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카리나를 사랑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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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카리나를 사랑할 일
2023.02.15.
“예언서는 가짜가 아니다. 대공이야말로 저 허황한 거짓말쟁이 모녀에게 속고 있는 걸 여태 몰랐군.”
“……뭐?”
일레온이 저도 모르게 되묻자 알레한드로가 조소했다.
“예언서는 수정된 적이 없어. 처음부터 정해진 전개였다. 하지만 마리엘라가 죽을 예정인 딸의 운명을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신관 님. 지금 그 말은 마치 제가…….”
더듬거리며 묻는 엘리시아를 보는 알레한드로의 눈빛에는 온기가 없었다.
“그럼 내가 원윤지의 딸이 빙의자인 척 하는 데에 속을 것 같았나?”
엘리시아의 눈이 커졌다.
“처음엔 마리엘라도 빙의자 커뮤니티에 속해 있었지. 이 세계의 전개를 파괴하지 않고 적응해서 잘 지낼 수 있다면 하듄샤에 들어올 것을 강제하지 않아.”
알레한드로는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저 좋을 대로 잘 살 수 있다고 하다가 예언서가 잘못되었다고 보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여자는 어찌해야 하지?”
“그러니까 그쪽 주장은 예언서가 수정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 내용이다 - 이 뜻인가? 내 미래에 함께하게 될 사람이 엘리시아가 아니라 카리나가 맞다고?”
“오데르는 명민해서 좋군. 이해가 빠르니.”
“나는 카리나를 사랑하지 않아.”
일레온이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사랑하게 될 것 같지 않고.”
엘리시아를 미는 여자의 얼굴에는 희열이 떠올라 있었다. 등 뒤에 선 자신을 돌아보고 나서야 불어 끈 듯 변하던 진심 어린 카리나의 표정. 그녀를 친구라 믿었을 엘리시아를 사지로 몰아넣고 해냈다는 만족감에 젖어있던 얼굴을 어떻게 잊을까?
죽었다 깨어나도 카리나를 사랑할 일은 없을 거라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면 예언서가 잘못된 게 아닌가. 나는 엘리시아를 사랑해. 처음부터 알 수 있었어. 눈이 보이지 않아도 내가 선택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강제력이 엘리시아를 태우는 걸 봤을 텐데.”
엘리시아와 일레온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강제력의 검은 불꽃. 그거야말로 예언서가 옳다는 증거이지. 이 세계가 죽을 때를 놓친 엘리시아를 거부해. 그녀를 없애려 하지.”
무감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알레한드로의 말을 듣고 있던 엘리시아의 눈에 습기가 돌았다.
“마리엘라가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았지. 하지만 대외적으로 우리가 정하고 우리를 뭉치게 하는 규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해. 그 가운데에서 애를 쓰는 내가 있지. 엘리시아를 하듄샤에 받아들인 건 마리엘라가 벌이는 일이 공론화 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공론화라니?”
일레온이 묻자 알레한드로가 코웃음 쳤다.
“지금 이 밖에는 하듄샤가 무너져 오갈 데 없는 빙의자들이 모여 있지. 그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어떨 것 같나?”
엘리시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들은 대공이 카리나와 함께 몇 가지 에피소드를 끝으로 황위에 오르고 결혼식을 올리는 걸로 끝나는 엔딩을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대공이 엘리시아를 사랑한다? 카리나와 맺어지는 미래는 오지 않을 거라 한다면 원래 세계로 귀환할 희망이 사라질 텐데.”
싸늘한 시선이 엘리시아를 향했다.
“자연히 원망도 분노도 엘리시아를 향하지 않겠나? 어디 엘리시아 자네 생각이 궁금하군. 저 좋을 대로 이 세계의 규칙도, 모두가 정한 규범도 무시하는 미친 여자를 어미로 둔 심정을 말이지.”
“저, 저는…….”
“자네는 진작 고인이 돼야 했어. 딸 가진 어미가 받아들이기에는 끔찍한 운명이었지. 그래서 그레로사로 향할 때 사고를 당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
“뭐……라고요?”
알레한드로는 충격받은 그녀의 상태를 개의치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그렇지 않나? 자네가 살아 있어서 마리엘라가 헛된 희망을 품기보다는 원작과는 조금 다른 죽음이지만 시작되기 전에, 자네가 대공과 만나지 못해 연결점이 없는 상태로 죽음을 맞는 것도 개연성 측면에서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테니.”
엘리시아의 커다란 눈동자에 가느스름하게 눈물이 고여 들었다.
그 꼴을 보자니 일레온은 속에서 이성이 끊겼다.
참지 못한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람을 우습게 보는군.”
일레온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영혼까지 털어 존재를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더욱 기분이 더러운 건 함께 유린당한 엘리시아가 반박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어깨를 움츠린 채 떨기만 할 뿐이라는 거였다.
“일어나.”
“……일레온.”
“일어나라고!”
일레온이 엘리시아의 팔을 잡고 일으키려 할 때였다.
“예언서를 옮긴 건 나일세.”
“뭐라고요?”
일순 멍하니 움츠러들던 엘리시아가 그를 보았다. 알레한드로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치듯 노려보았다.
“소나텍? 그래. 마리엘라는 그런 존재가 있다고 했지. 예언서를 고쳐 이 세계를 마음대로 바꾸려는 이가 존재한다고 말이지.”
알레한드로가 일레온에게 물었다.
“소나텍을 본 적이 있나?”
없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일레온을 보며 알레한드로가 비웃었다.
“없겠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 어떻게 보겠나.”
“소나텍은 있어요. 어, 엄마를 괴롭게 하고…….”
“마리엘라의 일방적인 주장이지. 그 여자는 미쳤거든.”
“수장고에서 예언서를 빼내셨다고요? 하듄샤가 그것 때문에 무너지게 됐는데.”
“그래. 그 또한 자네 때문이지.”
알레한드로가 찻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자 테이블 위로 찻물이 튀었다.
“내가 하듄샤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를 것 같나? 로벤, 에쇼 형제와 수장고를 드나들며 예언서를 훼손하려 한 걸.”
“그건…….”
“모두가 엔딩을, 원래 세계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어. 미래를 망치는 걸 아무리 중재자라 하지만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나?”
알레한드로는 엘리시아를 노려보았다.
“예언서는 앞으로 대신관만 아는 장소에 보관할 생각이지. 미치광이 모녀가 멋대로 행동하는 건 여기까지다.”
“정말 우습군.”
일레온이 차갑게 말했다.
“사람을 바보 취급 하고 있어. 대신관? 알레한드로? 자네 원래 이름은 뭔가? 정말 놀랍군. 원래 세계에서도 다른 사람의 인격을 이토록 무시하고 짓밟았나?”
그의 말에 알레한드로의 근엄한 표정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빙의를 하면 기본적인 예의도, 존중도 모두 잊어버리나? 원작? 예언서? 웃기지 말아. 책 한 권으로 남의 영혼까지 조종할 수 있는데 그대들은 왜 내가 카리나를 사랑하게 만들지 못했지?”
일레온이 턱을 들고 어깨를 편 채 알레한드로를 내려다보았다.
“안타깝지만 그대들이 기다리는 그 미래는 절대 오지 않겠군. 유감이야.”
말을 마친 그는 엘리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엘리시아.”
하지만 엘리시아가 멍하니 앉아 쳐다보기만 하자 그녀를 반쯤 들어 올리듯 끌어안은 채 밖으로 사라졌다.
“하아.”
냉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던 알레한드로는 일레온과 엘리시아가 사라진 후에도 그대로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셨다.
방금 전 지나간 폭풍이 별일 아니라는 듯 뜨거운 물을 찻잔에 따를 때, 방의 한쪽 구석에서 촛불에 간들거리던 검은 그림자가 쑤욱하고 길어지더니 소나텍이 나타났다.
흰 가면을 쓴 사내가 검은 후드의 옷자락을 사락 날리며 천천히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정말 명 연기군요. 이걸 혼자봐야 하다니 아쉬워서 어쩝니까. 원윤지에게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걸. 한 사나흘은 화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할 텐데 말입니다.”
자연스레 맞은편에 앉아 제 몫의 찻잔을 챙기는 그를 보고 알레한드로가 일갈했다.
“일을 이따위로 처리한단 말인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 그런데도 이런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다니.”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는 알레한드로를 보면서도 소나텍은 기죽지 않았다.
“카리나를 믿은 게 잘못이지요. 사비엘을 대할 때도 멍청한 줄은 알았지만 일 처리가 미숙합니다.”
“이제 어쩔 텐가? 일레온이 카리나를 마음에 둘 것 같지가 않으니. 정말 엔딩은 영 물 건너 간 거로 보이는데.”
알레한드로의 말에 소나텍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플랜B를 생각하셨던 거 아닙니까. 저와 함께 신좌에 오르시게 될 분이 무얼 염려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소나텍이 흰 가면을 벗었다. 그 아래로 드러난 훤칠한 청년이 눈매를 휘며 웃었다.
그의 연한 갈색의 눈동자와 알레한드로의 검은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할 때를 가정한 방편이었지. 플랜B가 플랜A가 될 순 없지 않나.”
“무슨 말씀을 그리 서운하게 하십니까. 대신관 님도 인정하시지 않았습니까. 마리엘라가 엘리시아와 카리나의 자리를 바꿨을 때부터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
“그나저나 대신관 님의 지혜에 탄복했습니다. 이 상황을 어찌 모면하나 했는데.”
알레한드로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지. 본래 타인을 믿는 것이 어려운 본성이다.”
그러니 믿고, 신뢰한다는 말을 특별한 것처럼 쓰는 것이다.
나는 너를 믿으니까, 너도 나를 믿어달라고.
“그걸 부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지.”
평온한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이 일 듯, 작은 구멍 하나가 댐을 무너트리듯.
관계를 흔들면 자기들끼리 의구심과 의혹을 일으켜 서로를 할퀴다 자멸할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군.”
알레한드로가 한쪽 벽에 다가가 숨겨진 장치를 건드리자 드르릉 소리를 내며 자연석처럼 보였던 석벽이 갈라지며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틈이 벌어졌다.
좁은 틈을 지나자 그 안에는 역시 돌을 깎아 만든 작은 제단이 있었다. 예언서는 보호해주던 고대 마법의 황금막을 잃은 채 그 위에 놓여 있었다.
“우리가 신좌에 오르려면 어딜 고쳐야 한다고?”
예언서를 넘기며 묻는 알레한드로를 보며 소나텍이 해사하게 웃었다.
***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옆으로 들어 안은 채 숙소를 안내해주는 신관의 뒤를 따랐다.
“두 분께서는 여기 나란한 방 두 개를 쓰시면 됩니다.”
“안내해주어 고맙군.”
“눈은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붕대를 감은 일레온을 보며 신관이 걱정스레 물었다.
“다친 지 오래된 것이니 염려할 것 없어.”
“그럼 편히 쉬십시오.”
신관이 물러가자 일레온은 배정받은 방 두 개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제법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방마다 환기 시설이 있는지 암굴을 파서 만든 방인데도 공기가 통하는 게 느껴졌다.
꽤 괜찮아 보이는 침대와 옷장, 책상과 의자가 놓인 방은 그리 비좁지 않아서 두 사람이 함께 써도 충분할 정도의 넓이였다.
그는 침대 위에 엘리시아를 내려주었다.
“엘리시아.”
이름을 불러도 그녀는 미동하지 않았다.
알레한드로 대신관에게 폭로를 들은 후로 그녀는 충격이 컸는지 내내 이 상태였다.
“엘리시아. 나 좀 봐봐.”
침대에 앉은 엘리시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며 일레온이 뺨을 감싸자 도자기 인형처럼 무감하던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차츰 돌아왔다.
“일레온. 아, 아니에요.”
엘리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제 뺨에 닿은 일레온의 손목에 두 손으로 매달렸다.
“대신관 님이 하는 말들 전부. 사실이 아니야.”
혼란에 빠진 엘리시아를 보며 일레온은 한숨 쉬듯 말했다.
“어젯밤에 내게 무슨 맹세 했는지 벌써 잊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