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길든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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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길든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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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길든 짐승
2023.02.18.
“어젯밤에 내게 무슨 맹세 했는지 벌써 잊었어?”
일레온은 초조한 심정으로 물었다.
“내게서 도망치지 않겠다고 했잖아.”
진창에서 함께 구르더라도, 거기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험이 그들을 덮칠 때라도.
“약속 지켜. 엘리시아.”
일레온은 끈질기게 초점이 좀체 돌아오지 않는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난 상관없어. 네가 겪어야 할 일들, 고통 전부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좀체 솔직하지 못하는 엘리시아가 털어놓았던 마음.
「난 이제 당신 못 놓으니까. 감당해줘.」
그 말에 얼마나 기뻤던가.
「당신이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사랑해줄게. 그러니까 내 옆에서 버텨줘.」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연인의 목소리가 얼마나 달았나.
“……일레온.”
“흔들리지 말아. 그러면 다른 것들은 다 내가 버틸 수 있으니까.”
네 마음이 내게 온전해야 하는데 네가 흔들리면 나는 어떡하라고.
일레온의 간절함이 닿았는지 흐릿하던 눈동자에 고여있던 눈물이 도르륵 굴러나오고는 초점을 되찾았다.
“으응.”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시아가 억지로 입술 꼬리를 올렸다.
“그럴게요. 믿어줘서 고마워.”
하아.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그거 알아? 넌 정말 나를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어.”
일레온은 축축하게 젖은 뺨을 문지르던 손으로 엘리시아의 머리를 쥐고 제게 끌어당겼다.
“흐읍.”
단숨에 깊게 입을 맞추자 엘리시아가 숨 막힌 소리를 냈다. 그러나 일레온이 바란 바였다.
엘리시아의 날숨을 빼앗고, 제가 허락한 들숨만 들이쉬게 했다.
그가 주는 대로만 숨을 쉴 수 있게 된 입술에 만족하며 일레온은 엘리시아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품에서 할딱이며 맥동하는 생명의 흔적이 그의 가슴을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하아. 흐읏. 일레온?”
갑작스레 몸을 붙여오는 그의 몸짓에 부족한 숨을 몰아쉬던 엘리시아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일레온.
그녀의 입술 사이로 제 이름이 불리자 뒷목부터 허리께까지 성냥불을 그어 불이라도 붙인 듯 사내의 욕심이 달아올랐다.
일레온은 엘리시아의 귓가와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체온이 낮은 자리에 닿는 화인 같은 키스에 엘리시아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하아.”
가느다란 목덜미에 뜨끈해진 이마를 대고 긴 숨을 토하자 엘리시아가 몸에서 힘을 빼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제게서 도망치려는 그녀를 붙잡았던 그 날을 빼면, 그는 엘리시아에게 무도하게 손을 뻗은 적이 없었다. 늘 간질간질한 대화를 나누다가 분위기가 동할 때 차츰 그녀의 손을 잡고 입술을 맞대곤 하였다.
하듄샤에서 내내 음전하게 자라 순진한 그녀를 배려하는 일이라 여겼고, 그게 연인에 대한 신사가 지킬 매너라고 생각했다. 그 또한 어릴 때부터 몸에 배도록 교육받은 사교매너가 아닌가. 모든 애정 표현은 엘리시아가 허락을 해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키스와 평소와 다른 성급한 손길에 뺨을 붉힌 채 저를 올려다보는 엘리시아를 보니 그토록 그를 거슬리게 했던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네가 그런 얼굴 하는게 싫어.”
“네?”
“신관 엘리시아.”
인간의 감정을, 속세의 번뇌를 잊은 얼굴.
아름다운 도자기 인형처럼 반듯하고 무감한 얼굴로 뭇 사람들을 고해하게 만드는 얼굴.
“나를 외면할 때 얼굴이잖아.”
사람들 틈에 섞여 분위기를 엿보려 하였던 거였지만, 엘리시아와 옷을 고르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일레온은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줄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그의 옆에서 눈을 마주치고 마주 보고 웃어주는 그녀가 예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난 이제 당신 못 놓으니까. 감당해줘.」
언제든지 몇 번이든 그를 떠났던 것처럼 또 마음이 변해 무슨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대고 또 등을 돌릴까봐 불안한 연애.
의식이 없는 여자를 제 짝으로 만들면서 일레온은 자신의 질척이는 욕망을 알았다.
그렇게라도 엘리시아를 옆에 붙잡아두고 싶었다.
동의를 구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엘리시아는 항상 예상하지 못한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그를 떠나려 했으니.
엘리시아를 살릴 유일한 방법이라는 방패가 있었지만 그 밑에 깔린 건 욕심이었다. 그것을 주변의 모두가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그녀를 위해서라는 미명아래 용인해주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라도 저 혼자만 그녀에게 이렇게 목을 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시아는 언제든 그의 손을 놓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그러고도 단 한순간도 가시지 않았으니까.
엘리시아를 사랑하는 일은 빛과 그늘이 공존하듯이 늘 이런 순간이 함께 닥쳤다.
고작 한나절 전에 사랑을 약속하고도 또 신관의 낯으로 그를 외면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아는데. 불안해. 네가 그런 얼굴로 내 앞에 있으면 언제든지 나를 모른 척 할 것 같아.”
일방적인 애정은 아름답지 못한 고통이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괴로울 일이 없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나는 본 적도 없는 널 이토록 사랑하게 되었을까.
베르나르도, 저택의 다른 하인들도 내게 충실하고 성실했건만, 어째서 네가 하는 말 한마디만은 다르다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을까.
마치 이번 생은 너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내게는 너뿐이라고 각인되기라도 한 것처럼.
일레온은 괴로웠다.
엘리시아가 그를 모른 척 한 것도 아닌데 잠시 신관의 가면을 쓰는 걸 지켜본 것만으로도 불안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무엇이 사실인지 그딴 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작, 예언서.
이 세계, 다른 세계.
원래의 전개, 수정된 이야기.
“내가 너한테 미쳐 있다는 거. 이것만이 진실이야.”
그가 느끼고,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이 일레온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거였다.
아니, 엘리시아에게 이토록 꽂혀 있다는 건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그러니까 대신관이 하는 개소리 따위 변명할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나만 봐.”
그런 헛소리가 거짓말이라고 저를 믿어달라 하기 전에 사랑한다는 말이나 해주었으면 했다.
“내가 널 놓는 일은 없을 테니까.”
속에서 거칠게 날뛰는 속내를 털어놓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엘리시아의 침묵에 일레온은 후회했다.
신뢰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일이지만,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없다.
일레온 자신도 제 감정이 순수하지 못하다고 질척거린다는 걸 알았지만 그걸 엘리시아에게 알게 하거나 이해시키고 싶은 건 아니었다.
방금 일은 충동적으로 일어난 거였다.
엘리시아가 저와 한뜻이 된 것 같아 천국에라도 오른 듯 날아오르다가, 알레한드로에 의해 나락으로 처박힌 것 같아 널을 뛰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진심인걸.
기왕 쏟아낸 것을 주워 담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제부터 엘리시아가 그를 밀어내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그의 의식이 집착의 광기를 띄기 직전.
꼬옥.
엘리시아가 그를 마주 안았다.
“흔들린 거 아니에요.”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비죽비죽 들쑤시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놀라서. 놀라서 그랬어요.”
엘리시아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등을 쓸어주자 일레온은 폭주해서 터져버릴 것 같던 심장이 길든 짐승처럼 기세를 죽인 채 온화해지는 걸 느꼈다.
“대신관 님이 제가 빙의자가 아닌 줄 알면서도 하듄샤에 받아주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차분히 말하는 엘리시아는 평정을 되찾은 목소리였다.
“엄마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아니 사실은 좀 이상하다고 느낄 때가 있긴 했어요.”
차기 대신관 후보로 여겨지던 엘리시아가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서 사라진 건 엄청난 일이었다. 게다가 알레한드로 대신관은 신들의 신탁을 받지 못 한 지 오래라, 신전 내에서 입지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늘고 있었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가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소!」
「신탁을 전하지도 못하면서 대신관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하루빨리 엘리시아에게 대신관의 지위를 넘기길 주장했다.
「다섯 주신과 오데르? 설정에 우리가 뭐하러 목을 매지?」
「알레한드로가 신전 운영을 잘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오래 대신관을 맡을 수 있던 사람이 누가 있어? 잘하는데 그냥 내버려 둬.」
철저히 빙의자 입장에서 그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알레한드로를 지지하는 이들은 신전을 양분해서 은근히 기 싸움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엘리시아가 살아 돌아왔는데도 알레한드로는 단칼에 하듄샤에서 파문시켰다. 기억을 잃고 신탁을 들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정작 기억을 되찾고 다시 하듄샤에 돌아가려 하자, 그때도 반대했었다.
그때는 알레한드로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처한 상황이 긴박해서 달리 생각할 여유가 없었는데 오늘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나니 이해가 갔다.
대신관 알레한드로 그는 엘리시아가 진작 예언서대로 사라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였다.
“당신을 불안하게 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엘리시아가 그를 달래려 하자 일레온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중증이네.’
그녀는 너무 쉽게 그를 지옥에서 꽃밭으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당신이 더 당황스러웠을 텐데. 내 생각만 해서 미안해요.”
“앞으로의 일이 문제겠군. 여기서 내 정체를 들키면 정말 곤란할 것 같은데.”
저를 끌어안은 엘리시아의 온기에 온 신경이 쏠렸다. 그 와중에 입으로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다니 오데르여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군요.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원작이 망가진 걸 모두가 알게 되어버려요.”
그 원인이 엘리시아라는 걸 알면 그레로사 안에서 당장 폭동이 일어날지 몰랐다.
「자연히 원망도 분노도 엘리시아를 향하지 않겠나?」
지상으로 빠져나갈 길이 관리국에서 열고 닫아주는 한 길뿐인데 살아서 나가기 힘들지도 몰랐다. 그들은 반쪽짜리 오데르의 계약을 했으니 엘리시아가 일레온처럼 전지전능한 재생의 힘을 쓸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두려운 기분이 들었는지 몸을 떠는 엘리시아를 일레온은 꼭 끌어안아주었다.
“걱정할 것 없어. 내가 지켜줄 테니까.”
“당신이 위험해지는 건 싫어요.”
“피차일반이군.”
일레온이 엘리시아의 이마에 뺨을 비볐다.
“어찌 될지 모르지만 우리 일행이 그레로사에 도착하면 세드릭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
“여기서 당장 도망치는 게 최선일 수도 있어요.”
엘리시아는 소요가 일어날 것이 걱정인 듯 했다.
“아니. 예언서를 없애기 전엔 물러날 수 없지.”
“예언서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알레한드로가 저렇게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다면 몰래 찾으러 다닐 기회가 있을 리 없었다.
“아니. 벌써 찾았어.”
“뭐라고요?”
“아까 그 방에 있었잖아.”
일레온이 싱글거리자 엘리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 방에 있었다고요?”
“그래.”
“아니. 예언서를 본 기억이 없는데.”
“궁금해?”
엘리시아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해주면 말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