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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신은 그녀를 버렸다 (115/151)


115. 신은 그녀를 버렸다
2023.02.08.



“네. 두 분 합해서 십이만팔천 원입니다.”

일레온과 엘리시아는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원이라니?’

‘엄마가 말했던 저쪽 세계의 돈 단위이긴 한데. 돈이 없는데.’

그런 그들을 영업용 미소를 띤 채 보던 가게 주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하. 그레로사에 처음 오셨나 보지요?”

“네에.”

엘리시아가 대답하자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가게 주인이 호탕하게 말했다.


“그레로사의 옷가게는 모두 렌탈이랍니다.”

“렌……탈이요?”

“깨끗하게 입고 그레로사에서 나가실 때 신관복으로 다시 갈아입으시면 반납만 하시면 됩니다.”

“아. 그, 그렇군요.”

“가끔 이렇게 장난을 치면 처음 오신 분들이 꼭 걸리신다니까. 하하하. 위에서 내려오기 전에 설명을 듣고 오시는데도 어쩜 속으십니까.”

“하하하. 그러게요.”

카리나에 의해 뒷문으로 입장한 셈인 엘리시아는 등 뒤로 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옷가게 밖으로 나오자 그 말대로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게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돈을 치르지는 않는 거로 보였다.

길에서 풍선이나 과자를 파는 노점도, 음식을 먹고 나오는 식당들에서도 값을 치르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제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신관들의 안식처.

오래 봉사한 이들이 안식년을 맞아 쉬러 가는 쉼터, 그레로사.

그곳은 원래 세계를 그리워한 빙의자들이 만든 그들만의 놀이터였다.


“그레로사가 이런 곳이었다니.”

어린 시절 하듄샤에서 긴 수련 생활을 하던 때에 그레로사에 다녀온 신관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그레로사는 정말 좋은 곳이야.」

「하듄샤로 다시 돌아오기가 싫을 정도라니까.」

「그렇게 좋았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어린 엘리시아를 보며 알 것 아는 어른 신관들이 귀여워하며 말했다.


「엘리시아. 얼른 커서 성년이 되면 꼭 같이 가자.」

「우리 윤지도 치맥 콜?」

 
그랬었는데 여기저기 음식점마다 커다란 글씨로 ‘치맥’이라고 붙은 걸 보니까 그들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치맥’이란 글씨를 붙인 가게마다 위장이 요동치는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일레온.”

일레온을 불렀을 때 그는 길을 지나던 이에게 붙잡혀 있었다.


“자네. 눈은 다친 건가?”

“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이런. 안타깝구만. 내가 원래 세계에 있을 때만 해도 잘나가는 기획사 피디였는데. 자네는 빙의 전에도 이렇게 끝내주는 외모였나?”

일레온을 전생에 만났으면 글로벌 톱스타로 만들어줬을 거라며 남자가 애석해했다. 그는 전신 토끼탈에 다시 붕대를 감을 때 일레온이 벗은 선글라스까지 씌워준 바람에 기괴한 차림이 된 엘리시아를 보고 흠칫하더니 물러갔다.


“노에리 형제. 우리 저거 먹어요.”

털북숭이 인형탈의 손가락이 한 곳을 가리켰다.


“치맥 먹고 싶어.”

선글라스 너머로 간절하게 저를 올려다본 토끼와 눈이 마주치자 일레온은 심장께에 손을 가져갔다.


‘귀엽잖아?’

짧은 팔에 짧은 바지, 짧은 치마.

노출이 너무 심한 것 같아서 엘리시아에게 저런 자그마한 천 쪼가리를 입힐 수 없다고 생각한 것뿐인데.

일레온은 자신의 선택이 뿌듯했다.


“그래. 가자.”

예언서에 대한 생각을 뒷전으로 밀며 일레온은 엘리시아의 손을 잡았다.


 

***

늘 조용한 유테르 공작저가 오늘따라 평소와 달리 소란했다.

제국 황제의 유일한 형제, 레브 황녀가 몸소 공작저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공작가의 주방장도 솜씨가 제법이야.”

작게 만들어진 초콜릿을 한입에 밀어 넣은 레브의 말에 마리엘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주방장이 크게 기뻐하겠어요.”

“그대도 좀 들지 그래?”

레브의 권유에도 마리엘라는 눈에 띄게 핼쑥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도저히 뭘 먹을 기분이 들지 않아서요.”

“뭘 그리 걱정하지? 이제 그 애들을 해칠 수 있을 만한 건 적어도 이 세계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나?”

세계관의 강제력도 주인공인 일레온과 오데르 설정을 건드리지 못한다.

엘리시아가 원작을 거슬러 살아남는 바람에 소멸할 뻔했지만 이제는 오데르의 반려가 되는 바람에 설정 충돌의 틈새를 비집고 살아남았다.


“그레로사를 저도 가본 적이 없어서요. 마음이 놓이지가 않아요.”

전생에 원윤지였던 시절 제 손으로 쓴 소설이지만, 작가인 자신도 전부 다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계가 이곳이었다.

마리엘라의 이름으로 살면서, 엘리시아를 낳고 원작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어느 날 깨닿지 않았던가.

작가는 그 이야기의 창조자가 아니라는 걸.

어딘가에 떠도는 세상을 엿볼 수 있는 창을, 문을 달아주는 역할인 게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모른다는 건 예측 불가능한 너무나도 많은 변수를 만들어냈다.

매 순간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을 했는데도 딸을 잃을 뻔한 적도, 죽었다고 생각한 딸이 살아 돌아오기도 했다.

그것을 누구에게 말할 수도, 남편인 질리언 외에는 지지받을 수도 없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마리엘라를 도와주는 이들이 많아졌다.

정확히는 엘리시아를 살리기 위해 그녀의 뜻을 함께해주는 사람들.

그러면 혼자 짊어졌던 짐이 나누어진 것처럼 조금은 전보다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마리엘라는 점점 더 두려웠다.


“무엇을 더 알려줬어야 했을까 아쉬운 생각만 들고요.”

전생에 살았던 세계에 대해서 잘 가르쳐주려 해도 살아온 것을 압축해서 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아무래도 제 설명과 교육이 부족했다는 생각만 드니 마리엘라는 괴로웠다.


“애를 써도 안 되는 일이 있어.”

레브는 우아한 모습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안될 때는 놓을 줄도 알아야 해.”

“다른 일이면 몰라도 엘리시아를 제가 어떻게 그래요?”

딸의 목숨이 걸린 일에서 마리엘라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엘리시아든, 자신이든 누군가 죽어야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죽더라도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가 오른 신좌라는 게 사후 세계에 존재하고 여태 신탁으로 간섭하는 곳이니 말이다.

만약에 엘리시아가 잘못되면 마리엘라는 자신이 죽어서도 어딘가에 떠돌며 영원히 고통받을 거라고 믿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억겁의 세월과 세계관들의 틈바구니에서 말이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잖아. 딸을 위해서.”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눈가가 시큰했다.


“가장 좋은 선택을 했지. 내 아들을 믿기로.”

“전하.”

“그러니 마음을 놓아보라는 거야. 일레온도, 엘리시아도 분명히 잘해낼 테니.”

“아…….”

불안한 마음이 누르고 있던 눈물이 마리엘라의 흰 뺨을 타고 흘렀다. 레브는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네었다.


“감사합니다.”

“그 애들은 잘 지내고 있을 테니 염려 말아. 엘리시아가 돌아와서 지금 자네 몰골을 보면 뭐라 하겠나? 차와 간식은 됐고 가볍게 식사라도 함께하도록 해.”

상석에 앉은 레브가 제집인 듯 시종을 부르자 마리엘라가 눈물을 훔치는 잠깐 사이 식사를 준비하라는 명을 받고 사라졌다.


“그대는 걱정이 너무 많아.”

“그런가요?”

“다 큰 자식을 품에서 내보낼 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건 믿어주는 것뿐이야.”

“전하께서는 대공 전하가 걱정되시지 않나요?”

“전혀.”

레브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 애는 어디 던져놔도 거기서 가장 좋은 선택을 하고 가장 좋은 것을 누릴 아이야.”

은근히 일레온에 대해 자부심이 느껴지는 투에 마리엘라는 울다 웃었다.

강건한 오데르의 피에 녹아 있는 자신만만한 기운이 어쩌면 앞으로 태어나게 될 손주에게 섞일지도 몰랐다.

걱정과 근심이 많고 겁도 많은 저와 엘리시아를 생각하면 오데르의 담대함이 함께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의 말씀대로 연습을 해볼게요.”

“연습?”

“자식을 믿어주는 연습이요.”

마리엘라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디저트 스푼을 들자 레브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노력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지.”

그때였다.


“마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유테르 공작저에 드나드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유테르 공작인 질리언도 마리엘라도 사교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리언은 무도회에 가느니 새로 맞출 드레스 값으로 팔레르모에 전쟁 유적지 발굴하러 떠나는 쪽이 더 좋은 사람이었다. 마리엘라는 빙의자인 탓에 무도회가 불편해서 부부 둘 다 꺼려하다 보니 자연히 이번 대에 이르러서는 공작저에 방문하는 이가 드물었다.


“마님께서 초대하셨다고 편지를 가지고 오셨는데요.”

“누구시지?”

“해링턴 백작부인이십니다.”

“해링턴?”

레브가 반색했다.


“식사는 셋이 해야 할 것 같군.”

어머니들의 눈이 빛났다.

***

치킨과 맥주. 줄여서 치맥.

엘리시아는 여러모로 놀라는 중이었다.

우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짭조롬한 닭고기가 든 치킨이라는 요리가 너무 맛있고, 그다음은 평소 적게 먹고 입이 짧은 자신이 무려 튀긴 고기 요리를 계속 먹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 아니 노에리 형제. 이거 너무 맛있어요.”

식사량이 적은 편이 아닌 일레온은 이미 닭 두 마리를 해치운 후였다.


“정말 맛있군. 값을 치르지 않는 건 신전에서 모든 비용을 감당하고 있다는 뜻일 텐데.”

일레온이 장난스레 입술을 삐딱하게 올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그대의 얼굴 한번 보겠다고 하듄샤에 바친 금화가 이런 데에 쓰이나 보군. 내가 다 뿌듯할 정도의 맛이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해요?”

“누가 듣는다고 그래?”

그들이 앉은 테이블 사방에서 왁자지껄 고성이 오갔다.


“아아. 도대체 맥주를 밖에서는 왜 먹을 수 없는 거야?”

“제국의 냉장 기술이 안 따라주는 걸 어떻게 해? 그냥 안식년만 기다리는 거지 뭐.”

두 번째 놀람 포인트는 맥주라는 술이었는데 거품이 이는 데다 차갑고 톡톡 튀는 맛이 풍미가 대단했다. 이런 걸 왜 굳이 밖에서 소비하지 않고 감춰두듯 그레로사 안에서만 만들었을까 의문스러웠는데 궁금증이 바로 풀렸다.

술이 약한 엘리시아는 슬슬 더워서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아, 이걸 여태 쓰고 있었네?”

털옷을 입고 거기 달린 털 후드를 눌러쓰고 있으니 아무리 공기가 싸늘한 지하도시라지만 더운 게 당연하지.

엘리시아가 후드를 벗자 눈부신 금발이 밖으로 쏟아졌다.

그러자 가게 안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일제히 그녀를 보며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듄샤의 보석. 차기 대신관 후보인 데다 실종 사태로 몽타주까지 만들어 현상수배를 했던 엘리시아에 대해 아는 이들이 많았다. 엘리시아 그녀가 상대를 모를 뿐.


“혹시 엘리시아 님?”

엘리시아는 당혹한 눈으로 일레온을 보았다.


‘이래서 내게 이런 옷을 입힌 거였어?’

괴상한 옷이 재밌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쏟아지는 관심에 일레온의 입가가 한일자로 다물어지는 게 보였다.


“네. 맞아요.”

“아아. 엘리시아 님. 실종되셨다 하듄샤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엘리시아 님의 기도회에 꼭 가곤 했답니다.”

엘리시아가 어색하게 미소 지을 때였다.


“뭐? 우리 가게에 엘리시아 님이 오셨다고?”

안쪽에서 닭을 튀기던 가게 주인까지 달려 나올 정도로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니. 엘리시아 님은 어제 사고로 협곡에 빠지셔서 수색 중이라던데.”

“네? 그걸 어떻게…….”

당황한 엘리시아가 묻자 가게 주인이 앞치마 아래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어 내밀었다.


“신문에 실려 있었어요. 그래서 다음 대신관 후보인 분이 그레로사로 오다가 두 번이나 사고를 당하셨다고 오늘 내내 신전에 틀어박혀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오늘 여기 사람이 적은 거랍니다.”

이게 사람이 적은 거라고? 그보다 신문이라니?

엘리시아는 그가 건네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자극적인 제목이었다.

[비운의 엘리시아, 신은 그녀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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