분 다 인물이 좋으셔서 아주 잘 어울리시네.”

당황해서 일레온을 쳐다보자 그는 가게 안에 놓인 선글라스를 잽싸게 쓴 상태였다. 하여튼 요령이 좋다니까. 엘리시아는 혀를 내둘렀다.


“얼마인가?”

일레온이 호기롭게 묻자 주인이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네. 두 분 합해서 십이만팔천 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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