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비밀이 많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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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비밀이 많은 남자
2023.02.25.
“이제 둘 다 구면이군?”
흰 가면을 쓴 사내와 알레한드로가 동시에 그를 보았다.
“여길 어떻게?”
“그쪽이 떠받드는 주신들께 여쭤보는 게 빠르지 않을까? 내가 좀 비밀이 많은 남자라서.”
일레온의 말에 알레한드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신관님!”
엘리시아가 무너진 입구 앞에 서서 외쳤다.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거예요?”
고작 반나절 전, 마리엘라와 자신을 미치광이, 거짓말쟁이로 몰며 소나텍이 존재하지 않는 망상이라던 이였다.
소나텍을 엘리시아 역시 실제로 처음 보았으나 늘 어머니가 당부하며 말했던 것과 너무 꼭 같아서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았다.
소나텍.
나와 엄마를 불행의 굴레로 몰아넣은 자.
엘리시아는 심장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투지를 느꼈다.
그녀를 죽음으로 인도할 대적자로 예정된 사비엘조차 엘리시아 자신을 먼저 공격하기 전에는 이토록 맹렬하게 적대감을 갖지 않았었는데.
소나텍을 보자마자 분노가 한계에 다다랐고, 그 옆에 선 것이 하듄샤에서 17년 동안 함께 지냈던 알레한드로라는 점이 더더욱 참을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알레한드로가 대꾸했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자네들이 예언서에 손대지 못하게 우리의 미래를 지킬 것이라고.”
“교단의 미래를 지키려는 게 맞나?”
일레온이 날카롭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믿을 수가 없군. 대신관. 뭘 알고 있는 거지?”
그의 적안에 형형한 빛이 어렸다. 동시에 좁은 비밀 공간을 일레온의 존재가 압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읏.”
그의 등 뒤로 입구에 서 있던 엘리시아조차 무언가 눌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앞뒤가 맞지 않는군.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야 말겠다더니. 소나텍과 한 패라니 엔딩을 포기하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데도 책을 신주단지 감싸듯 하고 있는 알레한드로의 모습은 의뭉스러웠다.
“으으으.”
일레온의 기세에 맞서듯 이를 악물고 예언서를 꽉 안고 있던 알레한드로가 불시에 소나텍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소나텍!”
그러자 무어라 할 틈도 없이 두 사람의 인영이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가며 사라졌다.
“사라졌어요!”
“이건 카리나 영애가 말했던 그 능력인가.”
카리나를 병원에서 하듄샤의 수장고로 데려가서 예언서를 보여주었다고 했었다.
눈을 감고 소나텍의 손을 잡으면 다른 공간으로 이동을 했다고 말이다.
그림자 이동술.
마리엘라의 말에 따르면 그가 쓴다던 능력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그 병원의 의사라던 소나텍은 베르베에서 태어난 청년인데. 공작부인의 말씀과는 나이가 맞지 않아서.’
소나텍이라면 마리엘라보다는 나이가 많거나 비슷해야 한다. 마리엘라의 자식뻘인 청년이 소녀 시절 그녀를 협박할 수는 없었을 테니.
차라리 알레한드로의 쪽이라면 모를까.
흰 가면 아래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아주 젊은 청년의 것이었다.
“일레온. 어떻게 하죠?”
엘리시아가 당황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야 할 텐데.”
“여기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야.”
세드릭이 일행과 함께 거의 그레로사에 다다랐을 것이다. 지상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터널을 따라.
“세드릭에게 말을 전할 수 있다면 대신관과 마주치자마자 손을 쓸 수 있을 텐데.”
“전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엘리시아가 주먹을 꽉 쥔 채 결연하게 말했다.
“신들이 혹시 부탁을 들어준다면.”
“신탁으로? 그게 가능한가?”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주신들은 저와도 로벤이나 에쇼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요.”
엘리시아는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신탁을 개방했다.
휘리릭.
정체된 공기의 좁은 공간에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순식간에 엘리시아의 머리 위로 환하게 빛나는 빛무리가 떠올랐다. 전할 말을 압축하느라 그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고 있던 일레온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상하군.”
일레온도 몇 번이나 엘리시아가 신탁을 받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신들이 선택한 고결하고 성스러운 신관.
절로 머리가 숙여질 것처럼 뭇 사람들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 무감한 얼굴. 이 얼굴을 일레온은 엘리시아의 모습 중에 가장 싫어했다.
어쨌든 평소 고아한 분위기를 내며 그녀의 머리 위를 떠돌던 빛무리가 파지직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강한 빛을 내고 있었다.
“신들께서 뭐라고 해?”
하지만 엘리시아의 상태가 이상했다. 무언가를 꾹 참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꽉 감은 눈가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서렸다.
“엘리시아? 괜찮은 거야?”
일레온은 오데르였지만 그렇다고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엘리시아가 신탁을 받을 때의 상태라던지 그런 건 그가 무지한 영역이었지만, 신들이 한 번은 엘리시아에게 기도실에서 키스하는 것도 허락해주지 않았던가.
“엘리시아.”
그가 조심스레 엘리시아의 몸에 손을 대었을 때였다.
“이, 일레온.”
손을 타고 엘리시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래?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거야?”
“윽. 하아. 하아.”
엘리시아는 숨이 모자라 답답하기라도 한 것처럼 두 손으로 제 목을 잡고 괴로운 듯 몸을 비틀었다.
“엘리시아! 정신 차려!”
일레온이 그녀가 숨을 쉬도록 고개를 젖혀주려 할 때였다.
“……쳐.”
엘리시아는 벌어진 입에서 가느다란 소리를 내고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설마…….”
그것을 놓치지 않고 알아들은 일레온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
비밀의 지하도시로 향하는 길은 고되었다.
완만하고 구불구불한 경사로는 말과 수레, 마차가 지나도록 충분히 넓었다.
하지만 꽤 대인원이 이동하다 보니 동굴 안에 울리는 바퀴와 말발굽 소리가 시끄러워서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위치상, 한참 지나온 협곡 쪽을 지하를 통해 반나절은 가야 도착한다는 게 아닌가.
“정말 영문을 모를 일이네요.”
없던 마차 멀미가 심해 세드릭의 말에 신세 지고 있던 이리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었을까요? 협곡 쪽에서 드나들 수 있게 만들면 좋았을 텐데요.”
산도 덜 올라도 되고.
그녀의 말에 세드릭이 답했다.
“어떤 목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목적이요?”
“가령 그 위치에 있어야만 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든지.”
좀체 동의하거나 납득하기 힘든 애매한 대답에 이리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뭐 가는 길이 까다롭고 복잡하니 확실히 신비한 건 있겠네요.”
이리스 또한 그레로사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전에 엘리시아가 먼저 출발하고 따를 예정이었으나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이리스도 아예 그레로사에 가지 않고 내내 하듄샤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출구가 보이는군요.”
“정말요?”
세드릭의 말대로 길었던 동굴 끝에 반원형으로 된 출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쪽으로부터 정체되어 답답했던 것과 다른 공기의 흐름이 밀려오자 이리스는 화색이 돌았다.
“어휴.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이변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쿠르르르르릉.
거대한 무언가가 딛고 있는 바닥 아래를 긁고 지나가기라도 한 듯 구르는 진동과 소리가 느껴졌다.
“이게 뭐죠? 그레로사 원래 이런가?”
이리스가 얼떨떨하게 묻자 세드릭의 얼굴이 굳었다.
“잠깐, 잠깐만요!”
한참 행렬의 뒤에서 에쇼가 말을 몰아 앞쪽으로 달려 나왔다.
“크, 큰일 났어.”
“무슨 일인데?”
“로벤이 신탁을 받다가 쓰러졌어.”
“뭐라고? 갑자기 신탁이라니.”
로벤과 에쇼는 몇 되지 않는 신탁을 받을 수 있는 고위신관이었다.
그러나 요즘 신들의 방문이 없어 의아한 상태였다.
이러다 알레한드로 대신관처럼 신탁을 받지 못하는 반쪽짜리 신관이 되면 어쩌냐고 에쇼가 때때로 폭주할 정도였다.
“모르겠어. 도망치라고만 하고 쓰러져서.”
“어? 이게 뭐지?”
그때 행렬의 선두에서 곁에 있던 누군가 의아한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인가?”
세드릭이 묻자 호위 하나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대장님. 물이 있습니다.”
“뭐?”
“출구 쪽에 말입니다. 발목까지 물이 차고 있습니다. 가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부하의 보고를 받은 세드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열을 돌린다.”
“네?”
“못 들었나? 당장 대열을 돌린다. 여길 빠져나가야 해.”
세드릭이 자신이 타고 있던 말에 묶여있는 커다란 붉은 깃발을 풀어 이리스에게 건네었다.
“신관께서는 마차를 타십시오.”
“기사님은요?”
“주군께서 안에 계십니다. 저는 안쪽을 수색하러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저도 갈래요. 엘리시아 님도 계신 거잖아요?”
이리스가 다급하게 말하자 세드릭은 그녀의 뜻을 묵살하고 깃발을 쥔 그녀를 말에서 내리게 했다.
“위험합니다. 그리고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고요.”
“그런…….”
잠깐 사이에 불어난 물이 아까보다 깊어지는 게 시시각각 눈으로 보였다.
“어서 출발해라!”
세드릭의 명령에 우왕좌왕하던 기사들이 자리를 찾을 때였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출구 쪽에서 차오르는 물을 가르며 달려오는 말 한 마리가 있었다.
“저, 저분은.”
호위로 변장하고 있던 기사들이 저도 모르게 일제히 환호했다.
“대공 전하!”
품에 엘리시아를 안은 채 빠르게 달려오는 일레온을 보고 세드릭의 미간에서 주름이 사라졌다.
“여기서 만나 다행이군.”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세드릭의 말에 일레온이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글쎄. 아직 그 인사를 나누기에는 이르군.”
***
신들의 목소리가 격렬하게 엘리시아를 반겼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는 원망과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밀려 있다는 투정, 그리고 예언.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신의 음성은 정작 그들에겐 제일 뒷전이었다.
신좌에 오른 그들도 한때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본래 하고 싶은 말이 많고 무엇을 먼저 말할지는 자기 본위대로 멋대로 정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 다섯 주신의 목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엘리시아는 신탁을 여는 것이 늘 고통스러웠다.
관조의 세계로 떠난 신격이 인격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한번에 머릿속으로 밀려왔다가 알아듣지 못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얼얼한 통증을 남겼다.
파도가 바닷가 모래톱을 끝없이 긁으며 제가 왔다 갔노라고 남기는 자국처럼.
신들과 이야기를 오래 나눌수록 엘리시아의 몸과 정신은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자연히 분리된다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때때로 예언은 흘러가는 장면이 되어 선명하게 보였고, 그녀가 겪는 일처럼 감각을 공유했다.
[……모세관 현상이란 표면 장력에 의해 좁은 관을 타고 물이 오르는 현상으로 낮은 곳의 물이 중력을 거슬러 높은 곳으로 이동을 할 수 있고…….]
흰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누군가가 말하는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아악!]
[살려줘요!]
[아아아아!]
어제 일레온과 손을 잡고 거닐었던 그레로사의 별세계 같던 광장과 상점들에 물이 차오르며 모두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엘리시아의 숨을 죄었다.
“엘리시아.”
“헉.”
허공에 손을 허우적대듯 휘젓는 그녀를 익숙한 체향이 풍기는 단단한 몸이 꽉 끌어안아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머리를, 등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엘리시아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엘리시아 님.”
머리끝을 희게 탈색한 붉은 머리의 아가씨가 눈물을 글썽였다.
“아아.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아니야. 아직 무사하지 않아.
정말로 숨통이 틀어박혔다 놓인 듯 가슴이 먹먹해서 엘리시아는 멍한 채 겨우 숨을 헐떡였다.
“전속력으로 이곳을 벗어난다. 이리스. 엘리시아를 잘 부탁해.”
“네. 전하. 무사하세요.”
일레온이 그녀를 마차 안에 눕혀 두고 내리려 했다.
꽈악.
엘리시아는 벌벌거리는 손을 움직여 일레온의 셔츠를 쥐었다.
“……안 돼요.”
“엘리시아.”
절대로 그를 놓을 수 없었다. 아니, 놓아서는 안 되었다.
“가면 안 돼. 가지 말아요.”