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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운명이 정한 상대 (116/151)


116. 운명이 정한 상대
2023.02.11.



 
[비운의 엘리시아, 신은 그녀를 버렸다.]

자극적인 제목 아래에 적힌 기사로 저절로 눈이 향했다.

[어제 오전 10시경, 그레로사로 향하던 신관 엘리시아(하듄샤 소속)이 협곡으로 추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신관 엘리시아는 식수 보급을 돕기 위해 물주머니를 채우는 작업 도중 급류로 실족했다. 엘리시아를 구하러 물로 뛰어든 수련 신관 한 명이 함께 실종되었으며, 빠른 유속과 주변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수색의 의미가 없어 실종자 수색은 중단된 상태이다.]

옆에서 함께 기사를 들여다보던 일레온이 흠 하는 소리를 냈다.

[현장을 통솔하고 있는 신관 로벤에 의하면 목격자 진술에 따라 현장에 함께 있던 수련 신관 A양이 고의적으로 사고를 유발한 것으로 보고 현재 구금 중이며 하듄샤에 도착한 후 집중 조사할 예정이다.]
 


“로벤이 머리를 썼군. 내 자리도 자연스레 만들어 둔 것을 보니.”

하지만 다음 단락을 읽은 엘리시아의 얼굴에서 차차 표정이 사라졌다.

[신관 엘리시아는 팔 개월여 전에도 그레로사로 향하던 길에 행방불명 된 적이 있다. 당시 사건 현장에서 함께 그레로사로 향하던 신관들이 모두 사망한 사건은 아직도 범인을 추적 중에 있으며 누가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벌였는지 미궁에 빠져 있다.]

신문을 든 엘리시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 하듄샤 정보통으로 불리는 신관 에쇼는 논평을 거부하였다. 그레로사로 날아온 전서구로 급보를 들은 알레한드로 대신관은 일행이 그레로사에 도착하는 대로 관리국에서 조사할 예정이라 전해왔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편애를 받으며 차기 대신관 유력 후보로 떠올랐던 신관 엘리시아. 신은 그녀를 버린 걸까? 거듭되는 불행한 사건에 신전 측은 공식적인 논평을 거부했다. 이번에도 신관 엘리시아가 무사히 신들의 인도로 우리 곁에 돌아올 수 있을지 귀추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건 어디서 난 거지?”

일레온이 묻자 가게 주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레로사 처음인가?”

“그래. 이번에 처음 방문했지.”

전생의 나이와 빙의 후의 나이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탓에 본래 하듄샤에서는 대개 말을 놓았다. 그 탓인지 일레온이 묻는 말투에 가게 주인은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는 듯 했다.


“위에서 내려오지. 아, 마침 시간이 되었네.”

가게 주인이 손으로 가리키는 걸 보자 까마득하게 높은 동공의 천장에 뚫린 구멍 아래로 무언가 팔락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저 구멍은 관리국에 뚫려 있어서 이렇게 전할 소식이 있으면 신문이나 호외로 알려준다네.”

일레온이 붕대 아래로 여전히 굳은 입매를 한 채 떨어져 내린 종이 한 장을 기세 좋게 낚아채었다. 새로 내려온 신문에는 일행이 지상의 그레로사에 도착하였고 관리국에서 조사 후에 지하도시로 출발했다는 내용이었다.

막 신문에서 눈을 떼었을 때, 흰 신관복을 입은 이들 셋이 가게 입구로 들어섰다.


“엘리시아 님?”

“네?”

“오오. 엘리시아 님이 맞으시군요!”

조금은 낯이 익은 듯도 한 젊은 남자 신관 하나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저는 대신관님을 보좌하고 있습니다. 전에 하듄샤에서도 엘리시아 님을 알레한드로 님께 모시고 갔었어요.”

“기억이 나는 것 같네요.”

그래서 낯이 익었나? 엘리시아가 알아보는 듯하자 그는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정말 엘리시아 님이 맞다니. 다섯 주신께서 도우셨습니다.”

감격한 듯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엘리시아 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이야기가 신전에 전해졌어요. 대신관님께서 확인해보고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엘리시아는 차분한 자세로 일어섰다. 몽글몽글한 소재의 전신 토끼털옷을 입었는데도 표정 없는 얼굴에 고아한 움직임 탓에 보통 사람과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토끼털옷도 희어서 그런 그녀가 걸치고 있자니 신관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가서 뵙겠습니다.”

“네. 따라오십시오.”

그런 엘리시아를 보며 일레온은 속으로 치미는 울컥한 것을 눌렀다.


‘왜 이러지?’

정의하기 어려웠지만 기분이 몹시 나쁘다는 건 확실했다.

갑작스레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일레온에게 가게 주인이 황급히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이게 뭐지?”

“쿠폰 가져가야지. 10장 모으면 서비스 메뉴를 준다네.”

“고맙군.”

일단 받은 것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일레온은 서둘러 가게 밖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가게 주인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눈이 보이나?”

다친 것처럼 붕대를 칭칭 감아놓고는 움직이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거참. 신기하네.”

혼잣말을 하던 치킨집 주인이 피식 웃었다.


“신기하긴. 내가 책 속에 들어와 있는게 더 신기하지.”

빙의자의 모임에서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은 없었다.

그는 손을 털며 가게 안으로 발을 돌렸다.

***

일레온과 엘리시아는 대신관이 보낸 인도자의 뒤를 따랐다.

둥근 광장을 둘러싼 상점가를 지나자, 환기구에서 광장 쪽을 향할 때 지나왔던 것처럼 골목을 통해 그 뒤에 위치해 있다는 신전으로 갈 수 있었다.

신전의 앞쪽에도 꽤 큰 동공이 있었다. 그곳에서 신전까지 꽤 높은 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장소처럼 보였다.


“힘드시지요?”

계단을 오를 때 신관이 엘리시아에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엘리시아가 대답하자 이번에는 일레온을 보았다.


“형제님께서는 눈이 불편하신 듯한데 도와드리는 게…….”

“괜찮소. 두 다리의 감각이 멀쩡하니.”

“네에.”

섣불리 사고에 대해서 말하기도 그렇고 하여 출발할 때 즈음 날씨 얘기처럼 그레로사로 이주한 신관들에 대해 이야기 한 것 외에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계단에서 말 한마디를 끝으로 그들은 입을 다물고 안내를 따라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세상에.”

입구를 들어선 엘리시아가 조금 놀란 소리를 냈다.


“놀라셨지요? 엘리시아 님께서도 그레로사에 처음 와보시는 것이니.”

신관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레로사의 지하신전은 하듄사의 신전과 거의 똑같게 만들어져있었다. 흔들리는 거대한 석축 건물 탓에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이들로 소란하고 어수선했던 마지막 기억 위로 데자뷔처럼 지하신전이 덧씌워졌다.


“여기부터 혼자 대신관님을 찾아가라고 하셔도 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주요 시설의 위치가 하듄샤와 같거든요. 그래서 안식년을 온 이가 있다면 처음 오더라도 제집처럼 활보하고 다닌답니다.”

안내가 필요치 않은 익숙한 구조 탓에 신전 안에서의 이동은 빨랐다.


“대신관 님. 엘리시아 님을 모셔왔습니다.”

“그래. 수고했군.”

문을 열자 앉아있던 알레한드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들어오고 자네들은 이만 물러가게.”

“예. 대신관님.”

방 안에는 엘리시아와 일레온이 올 것을 미리 준비했는지 딱 세 사람이 앉을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차 한 잔 들겠나.”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자 알레한드로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뜨거운 주전자를 기울여 손수 차를 만들었다.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다친 곳은 없나?”

“네. 다행히 다섯 주신과 오데르의 안배로 무사합니다.”

엘리시아가 대답하자 찻잔을 두 사람 앞으로 내어주며 알레한드로가 말했다.


“대공께서는 언제까지 그런 걸 두르고 계실 생각이지?”

일레온을 알아보고 하는 말에 엘리시아는 깜짝 놀랐다.


“보는 자가 없으니 번거롭게 그런 걸 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알레한드로의 말에 일레온은 눈과 얼굴을 감추고 있던 붕대를 풀어냈다.


“처음 보는군. 일레온 클레벤트 대공이다.”

“신전의 수장을 맡고 있는 알레한드로라 하오.”

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탓에 존대와 경어가 빠진 말이 낯선 일레온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내게 존대하지 않는군.”

“남자주인공이 별거라고 굳이 존대해야 하나? 비록 이 세계에 와 있지만 우리와 당신들은 섞일 수 없는 다른 존재지.”

묘하게 적대적인 태도에 일레온이 의아할 때였다.

알레한드로가 엘리시아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급류에 떨어지는 사고가 났다는 보고를 들었지. 협곡에 맨몸으로 빠지고도 살아 돌아올 거란 생각을 하지는 않았는데.”

“대공 전하께서 구해주셨어요.”

“대공이?”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데르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한다더니. 그렇군.”

“어째서 그런 태도이지?”

“태도?”

일레온이 지적하자 알레한드로가 그에게 눈을 돌렸다.


“그래. 자네는 대신관이지. 차기 대신관 후보이기까지 했던 엘리시아가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겨 살아 돌아왔어. 그런데 별로 기뻐하는 것 같지 않군.”

“아. 그렇게 보였나?”

알레한드로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오데르라. 대공은 나를 처음 본 거로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닐세. 대공을 볼 일이 심심찮게 자주 있었지. 우리들의 주인공이니 말이야.”

예언서가 언급되자 일레온은 입을 다물었다. 그에 대해서라면 일레온은 할 말이 없었다. 제 삶의 이야기가 책 한 권에 담겨 있다던 다른 세계를 직접 가본 것도 아니고, 그가 원해서 이렇게 태어난 것도, 책의 주인공으로 묘사된 것도 아니었으니.

그러나 지금 알레한드로가 일반적인 감정 표현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이었고, 마땅히 안도하고 다행스러워해야 할 엘리시아의 안위에 기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레온의 예민한 감으로는 그 점이 무척 거슬렸다.

무엇 때문에 신전으로 바로 가지 않고 일부러 시장이나 상점가를 잠입하듯 어슬렁거렸던가. 소나텍이 예언서를 건드렸고 그들을 그레로사로 불렀다면, 신전 내부나 어딘가에 손을 써두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다급한 마음에 중앙에 도움을 요청하는 건 하책이었다. 이미 그곳을 적이 장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후방에서 상황과 분위기를 보며 접근하려 하였는데, 그가 놓친 점은 엘리시아의 존재가 신전 내부에서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 그것만으로 이렇게 바로 들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붕대를 엘리시아의 얼굴에 감았어야 했어.’

그런 후회가 들 정도였다.

복잡한 속내를 감추는 일레온을 보며 알레한드로가 여상하게 말했다.


“지금 대공의 상태는 우리가 바라는 전개가 아니지 않나. 엘리시아를 따라 이곳에 왔으니. 우리야말로 대공이 무슨 생각인지 묻고 싶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이쯤 되면 대공도 알 건 알지 않나. 저 모녀가 금기를 어기고 자네에게 예언서의 존재와 내용을 발설했을 테니 말일세.”

“알아듣게 설명해.”

일레온의 말에 알레한드로가 피식 실없게 웃었다.


“지금 대공의 운명이 정한 상대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지?”

“내 운명의 상대라니?”

“카리나 드레페인 말일세.”

일레온이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녀는 엘리시아를 죽이려 했어. 협곡으로 엘리시아를 미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보았지.”

“그게 무슨 상관이지? 대공께서 마땅히 사랑하고 편들어야 할 여인은 카리나가 아닌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 예언서가 소나텍에 의해 수정된 가짜라는 걸 대신관이면 알 것 아닌가?”

그 말에 알레한드로가 불쾌감을 드러냈다.


“예언서는 가짜가 아니다. 대공이야말로 저 허황한 거짓말쟁이 모녀에게 속고 있는 걸 여태 몰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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